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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동안 설희를 찾기 위해 하인, 하녀 들이 모이는 곳을 뒤졌지만 실마리조차 잡지 못했는데.
“배제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황궁으로 가야겠군.”
단태는 마음이 급했다.
“제가 믿을 만한 사람들을 풀었습니다.”
“그래?”
“확인이 된 후에 이곳을 떠나셔도 됩니다, 주군.”
“고맙다.”
진심이었다.
석현담은 경험 부족이라는 단태의 약점을 메우고도 남았다. 첩보 업무를 하면서 안 해 본 게 없는 데다 사람의 심리를 누구보다도 잘 알기에 단태의 가려운 부분을 제대로 긁어 주었다.
“주군의 일은 저의 일입니다.”
“그래도 고마워.”
단태는 방으로 올라갔다. 류근철은 여관 뒤뜰에서 땀을 흘리고 있었다. 단태가 알려 준 동작을 습득하기 위해서였다. 소윤이 여관 주인과 같은 방을 쓰기로 한 터라, 단태는 조용한 방에 홀로 앉아 있었다.
몸 곳곳에서 압력이 느껴졌다. 옆구리, 팔뚝, 어깨 그리고 등까지. 아까 시장에서도 몇 번 피부가 터지며 바람이 흘러나올 뻔했다. 가까스로 위기를 넘겼지만 점점 내부의 압력은 증가하고 있었다. 대책을 세워야 한다. 금룡어 눈알만으로는 부족하다.
≪지완수≫를 꺼냈다.
여기에 답이 있다고 유천주가 말했건만.
창으로 란조가 날아들었다. 단태의 무릎에 앉아 조그만 눈으로 위를 올려다보는 모습이 귀여웠다. 손을 뻗어 란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란조를 보면 울적한 기분이 가라앉는다.
그래, 방법은 찾으면 된다.
순간,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거기 가면 무언가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고마워, 란조.”
란조는 아침 공기처럼 상쾌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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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우현은 할 말을 잃었다. 몇 번이나 찬찬히 읽어 봐도 믿기 어려운 내용이었다. 위연미의 요청이 아니었다면 그 아이를 황궁으로 데려가지 않았을 것이다. 위연미의 요청이 없었다면 그 아이를 황궁에 두고 유타루체로 내려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대체 어떻게 그 아이는 황제의 눈에 들었을까?
황제는 고위 관리, 귀족 들이 모인 공식 연회에 궁녀를 데리고 나타났다. 황제가 직접 고른 화사한 연의는 냉기 마법이 걸린 푸르스름한 비단 재질로 황금색으로 용이 수놓여 있었다. 궁녀였다가 단숨에 황제의 여인으로 승격된 설희는 서툴렀지만 그 연의를 입고 수백 쌍의 눈이 쳐다보는 연회에서 순수하면서도 부드러운 매력을 발산했다.
“그 아이, 네 노예가 아니냐?”
딸이 오기 전에 이미 그 보고서를 세 번이나 반복하여 읽었던 반명이 물었다.
“……네, 아버지.”
“그 사실이 알려지면 우리 가문은 무사하지 못할 게다.”
“알아요.”
반우현은 답답하기 짝이 없었다. 노예라는 사실을 숨기고 황궁으로 데려간 것만으로도 황궁의 법도를 무너뜨렸다는 비난을 받을 텐데, 황제가 처음으로 선택한 여자가 노예라는 진실이 알려지면 그 후폭풍은 감당할 수 없으리라.
숨겨야 한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제가 용금탄으로 가야겠어요.”
“그럴 필요 없다. 폐하께서 곧 이리로 오실 테니까. 그 아이도 함께. 연락을 받았다. 극천황룡이 떠올랐다니, 며칠 안에 도착하실 게다.”
“…….”
망가진 도시의 질서를 세우는 것과 원정대 관련 논의만으로도 머리가 깨질 듯한 반우현은 집게손가락으로 아랫입술을 문질렀다. 초조해서 참을 수가 없었다.
아버지가 다가와 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살다 보면 위기가 연이어 다가올 때도 있다. 더없이 좋은 기회가 파도처럼 밀려온다고 생각하려무나.”
“네, 아버지.”
따스한 아버지의 손길 덕에 마음이 가라앉았다.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 노예라는 사실이 알려지면 살아남을 수 없는 그 아이도 진실이 밝혀지길 원하진 않을 것이다. 아버지 말씀처럼 오히려 좋은 기회일지도 몰랐다. 그 아이를 통해 황제를 움직일 수도 있을 테니까.
따지고 보면 그 아이의 약점을 쥔 셈이 아닌가.
반우현은 누구와 싸워도 이길 수 있는 전설적인 무기 하나를 손에 쥔 기분이었다. 그 아이에 대한 황제의 마음을 이용한다면 오히려 유타루체에서의 위치를 공고히 다질 수 있을 뿐 아니라, 더 넓은 세계로의 확장도 가능하리라.
