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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자가 바람의 마법사?
말이 안 된다.
그는 어떻게 알았을까? 철저하게 신분을 숨기고 다녔다. 몸에 지닌 신분증마저 가짜였는데. 그는 가장 은밀한 비밀마저 알고 있었다. 그가 한 말은 폐부 깊숙한 곳을 찔렀다.
아버지로부터의 해방은 비밀스러운 꿈이었다.
어릴 때부터 아버지는 황제에게 충성을 다하는 신하였다. 가족보다는 황제가 우선이었고, 충성에 목숨을 걸었다.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존경하는 아버지를 석현담은 우러러 볼 수 없었다. 어머니의 임종을 지킨 사람은 바로 자신이었다. 아버지는 황제가 내린 명령을 수행하느라 장례식이 끝난 뒤에야 돌아왔다.
아버지는 그에게 애증의 대상이었다.
무조건 미워할 수가 없었다. 그럴 수 있었다면 삶은 쉬워졌을 것이다. 아버지를 증오하면서도 사내처럼 하나의 목표를 두고 삶을 거는 아버지를 닮고 싶었다. 그래서 마법을 배웠고, 자신에게 매우 드문 재능이 있음도 알았다. 또한 아버지에게 인정받고자 원치 않는 길로 들어섰다.
기회는 매력적인 단어, 울림이 큰 단어였다.
이름마저 바꾼다면 아버지로부터 완전히 벗어나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도 있으리라.
한숨이 흘러나왔다.
이 기회, 놓치고 싶지 않았다.
“……이제 뭘 하지?”
마법과 첩보, 그가 살아온 시간의 전부였다. 아버지의 손과 발이 되어 제국 곳곳을 갖가지 정보를 수집했다. 첩보는 마법으로 아버지를 만족시킬 수 없음을 깨달은 후에 그가 택한 길이었다.
그에겐 친구도 없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신분을 바꾸며 살아야 하는 그에게 친구는 사치스러운 단어였다.
어디서,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막막했다.
용금탄으로 돌아갈까? 황제에 대한 충성으로 바빠서 아들을 걱정할 여유조차 없는 아버지 곁으로?
생각만으로 가슴이 턱턱 막혔다.
그래, 고민은 천천히 하자. 시간은 많다.
마음이 편해져 몸이 이완되자 졸음이 몰려왔다. 석현담은 열기를 보존해 주는 마법진이 그려진 돌침대 위에 누워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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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뭔가?”
황제는 석장명이 가져온 문서를 가리켰다. 감추려 해도 목소리는 떨렸다. 황제의 일상은 규칙적이며, 웬만한 일은 그 규칙을 깨뜨릴 수 없다. 잠든 황제를 깨웠다면 결코 가벼운 일은 아닐 터. 황제는 최악의 상황을 생각하며 석장명을 쳐다보았다.
“유타루체에서 올라온 첩보입니다, 폐하.”
“유타루체?”
황제는 주먹을 꽉 쥐었다.
순간, 애처롭던 새끼 새가 날개를 퍼덕이며 날기 위해서 애쓰는 장면이 떠올랐다.
‘단태’라는 이름이 붙은 그 새는 궁녀 설희가 매일 정오에 황제 앞으로 데리고 왔다. 낮에 그 새의 상태를 본 황제는 황족의 건강을 살피는 태의를 불렀는데, 날개 한 쪽이 부러져 날기 어렵다는 보고를 받았다. 둥지에서 떨어져 다친 모양이었다.
황제는 솔직하고 귀여워 저절로 눈이 가는 설희에게 말했다.
“애쓰지 마라. 날 수 없는 새라니까.”
“날개를 계속 쓰면 날 수 있을지도 몰라요. 아, 죄송합니다, 폐하.”
단태에게 신경을 쓰느라 황제 앞이라는 사실을 깜빡 잊은 궁녀는 허리를 굽혔다.
황제는 격식에 얽매이지 않고 자연스럽고, 그만큼 엉뚱한 이 궁녀가 마음에 들었다.
“하고 싶다면 계속해 봐. 어쩌면 기적이 일어날지도 모르니까.”
“감사합니다, 폐하.”
기뻐서 웃는 설희는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왜 지금 그 새와 궁녀 생각이 날까? 황제는 고개를 흔들며 앞에 놓인 문서를 들고 읽기 시작했다. 석장명이 자정이 넘은 시각에 법도를 무시하고 찾아온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자세히 설명해 봐.”
“대사마의 식객으로 알려진 부윤성이 직접 유타루체로 내려갔습니다. 부윤성은 폐하도 알다시피 대사마 좌영윤의 책사라 할 만한 인물입니다. 골방에 들어앉아 천하를 내다보며 좌영윤에게 적절한 충고를 하던 인물이 직접 움직였으니, 중요한 일이라고 판단해서 믿을 만한 사람을 붙였습니다.”
“혹시 석현담을 보냈나?”
