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단태신곡-203화 (203/293)

<-- 203 회: 5-38 -->

최근 몇 년 사이 상아별로에 우후죽순으로 생긴 가배(커피)점 중 하나로 들어서려는 단태를 누군가 불러 세웠다.

“거기, 멈춰!”

채찍을 돌돌 말아 손에 쥔 채로 구수하면서도 쓴 향기를 풍기는 가배점 문을 열었던 단태는 몸을 돌려 목소리가 들린 쪽을 쳐다보았다. 몸에 걸친 것만 대충 계산해도 수백 마전이나 되는 멋쟁이 젊은 남자가 쓰러진 마부 옆에 서서 단태를 노려보고 있었다.

단태는 반대쪽을 살폈다. 혹시 저 남자가 부른 사람은 따로 있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아니, 너. 채찍 쥐고 있는 너 말이야.”

남자는 손가락으로 정확히 단태를 지목했다.

그제야 단태는 남자 옆에서 신음을 흘리는 마부를 알아보았다. 채찍을 빼앗긴 그 거친 마부였다.

‘귀찮게 됐어.’

중요한 목적 때문에 온 게 아니었다면 가볍게 무시하고 자리를 떠났겠지만, 이번엔 그러고 싶지 않았다. 어떻게 용기를 내서 온 건데.

단태는 부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남자 앞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향수를 뿌렸는지 시원한 풀잎 향이 코로 스며들었다.

“무슨 일이죠?”

“너, 내 마부를 건드렸지?”

반말이 입에 붙은, 무례한 놈이 되물었다.

“무슨 말씀인지 전혀 모르겠는데요.”

능청스레 대답하는 단태의 귀로 구경꾼들의 대화가 들렸다. ‘반왕자’에게 걸렸으니 두세 군데 뼈가 부러지고 말 거라며 애석해하는 내용이었다.

눈앞의 저 사내는 근처에서 유명한 모양이었다. 사소한 잘못, 때로는 전혀 잘못하지 않았는데도 시비를 걸고, 꼬투리를 잡아 주먹을 휘두르거나 경호원을 통해 폭력을 행사한 것이다.

놈이 씨익 웃었다.

“모르겠다? 내 눈으로 똑똑히 봤는데도? 네가 마부에게서 채찍을 빼앗았잖아.”

“이거요?”

단태는 진실을 말해 봐야 이미 눈에 광기로 들어찬 놈을 납득시킬 수 없음을 알고 있었다.

그때, 도와주기는커녕 멀찌감치 물러나 구경이나 하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단태는 이 혈기왕성한 놈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도시를 지배하는 시장 반명의 아들이자, 계승자 반우현의 동생 반중치였다. 그만한 배경이 없다면 저 많은 사람들 앞에서 이토록 오만방자하게 굴지는 못하리라.

“너, 내가 누군지 모르지?”

소매를 걷어 올리며 반중치가 다가왔다.

사람들이 걱정하는 소리가 단태의 귀로 파고들었지만, 누구 하나 나서지 않았다.

“……제가 유타루체에 도착한 지 얼마 안 됩니다.”

단태는 저 건방진 자식을 박살 낼지, 아니면 등을 보이고 달아날지 고민하는 중이었다.

그 순간, 한 사람이 나섰다.

“중치 도련님.”

깊고 시원한 강물 느낌을 자아내는 목소리, 여자였다.

반중치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슬슬 흥미로워지는 장난을 가로막은 방해자의 출현에 기분이 나쁜 것이다.

“또 너냐?”

“공녀님께서 가만 계시지 않을 겁니다.”

“누나에게 달려가서 알리시겠다? 그럴 수 있을까?”

반중치는 먹잇감을 바꿨다. 여자라도 봐주지 않을 기세로, 끼어든 상대 앞으로 다가간 것이다.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고 오히려 평온한 표정을 유지한 채 눈을 감아 버리는 여자 앞을 단태가 가로막았다.

“하하, 공자님이신 줄 상상도 못 했습니다. 다 제 잘못입니다. 공자님 마차란 걸 알면 제가 어떻게 감히 공자님의 마부가 휘두른 채찍을 잡아당겼겠습니까? 다 제 잘못입니다. 공자님은 아무 잘못도 없습니다. 길을 빨리 건너야 하는데, 느릿느릿 구경하며 건넌 제 잘못이지요.”

단태가 너스레를 떨며 빌었지만 반중치의 눈빛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반중치를 막은 건, 이어진 여자의 말이었다.

“저기 공녀님께서 나오십니다.”

그 말에 화들짝 놀란 반중치는 고개를 홱 돌려 이제 막 정문 밖으로 나온 반우현을 확인했다. 누나에게 들켰다가는 끌려가서 정신적, 물리적 고통에 시달릴 게 뻔한 일, 그는 마부석으로 올라가 직접 마차를 몰아 시야에서 사라졌다.

구경꾼들을 발견한 반우현이 길을 건너왔다.