‘얼마나 달라졌을까?’
반우현은 한없이 순수했던 설희를 떠올렸다. 황제의 여자가 되었으니, 대우부터 달라져야 할 것이다.
*불가능합니다
성문은 쾅 닫혔다.
날이 저물 무렵 성문이 닫히면 도시는 외부와 단절된다. 밤늦도록 흥청망청 술을 마시며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 도시의 거리와 달리, 성벽 바깥은 어둠이 내리기 전 잠이라도 편히 잘 수 있는 근처 마을의 여관을 찾아 서둘러 떠나는 사람들 때문에 금세 텅 비어 버린다.
오래지 않아 단태는 혼자 남았다. 용혈로 데리고 갈 백율청현은 이미 숲에 숨겨 놓았다.
성벽 위로 밝힌 수십 개의 횃불은 어둠에 둥실 떠오른 빛의 정령 같았다. 하나의 정령 곁에는 두 명의 보초가 밀려드는 피곤을 참으며 하품을 했다. 둘 중 고참은 창을 성벽 난간에 세워 두고는 등을 기대고 앉아 아예 코를 골기도 했다.
도개교는 끌어당겨져 악어가 돌아다니는 해자가 드러나 있었다. 단태는 운하를 닮은 해자를 내려다보았다. 잔잔한 수면 위로 고개를 내민 악어 몇 마리가 단태를 보자마자 스르륵 물속으로 달아났다. 탄면도 단태가 내뿜는 미세한 기운을 완전히 가리지는 못했다.
별이 총총 나타났다. 유성 하나가 꼬리를 남기며 하늘을 가로질렀고, 그 아래 검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연기 수십 개가 공중으로 배배 꼬며 올라가고 있었다. 마을 몇 개가 그쪽 방향에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몸을 돌린 단태는 아레마고의 문을 올려다봤다. 크고 웅장한 문은 푸른색이었으나 어둠에 물들어 검은색에 가까웠다. 손을 들어 만진 문은 대리석처럼 매끈했다. 1,500년 가까이 된 문인데도 바로 올해 건설한 것처럼 긁힌 자국 하나 없었다.
유타루체가 조그만 촌락이었을 때, 사람들이 이곳으로 모인 이유는 저 문 때문이었다. 대마법사가 직접 만드는 문을 보기 위해 몰려든 사람들 중 일부가 늪지대에 정착했고, 그 거주지가 점점 커지면서 물의 도시가 생긴 것이다.
시간이라는 압도적인 상대 앞에서도 밀리지 않고 형태를 유지하는 기적 같은 문은 도시의 상징이자, 유타루체에 사는 사람들의 자부심의 근원이었다. 만약 저 문이 붕괴된다면 시청 중앙탑의 와해와는 비교할 수 없는 충격으로 도시의 존재 자체가 흔들릴지도 몰랐다.
용족 특유의 사악한 장난기가 발동한 단태는 저 완벽한 문을 무너뜨리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저 사람들의 반응이 궁금했던 것이다. 무룡이 그 거대한 몸통으로 밀어붙여도 아레마고의 문은 저 자리에 남아 있을까? 물론 실행할 마음은 전혀 없었다.
한참 문을 살피던 단태는 들고 있던 가방에 손을 집어넣어 책 한 권을 꺼냈다. ≪지완수≫였다. 그 책에 따르면 이 문은 대마법사 아레마고가 물의 정령왕 수탄왕령의 부탁을 받고 세웠다. 문을 만든 이유나, 목적에 대해서는 나와 있지 않았다.
이곳에 온 이유는 유천주의 충고 때문이었다. 꼬박꼬박 금룡어 눈알을 먹어치우는데도 몸 내부의 압력, 피부를 뚫고 나오려는 바람의 압박은 점점 강해지고 있었다. 아까 도시의 계승자 앞에서는 피부를 찢은 바람이 옷까지 갈기갈기 터트리며 윙윙 소리 내어 불 뻔했다.
“유천주는 분명 이 책이 내게 도움이 될 거라고 했는데.”
혹시나 하는 마음에 ≪지완수≫를 아레마고의 문에 갖다 대고 비볐다. 그러나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머릿속에 들어 있는 책 내용을 시간 날 때마다 세세한 부분까지 살핀 단태는 ≪지완수≫ 덕분에 마법을 보는 시야는 넓어졌으나 풍혈지체의 부작용을 없애거나 억누르는 단서는 찾지 못했다. 비밀이 숨겨져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로 여기저기 들쑤셨지만 헛수고였다.
답답해서 아레마고의 문을 찾아왔건만.
“역시 닫혔군.”
귀에 익은 목소리에 단태는 이미 상대가 누군지 알았지만 미친 듯 춤추는 심장의 박동을 멈출 수 없었다. 아니, 알기 때문에 흥분이 가라앉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