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7 회: 5-42 -->
“……그렇지 않습니다.”
명국영은 속이 뜨끔했다.
“만운주께서 자비롭게 인간족으로 하여금 호수의 동쪽에 자리 잡도록 허락하셨다. 이후, 용족은 조금씩 인간족이 차지한 영역을 늘려 주었지만 인간은 거기에 만족하지 않았지. 시간이 흐르면 더 많은 땅, 더 많은 공간을 원하는 게 인간이 아니었던가?”
“…….”
명국영은 입을 다물었다. 사실이어서 반론의 여지가 없었다.
“인간은 호수 전체를 차지하고도 만족하지 못하겠지.”
“……부정할 수 없습니다.”
“솔직한 인간이군.”
“제 생각을 말씀드려도 될까요?”
“얼마든지.”
단태는 자세한 설명을 기다렸다. 인간과 용의 공존에 대한 획기적인 대책이 명국영의 입에서 흘러나오기를 고대하면서.
“그래도 승자는 인간일 겁니다.”
“…….”
단태는 귀를 의심했다.
“전 태어날 때부터 호기심이 많았던 인간입니다. 세상을 알고픈, 진실을 이해하고픈 마음이 유달리 컸습니다. 손에서 책을 놓지 않고, 주위를 관찰하면서 오랜 시간을 보냈는데, 그 과정을 통해 몇 가지 알아낸 지혜가 제겐 있습니다. 그중 하나가 ‘변화’입니다. 세상은, 자연은 파악하기 어려운 의도를 가지고 변화를 일궈 냅니다. 영조화는 유달리 아름답고 향이 좋으며 벌레에도 강한 꽃이지만, 갑작스러운 전염병으로 멸종되었습니다. 전 마지막까지 영조화를 살리기 위해 애를 쓴 사람으로부터 귀중한 지혜를 얻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연의 섭리를 거스를 수는 없지.’ 용족의 저주는…… 자연이 계획하고 실행한 결과입니다. 영조화가 사라진 것처럼 용족도 사라지게 될 겁니다. 영조화 자리를 구궁화가 차지한 것처럼, 용족의 자리는 인간에게 맡겨질 겁니다.”
“오만하군.”
단태는 진심을 담아서 말했다. 그는 인간이자 용이지만, 이 순간만큼은 용에 가까웠다.
“위대한 존재 앞에 서 있는 저는 허약하기 짝이 없는 인간이지만, 유타루체는…… 제국은…… 위대한 존재보다 강합니다. 저주에 걸려 소멸하지는 않을 테니까요. 약육강식의 원리에 따라 인간이 호수를, 그 아래의 용혈까지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 비록 제가 눈으로 그 순간을 보지 못한다고 해도 말입니다.”
목숨을 건 주장이었다.
“약육강식이라, 스스로 짐승이 되겠다는 뜻인가? 그렇다면 노예 매매를 비난할 수도 없겠군. 강자가 약자를 노예로 삼는 게 문제가 될 수는 없으니 말이야.”
“…….”
명국영은 자신이 펼친 논리의 모순 앞에 말문이 막혔다. 이 모순을 오래전에 발견했고, 고민해 왔는데도 해결하지 못한 근본적인 문제였다. 존재 자체에 포함된 은밀한 균열 같은 것이었다.
“인간과 용의 공존은 불가능한가?”
그 질문에 명국영은 경악했다. 용이 던질 질문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저주로 인해 인간과의 공존을 논할 만큼이나 유천주가 약해졌다는 뜻이다.
이 위기를 모면하려면 가능하다고 설득해야 한다. 두루뭉술한 근거를 대어 저 용을 납득시켜야 한다. 그러나 명국영은 얄팍한 수로, 거짓으로 용을 속이고 싶지는 않았다. 진지한 질문이니, 진지한 대답을 들려줘야 인간으로서의 자존심을 지킬 수 있으리라.
“불가능합니다.”
“지나치게 솔직하군.”
“이제 마음대로 하십시오.”
명국영은 눈을 감았다. 손으로 잡힐 듯 죽음이 다가와 있었다. 추잡한 모습을 보이며 삶을 구걸하고 싶지는 않았다.
죽음은 다가오지 않았다.
한참 만에 눈을 뜬 명국영은 오솔길 너머 울창한 숲 위로 날아오르는 거대한 몸체를 볼 수 있었다. 날갯짓에 밀려온 바람이 명국영을 덮쳤다. 별을 가리며 날아오른 유천주는 하늘 높이 올라가더니 유유히 서쪽으로 사라졌다.
주저앉은 명국영은 잠시 후에야 오줌을 지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오늘 일, 누가 믿을까? 륜사라고 해도 고개를 흔들 것이다.
