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단태신곡-202화 (202/293)

<-- 202 회: 5-37 -->

어디서 들어 본 말이다. 그래, ‘책사’라는 단어를 ‘제자’로 바꾼다면.

“제가 평생 무엇을 했는지 당신은 잘 압니다. 난 그 일 자체를 싫어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습니다. 난 그 일을 하는 목적, 이유가 마음에 들지 않았을 뿐입니다. 다양한 정보를 수집하고, 거기서 의미 있는 무언가를 끄집어내는 과정에는 희열이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기적의 순간이 존재합니다. 남녀의 결합으로 아이가 태어나듯, 전혀 다른 종류의 정보가 결합하면 잠재력이 무한한 또 다른 정보로 변하기도 합니다. 아, 이런 비유, 죄송합니다. 아무튼, 전 가치 있는 무언가를 원합니다. 제 능력을 가치 있는 일에 쓰고 싶습니다.”

“……전 그리 가치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만.”

“흑웅.”

“…….”

단태는 손가락으로 주름진 이마를 긁었다. 대체 어디까지 알고 있을까? 결존계는 서로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 왜 잊고 있었을까?

“도시를 근본적으로 바꾸려면 좀 더 다양한 방식의 접근이 필요합니다. 그러니 저를 책사로 받아 주십시오.”

“……알겠습니다. 그러죠.”

단태는 석현담을 내칠 수가 없었다. 먼저 그는 비밀을 아는 사람이었다. 게다가 문과 무를 겸비했을 뿐 아니라, 품성마저 탁월한 사람이었다. 백율운현 같은, 어쩌면 그 여자보다 더 탁월한 정보 전문가가 제 발로 찾아온 셈이다.

무엇보다 석현담과 대화를 나누는 게 즐거웠다. 말로는 충분히 설명할 수 없는 비밀을 지나치게 많이 가진 단태는 이처럼 자유롭게, 편하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음을 한동안 잊고 지냈다. 그토록 존경했던 륜사와 명국영에게도 장벽을 느꼈기에 낯설면서도 너무나 친근한 석현담을 내치고 싶지 않았다.

“주군, 인사 받으십시오.”

석현담은 두 손을 모으고 허리를 굽혔다.

“……주군이라니요?”

“군신의 예는 엄격해야 마땅합니다. 이제, 주군은 제게 하대를 하셔야 합니다. 그게 마땅합니다.”

“…….”

하대? 이것 또한 익숙한 말이다.

단태는 자신도 모르게 뒷문 쪽을 쳐다봤고, 땀을 뻘뻘 흘리면서 안으로 들어서는 류근철을 발견했다. 류근철은 석현담을 보더니 바람처럼 달려와 단태 앞을 가로막았다.

“뭐야?”

눈을 부라리는 석현담.

때마침 내려오던 류근묵은 석현담을 보고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용금탄에 있을 때 사리분별이 정확한 석현담에게서 두어 번 도움을 받아 잘 알던 사이였다.

큰형 류근묵이 석현담을 알은척하자 류근철은 흥분을 가라앉히고 뒤로 물러섰다.

류근묵은 석현담이 부드럽게 웃으며 하는 말에 귀를 의심했다.

“이제부터 석현…… 그러니까 그 이름을 버리고 ‘일중’이라는 이름으로 살겠다는 말씀입니까?”

“전 저분의 책사입니다.”

석현담은 두 손을 들어 공손하게 단태를 가리켰다.

“…….”

류근묵은 할 말을 잃었다. 석현담이 누군지는 잘 알았다. 딱 여덟밖에 없는 천마 석장명이 바로 석현담의 아버지였다. 또한 석현담 자신도 매우 유능한 마법사이자, 여러 방면에 탁월한 실력자였다. 그런 인물이 백중이라는 수상쩍은 자의 책사를 자처하다니.

대체 저 사람의 정체는 무엇일까?

*고맙다

“호오, 일이 재미있어지는군.”

두툼한 보고서를 단숨에 독파해 버린 황제는 빙긋 웃었다. 규모가 클수록 다양한 문제가 터진다는 점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황제에게도 지금의 유타루체는 재앙과 골칫덩이를 한데 모은 도시 같았다. 3년 동안 잠잠한 유천주가 날뛰는 바람에 도시는 엉망진창일 터였다.

“폐하, 부르셨습니까?”

황명거사 석장명이 알현실로 들어섰다.

황제가 제국을 운영하며 백관을 만나는 궁궐 태정전 한쪽에 딸린 작은 알현실은 주로 황제가 부른 사람들이 찾아오는 공간이었다. ‘탐현방’이라 불리는 그 조그만 방에는 용이 새겨진 기다란 탁자와 그 탁자를 둘러싼 의자들이 놓여 있었다.

“유타루체 소식, 들었겠지?”

“그렇습니다.”

