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단태신곡-200화 (200/293)

<-- 200 회: 5-35 -->

“계책은 내일 듣도록 하지. 당장 태의에게 가 봐. 그리고 마음을 추슬러. 그다음에 찾아오도록.”

“……성은이 망극하옵니다, 폐하.”

석장명은 고개를 숙인 채 황제의 침소에서 빠져나왔다.

홀로 남은 황제는 그 편지를 다시 읽었다. 한숨이 흘러나왔다. 제국은…… 끊임없이 문제를 만들어 내는 거대한 자동기계였고, 황제는 골치 아픈 자리였다. 가뭄도, 홍수도 황제가 무능한 탓이었다. 화산이 터져도 황제 때문이었다. 백성들은 황제를 신의 아들로 철석같이 믿었는데, 통치에 도움이 되는 부분이 있는 반면, 신의 아들로서 이뤄 내야 하는 기적은 한도 끝도 없었다.

이럴 때면 황제의 자리에서 물러나고 싶다. 평범한 삶, 한 번도 접해 보지 못한 삶은 어떨까? 황궁을 빠져나가면 새로운 삶이 펼쳐질 텐데. 물론 황궁의 새로운 주인이 이전 주인을 찾아내어 죽이지 않는다면.

침대에 누웠지만 잠은 달아나 버렸다. 누군가 배후에서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보고를 받으면 며칠은 잠도 잘 수 없고, 음식도 넘어가지 않는다. 몸을 일으킨 황제는 바깥에서 대기하는 환관을 불러 명령을 내렸다.

잠시 후, 궁녀 설희는 손바닥에 단태를 올린 채 황제의 침소로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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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열군주는 암석을 들어 표면을 살폈다. 퇴적암 특유의 층이 마음에 들었다. 그가 손에 쏙 들어가는 그 암석을 양손으로 쥐고 열과 압력을 가하자, 잠시 후 암석은 변형되어 대리석 같은 문양을 가진 매끈한 돌로 바뀌어 있었다.

“열, 압력 그리고 시간은 세상을 빚어내는 자연의 방식이지. 암, 그렇고말고.”

늙은 용은 그가 직접 용옥 내부에 구축한 방염산의 분화구를 거닐었다. 시간은 흐르지만 더 이상 의미를 가지지 않는 이 세계에서도 그가 이성을 유지하는 이유는 그 자신도 몰랐다. 용옥에 기억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가두는 결정은 고귀한 희생이었지만, 실은 역사상 최초로 용옥에 자신을 가두는 용이 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끓어오르는 용암은 아무리 봐도 질리지 않는다. 열과 압력에 녹은 암석은 끈적끈적한 액체처럼 출렁거린다. 무엇이든 다가오면 태워 버리는 화염은 아름다울수록 접근을 거부하는 미녀와 닮았다.

공간이 미묘하게 흔들렸다.

놈이 왔다는 뜻.

무열군주는 즉시 공간을 이동하여 출구 근처로 향했다. 의문이 생기면 언제든지 찾아오는 놈이 보였다. 이번에는 무슨 이유로 찾아왔을까? 궁금해서 설레기까지 한다.

“명룡 유천주의 잠룡 료마주가 인사 올립니다.”

놈이 말했다.

“나는 용오군 중 하나인 적서룡 무열군주라고 하네. 유천주는 처음 듣는 이름이구먼. 그건 그렇고, 자네의 시대는 제국력 몇 년인가?”

무열군주는 평범한 용옥 속의 기억인 것처럼 놈이 수십 번 들었던 말을 반복했다.

“지금은 제국력 1493년입니다.”

놈은 망설이지 않았다. 같은 답을 반복했으니 굳이 묻지 않아도 튀어나올지도 모른다.

“그런가? 시간이 제법 많이 흘렀군. 그대를 보니, 어딘지 낯선 느낌이 드는구먼. 그 이유를 물어도 괜찮겠나?”

“저는 현룡 무한주처럼 인간 사이에서 성장했습니다.”

“그래?”

“자네에게서 물과 바람의 향기가 느껴지는군.”

이전과 같은 질문 그리고 대답.

무열군주에게 놈은 기다리면 오지 않지만, 잊어버리면 찾아오는 기묘한 손님이었다. 용족을 덮친 저주를 벗어나려 발버둥을 쳤지만 결국 방법을 찾아내지 못한 그는 동족의 도움을 받아 용옥에 자신을 가두었다. 용옥 내부에서라도 저주를 이겨 낼 방법을 알아내기 위해서였다. 물론 후대의 용에게 도움을 주려는 이유도 있었다.

놈은 묻지도 않은 이야기를 시작했다.

무열군주는 잠자코 귀를 기울였다. 처음엔 마음씨 좋은 할아버지처럼 입가에 미소를 지었지만 곧 웃음기는 가셨다. 유천주가 금기를 어기고 결존계를 건설하여 인간을 하족으로 삼으려 했다는 내용을 듣는 순간, 버럭 솟구친 화를 참느라 애를 먹었다.

놈이 질문 대신 택한 설명만으로도 충분히 놀란 무열군주는 놈의 입에서 흘러나올 질문이 무엇일지 눈치챘다.

