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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완수≫를 가방에 넣으며 몸을 돌린 단태는 3년 만에 족히 10년은 늙은 사람을 볼 수 있었다.
명국영이었다.
“혹시 그쪽도 여유를 부리다가 늦은 건가요?”
명국영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그런 셈입니다.”
단태는 이런 식으로 명국영을 만나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명국영은 아레마고의 문을 통과하여 해자가 내려다보는 곳에 이르러 몸을 돌렸다.
“소리쳐도 도개교가 내려오진 않겠지요. 생각만 해도 군침이 흐를 만큼 술과 고기가 훌륭한 여관을 아는데, 같이 가겠습니까?”
“그러죠.”
명국영과 단태가 아레마고의 문 아래를 통과하는 순간, 문이 울음을 터트렸다. 땅도 흔들렸다. 그 진동은 성벽 위에서 졸던 보초를 깨우고 그 너머까지 퍼져나갔다.
명국영은 아레마고의 문을 올려다봤고, 단태는 가방 안에서 살아 있는 짐승처럼 몸부림치는 ≪지완수≫를 느꼈다. 두 사람은 곧 서로를 쳐다봤다.
“……진동, 느꼈습니까?”
단태가 물었다.
“전설이 사실이었군요. 당신이 아레마고의 후계자인가요?”
명국영은 자신 때문에 문이 진동했다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 선수를 쳤다.
“……제가요?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사실을 종합하고 면밀한 분석을 거친 뒤에야 결론을 내리는 신중한 명국영이 대뜸 단언을 하자, 단태는 왠지 모르게 꺼림칙했다.
“아무튼, 먼저 여기를 벗어나야겠군요. 괜한 오해를 살 수도 있을 테니까요.”
명국영은 문을 통과하여 어둠으로 걸었고, 그 말이 옳다고 여긴 단태가 뒤따랐다. 철컥철컥 쇠사슬 소리가 나며 도개교가 내려오고 있었던 것이다. 곧 횃불을 앞세운 한 무리의 병사들이 다리를 건너 이쪽으로 넘어올 터였다.
큰길에서 벗어난 두 사람은 말없이 달빛이 밝히는 오솔길로 접어들었다. 오솔길은 커다란 숲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병사들에게 들킬 염려에서 벗어난 명국영이 입을 열었다.
“저는 허약하기 짝이 없는 글쟁입니다. 아레마고의 문이 저로 인해 진동할 리는 없지요.”
이번에도 명국영은 지나치게 앞서 나갔다. 마치 진실을 숨겨야 하는 사람처럼.
“선생께서는 저 때문에 그 문이 흔들렸다고 생각하십니까?”
단태는 명국영의 말에서 의도를 감지했다.
“그게 논리적 추론의 결과니까요.”
“논리적으로 따진다면 무명소졸에 지나지 않는 저보다 그 유명한 용태학 수석 졸업자시자 용문거 수석 합격자이신 명국영 선생으로 인해 아레마고의 문이 침묵을 깨뜨렸다고 보는 게 옳지 않을까요?”
단태는 ≪지완수≫를 들고 아래를 왔다 갔다 해도 반응이 없던 아레마고의 문이 명국영으로 인해 깨어났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
명국영은 걸음을 멈추었다. 서너 걸음 걸었던 단태는 멈춰 돌아섰다. 두 사람은 오솔길 위에 서서 서로를 쳐다보았다. 숲을 빠져나온 서늘한 바람이 두 사람의 옷자락과 머리카락을 흔들며 지나갔다.
“명 선생의 얼굴을 모르는 사람은 드뭅니다.”
차분한 목소리.
“그 희미한 빛 아래서 단번에 절 알아보다니, 창공에 날아올라 쥐새끼를 사냥하는 매의 눈을 가지셨군요.”
밀리지 않는 명국영.
여전히 예리한 지성을 드러내는 명국영 앞에서 탄면을 벗어던지고 자신이 누구인지 알리고 싶은 충동에 휩싸인 단태는 망설이면서 ‘생각’을 했다. 정체를 드러낼지, 아니면 숨겨야 할지. 눈앞의 사내를 전적으로 신뢰할 수 있을지, 신뢰가 어렵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지.
침묵 가운데 논리정연한 생각의 결론이 형체를 갖추었다. 단태는 이제야 도시로 들어오자마자 명국영을 만나지 않은 이유를 깨달았다. 마음을 먹으면 어떻게든 만들 수 있는 명국영과의 대면을 차일피일 미룬 이유를 완전히 알 수 있었다.
저 날카로운 통찰력 때문이었다.
단편적인 사실로부터 전체를 읽어 내는 지혜 때문이었다.
몇 마디 대화만으로 단태가 과거의 그 단태가 아님을, 인간에서 멀어져 용족에 가까워졌음을, 엄마의 죽음조차도 슬퍼하지 않는 냉혈한이 되었음을, 마음에 들어 했던 그 제자가 더 이상 아니라는 사실을 스승이 알아차리는 게 두려웠다. 그래서 피한 것이다.
