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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 남아 우르릉 울음을 토해 내는 방염산 분화구를 내려다보던 무열군주는 놈의 입장에 서서 놈의 문제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육체를 가졌을 때, 나약한데도 오만한 인간을 벌레 취급했었다. 인간의 운명에 이토록 관심을 가질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상황이 달라지면 생각도 바뀌는 것일까?
용족에 합당한 후손이 없다면, 적당한 양자를 들여서라도 명맥을 이어야 하지 않을까? 적통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방계 쪽을 훑어서라도 후사를 잇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터.
무열군주는 놈이 죽지 않고도 단존계를 펼칠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해 그가 지닌 지식, 경험, 다른 용의 기억을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실마리를 찾기 전까지는 쉴 생각이 없었다. 절대적 시간의 흐름을 벗어난 용옥 안에서 생각할 시간은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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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웅’에 대한 기사가 수청보에 실렸다.
사람들은 어둠이 깔린 밤에 나타나 약자를 도와주는 정체불명의 인물을 흑웅이라 불렀는데, 흑웅의 정체를 놓고 제각기 다른 해석이 나왔다.
경비대의 능력 부족을 꼬집기 위해 실력 있는 용병이 나섰다는 주장은 당가가 운영하는 용병단 당용파에서 흘러나왔다. 반면에 흑웅 또한 범법자에 불과하다는 이야기는 경비대장이 수청보의 기자가 던진 질문에 대한 답이었다. 마둔수탑의 마법사가 흑웅이라는 소문도 수청보의 기사 끝자락을 장식했다.
“신문, 보셨습니까?”
류근철이 수청보를 탁자에 내려놓았다.
“아니.”
단태는 두툼한 고기를 입에 넣고 오물거렸다.
“흑웅이라는 자가 밤마다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돕는 모양입니다. 얼마나 신출귀몰한지 흑웅에게 당한 놈들은 많은데, 얼굴을 제대로 본 사람은 하나도 없답니다.”
“그래?”
단태는 마지막 고기를 입에 넣었다. 아쉬웠다. 신선한 소고기를 두툼하게 잘라 적절하게 익힌 이 요리는 기가 막히게 맛있었다. ‘풍육적’이라 불리는 이 요리 때문에 여관을 떠날 수가 없었다. 물론 소윤을 돌봐 주겠다는 여관 주인 때문이기도 했다. 당연히 소윤에게 필요한 돈은 단태가 부담하기로 했다.
입안에 남은 요리의 맛을 음미하던 단태는 눈길을 느낄 수 있었다. 류근철의 시선이었다. 그 뜻은 단태도 잘 알았다. 제자가 된 이유는 사부에게서 무언가 배우기 위해서가 아닌가.
단태는 사부를 위해서라면 뭐든 할 준비가 된 늙은 제자 앞으로 걸어갔다.
“따라와.”
“네, 사부님.”
류근철은 기다렸다는 듯 일어섰다.
단태는 우물이 있는 여관 뒤뜰로 걸어갔다. 조그만 뜰은 나무가 우거져 있어 주위의 소음으로부터 자유로운 곳이었다.
“잘 봐.”
단태는 두 발을 어깨 너비로 벌리고 몸의 중심을 아래로 낮추었다. 맹렬한 황소가 달려와 부딪혀도 흔들리지 않을 견고함이 자세에 묻어났다.
서서히 몸을 일으킨 단태는 부드럽게 몸을 움직였다. 팔을 펴고, 주먹을 뻗고, 한 걸음 내딛고, 왼쪽으로 방향을 바꾸고, 무릎을 올리고, 팔꿈치를 휘돌리고, 두 발을 동시에 띄워 공중으로 뛰고, 발을 들어 하늘을 찍었다.
한 차례 동작을 끝낸 단태는 몸을 돌려 입이 벌어진 류근철을 쳐다보았다.
“어때?”
“……한때 세상을 돌아다니며 이것저것 폭넓게 봤는데도, 사부님의 동작은 처음 보는 형식입니다. 자유로우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엄격한 원칙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럴 거야.”
단태는 아무리 경험이 많아도 용족의 무술이라고 할 수 있는 ‘용즉계’를 접할 순 없다고 생각했다.
“제가 무엇이라 불러야 하는지요?”
“쌍계.”
“쌍계…….”
류근철은 이름을 곱씹었다.
“기본 중의 기본이야. 그러니 시간 날 때마다 연습해.”
“……알겠습니다.”
류근철은 즉시 자세를 잡고 단태가 취한 동작을 흉내 냈다. 쉽지 않았다. 몸의 구조와 탄력이 획기적으로 달라진 단태가 보여 주기 위해 천천히 움직였다고 해도 류근철에겐 까마득히 먼 목표였던 것이다.