“천마들이 용혈로 내려온다는 소식을 듣고 유천주가 분노한 게 맞을까?”

“확실치 않습니다.”

황제를 위해, 황제에게 걱정을 끼치지 않으려고, 새까만 안색을 숨기기 위해 평생 처음으로 얼굴에 화장을 한 석장명은 터져 나오려는 기침을 참기 위해 긴 대답은 삼가고 있었다.

“맞아. 용이 그런 식으로 점잖게 복수한 경우는 무척 드물어, 아니 거의 없으니까. 유천주가 저주에 걸려 쇠약해지지 않았다면 유타루체가 절반은 잿더미가 되었을 거야. 수천 명, 아니 수만 명은 죽어야 정상이겠지. 이런 상황에서도 천마들은 포기하지 않겠지?”

“도시를 이끄는 반씨 일가도 원정대를 포기하지 못할 겁니다, 폐하.”

“아하, 그렇군.”

황제는 이해력이 빨랐고, 어릴 때부터 받은 교육 덕분에 통찰력까지 갖추고 있었다.

“생각해 보셨습니까?”

묵직한 질문이었다.

“좋은 계책이야. 위험을 감수해야 하지만. 한데, 부윤성이 천마들과 일을 꾸민다는 거, 확신할 수 있나? 천마 개인을 상대하는 건 어렵지 않아. 허나, 그 천마가 속한 마탑을 무너뜨리려면 대규모 군대를 동원해야 할 거야.”

“그간 부윤성과 비백포, 물항, 무청의 행적을 고려한다면 천마들을 의심하는 게 합리적이옵니다, 폐하.”

“자칫 잘못하면 내란이 터질 거야.”

황제는 총애하는 노마법사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화장을 해서라도 안색을 감추려는 충정에 마음이 아팠지만, 모르는 척하는 게 신하를 위한 일임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알고 있사옵니다.”

“제국의 운명을 건 도박이겠지.”

황제는 ‘나의 운명’을 건 도박이라고 속으로 생각했다.

“그렇사옵니다.”

“좋아. 해 보지. 한데, 한 가지 추가할 부분이 있어.”

“말씀하옵소서.”

“나를 향한 시선을 분산시켜야겠어.”

“무슨 말씀이시온지……?”

“기대해. 이번엔 그대도 놀랄 거야.”

황제는 장난기 그득한 어린 시절의 미소를 지었다.

@

단태는 통행증을 살폈다.

백중이라는 이름으로 발급된 통행증은 상아별로를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는 빳빳한 종이였다. 책사로 합류한 석현담은 단태 곁에서 단태가 직접 할 수 없거나, 하기 어려운 일을 도맡아 해결했다. 그는 기존 체계의 틈을 찔러 불가능한 일을 성사시키는 데 재능을 가진 사람이었다. 덕분에 단태는 유타루체로 돌아온 날 운 나쁜 놈에게 빼앗은 목증이 아니라, 전문가가 들여다봐도 위조 여부를 판단할 수 없는 진짜 목증을 가질 수 있었다. 모두 석현담이 애쓴 결과였다.

아침에 이 통행증을 주면서 석현담이 한 말이 생각났다.

“두려워도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주군. 시기를 놓치면 결코 할 수 없는 일을 해내려면 용기가 필요합니다. 이 통행증이 주군에게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석현담은 단태가 설희를 찾으려 하지만, 그 결과가 두려워 차일피일 미루고 있음을 알았던 것이다.

상아별로 입구가 보였다.

시기를 놓치면 할 수 없는 일이 있다는 말이 가슴을 찔렀다. 그동안 왜 설희를 적극적으로 찾지 않았는지 자책할 만큼 마음이 아팠다. 만약 설희를 도와줄 시기를 놓쳤다면…… 평생 자책하며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석현담이 구해 온 통행서로 상여별로 입구를 간단히 통과한 단태는 반가의 저택 앞으로 향했다. 크고 두꺼운 두 개의 기둥과 견고한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저택의 정문. 도시를 지배하는 가문이라는 자부심이 철철 흘러넘치는 건물이 정문 너머에 불쑥 솟아 있었다. 마음 같아서는 정문이고, 건물이고 무룡을 불러다가 쓸어버리고 싶었다.

창을 쥔 보초의 시선이 날카로웠다.

단태는 짐짓 모른 척하며 몸을 돌려 마차가 오가는 길을 건넜다. 사륜마차를 모는 마부 하나가 뒤를 힐끔거리며 걷느라 마차를 신경 쓰지 않은 단태를 향해 채찍을 휘둘렀다. 공기를 가르며 날아오는 채찍을 가볍게 쥔 단태는 놀란 마부를 향해 웃음을 머금어 보였다.

“고마워.”

단태가 살짝 당기자 마부는 손바닥이 찢어지는 고통을 참지 못하고 채찍을 놓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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