황제는 편지를 손에 쥔 채 석장명을 쳐다봤다. 어딘지 모르게 노마법사의 얼굴이 어둡고 평소보다 더 딱딱했다.
“……그렇습니다.”
“자네가 아들을 직접 보냈다면 예사로운 일은 아니겠군. 계속하게.”
“석현담은 부윤성이 누구를 만나는지 알아내기 위해 유타루체까지 들어섰는데, 미행을 들키고 말았습니다. 부윤성을 호위하는 자들과 싸움이 벌어졌고, 겨우 이 편지를 보낼 수 있었습니다.”
“현담은 괜찮나?”
“……제게 이 편지를 보낸 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
황제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들고 있기에 편지가 너무나 무거웠다. 석장명의 아들이 이 편지 때문에 죽다니. 화가 났다. 들켰으면 차라리 몸이라도 빠져나오고 후일을 도모하면 될 것을.
“아버지로서 마지막까지 충성을 다한 아들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폐하.”
“그런 소리는 집어치워. 죽으면 끝이야. 아무리 그래도 살아 있어야 해!”
버럭 소리를 지른 황제는 의자를 박차고 일어나 창가로 걸어갔다. 눈물이 왈칵 쏟아질 뻔했다. 어떠한 일에도 황제는 흔들려선 안 된다. 눈물을 보여서도 안 된다. 황제는 제국의 기둥, 황제가 흔들리면 제국이 흔들린다. 그랬기에 그는 눈가에 힘을 주고 눈물을 억눌렀다.
“배후에 누가 있을 것 같나?”
“아직은 확실치 않습니다.”
“시장 반명인가? 아니면 11인위원회? 그도 아니면 마둔수탑?”
돌아선 황제의 눈은 분노로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군대라도 동원하여 유타루체를 쓸어버리고 싶었다.
“사적인 감정은 폐하께 어울리지 않습니다. 부윤성은 맹진국의 판금우와도 연이 닿는 인물입니다. 부윤성이 대사마 좌영윤의 책사로 자리를 잡은 후, 폐하께서 그동안 지혜롭게 사용해 온 이간책이 무용지물이 되었습니다. 더 이상 승상 동예, 환관 평용구 그리고 대사마 좌영윤은 서로를 의심하며 견제하지 않습니다. 부윤성 외에도 비백포, 물항, 무청 등 뛰어난 인재들이 동예와 평용구를 돕고 있습니다. 확인된 바는 없지만, 부윤성과 비백포, 물항, 무청은 비슷한 시기에 등장하여 권력의 정점에 있는 자들 곁으로 접근했다는 점에서 서로를 잘 아는 관계일지도 모릅니다.”
“설마 그들이 승상, 대사마, 환관장을 움직이고 있다?”
황제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 능구렁이 늙은이들이 누군가의 말을 듣고 거기에 따라 움직일 리는 없다.
“믿기 힘들지만, 그들이 합류한 이후 용금탄의 분위기가 급격하게 바뀌고 있습니다. 쓸모없는 정쟁은 줄어들었지만, 그로 인해 국정 운영의 상당 부분은 승상, 대사마, 환관장의 손에서 처리되고 있습니다.”
“음…….”
무시할 수 없는 지적이었다.
황제는 무소불위의 권력자라고 알려져 있지만, 제국은 한 사람이 좌지우지할 만큼 간단한 조직이 아니었다. 바다만큼 광활한 제국을 움직이기 위해서는 체계, 역사, 철학, 경제, 기술 그리고 법에 능숙한 다수의 사람들이 필요했다. 승상부에 모여 있는 백관들, 대사마 휘하에 있는 노련한 장군들, 환관장이 이끄는 환관들은 제국이 우뚝 서서 달려갈 수 있도록 만드는 뼈대이자 힘줄이며, 몸을 휘도는 혈액이었다.
황제가 이 거대한 몸체를 장악하기 위해서는 견제와 협박, 포상과 처벌 등 다양한 정치적 기술이 필요했다. 승상과 대사마, 환관장이 서로를 의심하여 연합할 수 없도록 만든 건, 바로 황제가 제국을 이끌기 위해서였다. 어린 나이에 즉위하여 만인지상의 자리에 오른 그는 석장명의 충고를 받아들여 지금까지 이간책을 위주로 제국을 운영했는데, 최근 분위기는 급변하고 있었다.
“자네의 의견은?”
황제는 아들의 죽음을 애도하기보다 이곳으로 찾아와 슬픔과 분노를 억누르고 앉아 있는 늙은 아버지를 쳐다봤다.
“어둠에 숨어 있는 적을 밝은 곳으로 끌어내야 합니다.”
“어떻게?”
“제게 계책이 있습…….”
석장명은 터져 나오는 기침을 참지 못했다. 마력으로 억눌러도 소용이 없었다. 급히 입을 막은 손바닥에는 시뻘건 피가 흥건하게 묻어 있었다.
“죄송합니다, 폐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