단태는 옆에서 류근철의 자세를 지켜보다가 잘못된 부분을 두어 군데 고쳐 주었다. 기합을 넣으며 몸을 움직이는 류근철을 보니, 가라앉은 기분이 훨씬 나아졌다.
무열군주의 말은 마음속에서 파문처럼 점점 더 크게 퍼져나갔다. 유천주와 설고, 무수한 거미 들의 관계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기에 단태는 마음이 복잡했다. 수면 성분이 있는 수초를 먹인 후에 안전하게, 조금은 더러운 방법으로 땅 위로 데리고 가서 조그만 마을 입구에, 적당한 돈과 함께 두고 온 석현담은 두 번 다시 보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와 함께 있으면…… 왠지 모르게 결존계의 영향이 더 커질 것만 같았다.
란조가 날아와 어깨에 앉았다. 통통한 벌레를 먹고 싶다면서 날아갔다가 이제 돌아온 것이다.
단태는 란조의 부드러운 깃털을 손가락으로 쓰다듬었다. 결존계니 뭐니 다 잊고 싶었다.
그때, 계두철이 여관 뒷문으로 달려왔다.
“손님이 선생님을 찾아왔어요.”
“손님?”
“네.”
“알았어.”
학자나 관리보다는 용병이 되고 싶어하는 계두철은 류근철을 우러러봤고, 같은 이유로 단태를 숭배했다. 사부님이라 부르다가 류근철에게 한 대 맞은 후에는 선생님이라는 호칭으로 후퇴했지만,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란조를 어깨에 얹은 채 여관으로 가보니, 석현담이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어떻게……?”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아마 믿기 어려울 겁니다. 일단, 앉으시지요.”
“……그러죠.”
단태는 구석진 탁자로 가서 석현담 맞은편에 앉아서, 석현담이 들려 주는 이야기에 집중했다.
“당신이 누군지 저는 압니다.”
석현담이 속삭였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요.”
“단태.”
“…….”
단태는 할 말을 잃었다.
“당신이 어떻게 내 비밀을 알아냈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몰랐는데, 이제야 알 것 같습니다. 오늘 아침에 머릿속에 내 것이 아닌 무언가가 불쑥 떠올랐습니다. 너무나 생생해서 꿈이 아니라고 확신했는데, 희미한 그 기억을 물고 늘어지니 답이 나오더군요. 그 기억이 없었다면 여기로 찾아올 수도 없었겠지요. 모든 것을 알지는 못합니다. 그저 당신이 평범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압니다.”
“……무엇을 원합니까?”
단태는 눈앞의 사내를 죽여야 할지, 더 두고 봐야 할지 가늠하고 있었다.
“당신은 내 은인입니다. 내 생명을 구한 사람이며, 내 삶에 기회를 준 분입니다. 혼자 마을 입구에서 깨어났을 때, 무척 당황했고 또한 실망했습니다. 은인을 위해 최소한의 예의도 다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다행히 당신의 기억 중 일부가 내게로 흘러왔고, 그 덕분에 난 은인을 다시 만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전 왜 당신의 기억이 내 안에 있는지 모릅니다. 굳이 알아야 할 이유가 없다면 알고 싶지도 않습니다. 그보다, 난 당신에게 내가 도움이 될 것을 알며, 또한 당신에게 도움이 되고 싶습니다. 그래서 이곳으로 찾아온 겁니다.”
그 말에 단태는 흥분을 가라앉힐 수 있었다. 맞는 말이었다. 누구보다, 어쩌면 아버지인 황명거사 석장명보다 저 사내를 잘 알고 있으리라. 결심을 손바닥 뒤집듯 바꾸는 사람과는 거리가 멀었다. 아버지를 위해 싫은 일을 평생 해 왔으니.
“일단, 미안하다는 말부터 해야겠습니다. 당신 삶에 멋대로 끼어든 나 때문에 무척 당황했을 테니까요. 지금 제가 그런 것처럼 말입니다.”
“맞습니다.”
두 사람은 서로를 보며 웃었다.
기묘한 동질감이 그 시선을 통하여 오갔다. 20년 가까이 나이 차가 나는데도 둘은 이미 가까운 친구가 되어 있었다. 누구에게도 보여 줄 수 없는 내면을, 비록 의도적인 결정은 아니었지만, 서로에게 공개한 셈이었다. 평생 친구로 지내도 불가능한 일이 두 사람에게 벌어진 것이다.
“고민 끝에 내린 결정입니다. 그러니 진지하게 들어주십시오.”
석현담이 말했다.
“……알겠습니다.”
왠지 모르게 불안한 단태.
“저를 책사로 받아 주십시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