“무슨 일이야?”

“공자님께서…….

“또?”

“이 사람에게 시비를 거셨습니다.”

위연미는 단태를 가리켰다.

이마에 손을 올리고 눈을 지그시 감은 채 한숨을 내쉰 반우현은 하늘을 올려다본 후, 단태 앞으로 와서 섰다.

“동생의 무례를 용서하세요.”

“……이렇게 큰 도시는 처음이라 천천히 길을 건넌 제게도 잘못은 있습니다.”

단태는 위연미에게서 눈을 떼기 어려웠다. 위연미가 여기 있다면, 설희도 있으리라.

“그렇게 생각한다니, 고마워요. 유타루체의 첫인상이 나쁘지 않기를 바랍니다.”

가볍게 고개를 숙인 반우현은 위연미와 함께 구경꾼 쪽으로 걸어갔고, 일부 사람들이 반가워서 내민 손을 귀찮아하지 않고 잡아 주기까지 했다.

단태는 그 모습을 가만히 서서 지켜보았다. 의외였다. 계승자는 다음 대의 시장 자리에 오르는 사람. 충분히 거만할 수 있는 자리가 아닌가? 사람들의 반응을 보니, 반우현이라는 사람에 대한 평가는 뒤로 미뤄야 할 것 같았다.

단태는 거리를 두고 반우현, 위연미를 따라갔다. 시야에 보이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반우현이 뿌린 독특한 향수 냄새를 따라가면 그만이니까. 유유자적 구경 온 사람처럼 주위를 두리번거리면서, 단태는 생각에 잠겼다.

위연미는 왜 반우현 옆에 있을까?

노예라기보다는…… 하녀에 가까운 분위기였다. 비싸진 않지만 단정한 옷차림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러면 설희는 어디 있을까?

심장이 쿵쿵 뛰고, 열이 확 올랐다. 당장 달려가서 설희가 어디 있는지 알아내고 싶었다. 멱살을 쥐고 흔들어서라도. 물론 머리는 그런 일을 저지르면 뒤따를 결과를 명확하고 확실히 알려 주고 있었다.

좋은 생각이 떠오른 순간, 반우현이 앞을 가로막았다. 반우현은 단태의 미행을 알아차린 것이다.

“왜 우리를 따라오는 거죠?”

단태는 반우현이 서 있는 자세, 몸의 유연함, 팔과 다리에서 느껴지는 기세에 감탄했다. 한눈에 봐도 류근철보다 강한 여자였다. 도시의 계승자에게서 이런 분위기를 느낄 줄이야.

“……저는 설희의 사촌 오빠입니다.”

“뭐라구요?”

화들짝 놀란 반우현은 필요 이상으로 크게 반응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대략 4년 전쯤, 계승자께서 노예 신세로 전락한 제 사촌 동생을 구입하셨더군요.”

“…….”

반우현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전 설희를 데리러 왔습니다. 물론, 값을 치르겠습니다. 열 배의 돈을 드릴 수도 있습니다. 사실, 계승자님을 찾아오기 전에 설희처럼 노예로 팔린 이모님을 찾았는데, 3년 전에 돌아가셨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제가 너무 늦게 찾아오지 않았기를 바랍니다. 설희는 어디 있습니까?”

단태는 최대한 감정을 억눌러 가며 천천히, 또박또박 말했다.

“설희, 처음 듣는 이름입니다만.”

반우현이 답했다.

“그렇습니까?”

단태는 반우현의 눈을 들여다봤다. 흔들림이 없었다. 특별문서고의 장부를 보지 않았다면, 바로 앞에 위연미가 서 있지 않았다면, 저 여자의 말을 믿었을지도 모른다.

“제 기억엔 없어요. 무언가 착오가 생긴 모양입니다.”

“한 번만 더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고 대답은 천천히 하십시오. 훗날, 오늘 이 순간을 뼈저리게 후회할지도 모르니까요.”

단태는 반우현이 다시 모른다고 잡아뗀다면 반씨 성을 가진 자가 더 이상 유타루체의 시장 자리에 오르지 못하도록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생각이었다.

“예의가 없군요, 당신은.”

싸늘한 말투.

그 순간, 단태는 오른손을 뻗어 왼쪽 팔뚝을 꽉 잡았다. 피부가 터지고 거기서 바람이 피와 함께 흘러나왔던 것이다. 안에서 들끓던 울분 때문이었다. 반우현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최대한 자연스럽게 행동했는데, 저 여자가 어떻게 생각할지는 미지수였다.

“……잘 알겠습니다.”

단태는 운이 좋아서 시장 자리에 오른다고 해도 오랫동안 그 위치를 유지할 수 없을 계승자를 향해 살짝 고개를 숙인 다음, 천천히 돌아섰다. 저 뻔뻔한 낯짝을 쳐다보면서 솟구쳐 오르는 분노를 억누르기 어려웠다. 그러나 반우현은 단태를 그냥 놓아줄 생각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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