“제 이름을 알고 있으니, 저도 귀하의 성명을 듣고 싶습니다만.”
명국영이 말했다.
“……백중입니다.”
그 대답을 들은 명국영은 흠칫 몸을 떨었다.
연쇄살인마를 힘으로 쫓아 버렸던 그 정체불명의 사내의 뒤를 쫓아 동쪽 광장까지 뒤졌던 철무에게서 들은 이름이었다. 유타루체에 백중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내가 한 명일 리는 없지만, 속을 알기 어려운 표정과 자신에게 전혀 밀리지 않는 화술을 고려한다면 그 백중일 가능성은 한없이 높아진다.
설마 저 남자 때문에 아레마고의 문이 흔들렸을까?
그렇다면 아레마고의 후계자가 한 사람이 아니라는 뜻인가?
단태 앞에 서 있는 명국영은 점점 커지는 위압감을 느꼈다. 숲이 만들어 낸 짙은 그늘과 주위를 덮는 어둠 때문일지도 모르나, 명국영은 자연 현상에 불과한 ‘빛의 부재’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이 압력의 원인은 저 남자였다. 말실수 한 번에 사람을 죽이는 사령마 만표 앞에서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압박의 질이 달랐다.
평범한 듯 보이나 서쪽이 동쪽에서 먼 것처럼 평범에서 멀리 떨어진 저 남자의 정체는 무엇일까?
답이 나왔다.
다리가 후들거려 손으로 꽉 잡아야 했다. 사령마 만표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죽음의 마법사는 도시 어딘가에 유천주가 있을 거라고 했다. 용투기를 숨기는 법을 알아낸 유천주는 노인일 수도 있고, 젊은 여자일 수도 있다고 만표는 덧붙였다.
저 남자가 유천주일까?
원정대 때문에 시청 중앙탑을 무너뜨린 위대한 존재일까?
생각할수록 이 빈약한 추론이 옳다는 직감이 커졌다. 사령마 만표 앞에서도 흘리지 않았던 땀이 옷을 흠뻑 적셨다. 수룡 유천주라면 아레마고의 문을 그토록 강렬하게 흔들 수도 있으리라. 이제 어떤 처분을 받을까? 이 자리에서 죽을까?
순간, 지금 상황과 유사한 기억이 흐릿하게 떠올랐다. 커다랗고 위압적인 주홍색 눈앞에 서서 벌벌 떨었는데. 꿈이라고 생각했건만,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던 것일까?
다리가 풀린 명국영은 무릎을 꿇었다.
“위대한 존재를 뵙습니다.”
“…….”
단태는 깜짝 놀랐다.
“저를 죽인다고 해도 원정대는 용혈로 출발할 것입니다. 당신이 직접 모습을 드러내어 유타루체에 모인 천마들을 짓밟지 않는다면, 아니, 용족을 덮친 저주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면, 원정대는 저주로 점점 약해지는 마지막 용을 노릴 것입니다.”
처음엔 그 뜻을 이해하지 못했던 단태는 명국영이 가르친 사고방식을 이용하여 명국영이 한 말에서 단서를 포착했다. 세간에 알려진 바와 달리, 도시의 수뇌부는 원정대를 보내기로 결정한 모양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 명국영은 단태를 ‘유천주’로 착각하고 있었다.
그 착각, 아직은 깨고 싶지 않았다. 유천주 행세를 한다면, 명국영이 품고 있는 생각, 진심을 끌어낼 수 있으리라.
“인간의 탐욕은 끝을 모르는군.”
“……탐욕이 아닙니다.”
천천히 일어선 명국영은 용기를 냈다. 이왕 죽는다면 속 시원히 말하고 죽을 생각이었다.
“동족까지 노예로 삼아 거래를 하면서도 탐욕이 아니다?”
“유타루체는 면적에 비해 인구가 많은 도시입니다. 사람들은 몰려들고 있으나, 도시의 성장은 멈춰 있습니다. 그 때문에 제살 깎아먹기에 불과한 노예 매매가 성행하고 있습니다. 만약 서쪽 방책 너머의 공간이 안전하다면 유타루체는 성장할 수 있으며, 도시의 규모가 확대된다면 노예 매매에 의지하지 않아도 충분히 부를 획득할 수 있습니다.”
“나 때문에 노예 매매가 이루어진다는 건가?”
“물론 인간의 잘못이 큽니다만, 위대한 존재로 인해 유타루체의 발전이 멈춘 것은 사실입니다.”
“인간 도시의 발전을 위해서 용족은 호수를 떠나라는 말인가?”
“……그건 아닙니다.”
명국영은 당황했다.
“그대는 인간족을 위해서라면 용족은 물론 앞을 가로막는 모든 것을 파괴할 수 있다고 말하는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