“어떤 인간의 손을 잡았는데, 마치 결존계에 연결됐을 때처럼 그 인간의 내면을 볼 수 있었습니다. 유천주는 분명히 결존계를 중단시켰습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요? 왜 특정한 사람의 내면만 읽을 수 있을까요?”

예상은 적중했다.

“자네는 인간과 연결되었다. 불완전한 방식으로.”

“……그게 무슨 뜻입니까?”

“인간이 자네의 하족이라는 뜻이지. 불행히도.”

무열군주는 진심을 담아서 말했다.

금기에는 명백한 이유가 있다. 인간은 여러 가지 영역에서 보통 동물을 뛰어넘는 독특한 종족이다. 심지어 용조차 깜짝 놀랄 만한 성취를 해내기도 한다.

과거 인간을 하족으로 삼았던 멍청한 용이 있었다. 그 용으로 인해 용족만의 능력이었던 마법이 인간에게로 흘러갔다. 인간 특유의 활력 덕분에 그 용은 수천 년을 살 수도 있었지만, 당대의 용오군이 그 용을 쫓아가 죽였다.

인간 사이에 드문드문 태어나는 마법사는 당시 그 용의 하족이었던 인간들의 후손이라는 게 무열군주의 판단이었다. 한 번 시작된 마법의 핏줄은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대륙 곳곳으로 퍼져 나갔는데, 가끔 아레마고처럼 탁월한 마법사가 출현해 용족에게 경악이라는 낯선 감정을 안겨 주었다.

저놈은…… 그 용이 저지른 만행의 절정이었다. 인간은 용의 유산을 잇지 못한다. 희석되었다고 해도 용의 피가 흐르는 인간이 아니라면 용의 유산을 담을 수 없다. 저놈의 핏줄을 거슬러 올라가면 분명히 그 용 곁에서 마법을 익혔던 인간과 이어질 것이다.

용족은 해결책이 없는 재앙으로 사라지는데, 인간은 오히려 용의 유산을 받아들여 용에 가까워지고 있다니!

무열군주는 근거 없는 판단을 증오했다. 이성적 사고만이 저주로부터 용족을 구하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믿었다. 그럼에도 그는 저주의 원인이 그 용이라는 직감을 떨칠 수 없었다. 그 용이 멋대로 인간과 맺은 계약 때문에 용족 전체가 그 대가를 치르고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또 인간을 하족으로 삼았다?

유천주라는 어리석은 용은 절벽 끝에 매달린 용족의 운명을 아래로 던져 버린 셈이다.

“……불행이라니요?”

놈이 물었다.

무열군주는 놈을 쳐다보았다. 놈은 용이 아니다. 그렇다고 인간이라고 볼 수도 없다. 용의 심장이 펄떡펄떡 힘차게 뛰고 있으니까. 어쩌면 저놈이야말로 용족에 가장 가까운 존재일지도 모른다. 다른 용이 모조리 저주로 죽어 버렸다면.

만약 그 용이 인간을 하족으로 삼은 계약이 저주의 원인이라면, 마지막 용일 가능성이 상당히 높은 저놈도 저주에 걸려 시름시름 앓다가 마력이 바닥나서 죽을지도 모른다. 그동안 여기로 찾아와서 이런저런 질문으로 무료함을 달래 준 놈이기도 하니, 그냥 내버려 둘 수 없다.

“방법은 있네.”

“그게 무엇입니까?”

놈에게서 조급함이 느껴졌다.

“단존계.”

“단존계?”

“결존계가 존재를 하나로 묶는다면, 단존계는 묶인 관계를 잘라내지.”

“단존계를 제게 알려 주십시오.”

“단존계가 무엇인지 안다면 그런 말을 할 수 없을 거야. 단존계는 계약을 맺은 당사자 중 하나가 죽어야 하니 말일세.”

“…….”

놈의 눈이 세차게 흔들렸다.

용오군이 진상을 파악하자마자 그 용을 찾아가서 죽인 이유도 바로 단존계 때문이었다. 계약을 파기하려면 인간을 전부 죽이거나 그 용을 죽여야 했다. 자연의 질서를 파괴할 수 없었던 용오군은 결국 그 용을 죽이기로 결정을 내렸고, 실행에 옮겼다. 그럼에도 결존계의 영향력은 작지 않아서 뛰어난 인간 마법사가 연이어 출현하고 말았다.

무열군주는 놈에게 단존계를 자세히 알려 주었다. 결존계와 상극인 마법진이어서 결존계를 알면 자연스럽게 단존계도 이해할 수 있는 구조였다. 단존계는 평범한 죽음이 아니었다. 단존계 자체는 죽음 이후의 부활까지 포함하고 있었다.

“죽었다가 살아날 수 있다는 말입니까?”

“당대의 용오군이 힘을 합친다면.”

그 용을 죽인 당시의 용오군은 단존계의 실행에 만장일치로 동의했으나 부활에 대해서는 의견이 갈렸다. 다섯 중 하나가 한사코 반대 의사를 드러냈고, 결국 그 용은 시기를 놓쳐 죽고 말았다.

“……용오군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면요?”

“죽음뿐이겠지.”

놈은 축 늘어진 어깨로 용옥을 빠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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