유천주는 왜 죽이지 않았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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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락내리락 규칙적으로 움직이는 무룡의 등에 누워 팔베개를 한 채 천장을 올려다보던 단태는 길고 무겁게 숨을 토해 냈다. 명국영과의 대화는 곱씹어도 답이 나오지 않는 막다른 골목 같았다.
그 대화를 통하여 자신이 얼마나 평범한 인간의 사고방식에서 멀어져 있는지 실감했다. 이제껏 만난 그 누구보다도 지혜롭고, 마음이 열려 있는 명국영조차 인간과 용의 공존이 불가능하다고 단언하다니.
그 논리, 인간이라면 부정하기 어렵다. 인간의 눈으로 보면 유천주는 제거해야 마땅한 ‘해충’ 같은 존재니까.
잊혀졌던, 잊었다고 여겼던 걱정거리가 마음의 수면 위로 떠올랐다.
“나는 뭘까?”
용일까? 인간일까?
분명히 인간이라고 확신했었다. 엄마의 배 속으로부터 세상으로 나온 순간의 기억은 그 증거였다. 당시엔 생생하다 못해 충격적이기까지 한 그 기억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했었다.
과거는 중요하지 않다. 아니, 덜 중요하다. 지금, 현재, 이 순간이 결정적이다. 나는 누구인가? 용과 인간의 중간은 답이 아니다. 인간의 몸을, 인간의 마음을 가지고 있을까? 엄마는 어느새 희미해진 기억의 흔적에 불과하다.
인간의 편에 선 명국영 앞에서 단태는 용의 입장을 취했다. 사려 깊은 분석과 거리가 먼, 본능에 가까운 결정이었다. 처음엔 유천주 행세를 했지만, 마지막엔 단태 자신이 용족의 일원으로서, 위대한 존재로서 한 말이었다.
암탄주의 유산은 더 이상 의미가 없었다. 몸의 변화는 이미 통과한 시험이 남긴 전리품이 아닌가?
문제는 유천주였다. 3년 동안 지켜본 유천주가 남긴 유산은…… 육체가 아니라 정신 깊숙이 박혀 있었다. 단태를 용으로 간주한 유천주는 자신을 소멸시킴으로써 무룡을 남겼고, 그 고결한 행동은 단태를 용족으로 끌어당겼다.
그때, 옆에 둔 가방에서 툭툭 소리가 났다.
번뇌를 떨친 단태는 손을 뻗어 가방을 끌어당겼다. 조심스레 가방을 뒤집자 책이 굴러떨어졌다.
평범한 책처럼 갑옷처럼 단단한 무룡의 등에 떨어진 책 한 권.
책은…… 살아 있었다. 천천히 오르락내리락 책은 부풀어 올랐다가 줄어들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눈도 없고, 팔과 다리도 없지만 살아 있음이 분명했다.
점잖은 서생처럼 가만히 있던 책이 불쑥 공중으로 떠올랐다. 단태는 뒤로 펄쩍 뛰었다. 이리저리 움직이던 책은 단태 앞으로 다가와 멈추었다. 용즉계로 대응할 자세를 취한 단태는 낡은 책이 허공에 박힌 듯 가만히 있자, 천천히 접근했다.
살아 있는 책에 대한 이야기는 마간에 쌓인 수많은 책을 읽으면서 접한 적이 있었다. 대마법사라 불리는 아레마고는 물론 묘사탁, 탄무랑, 옥현, 풍립 그리고 청화 등 명성이 자자한 마법사들이 심혈을 기울여 만들었다고 알려진 ‘생사편’은 오랫동안 도굴꾼이 찾아다닌 보물이었다. 한 권이라도 찾아낸다면 그야말로 부르는 게 값일 터였다.
생사편의 존재를 언급한 고대의 책은 꽤 많지만 정작 생사편은 발견되지 않자, 역사학자와 마법사 등 전문가들은 생사편이 만들어졌다고 해도 길어야 백 년 존재할 수 있었다고 결론을 내렸다. 관련 논문만 수십 편에 달할 만큼 한때는 중요한 논쟁거리였다.
단태는 제작자가 허용한 사람만 만질 수 있고, 읽을 수 있다는 생사편 관련 기록을 떠올리면서 손을 뻗었다. 책이 조금이라도 반응을 보이면 즉시 물러설 생각이었다.
다행히 책은 공중에 그대로 떠 있었다.
손가락 끝이 책에 닿는 순간, 뚫린 구멍으로 마력이 빠져나갔다. 용마문조차도 급류 같은 마력을 막지 못했다.
섬광이 터졌다.
다음 순간, 단태는 거대한 문 앞에 서 있었다.
“……아레마고의 문이잖아.”
문 너머로 눈이 쌓여 하얗게 변한 들판이 보였다. 구불구불 언덕 뒤로 이어진 좁은 길은 하얀 들판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몸을 돌린 단태는 깜짝 놀라 ‘헉’ 공기를 들이마셨다. 유타루체가…… 보이지 않았다. 늪지대 곳곳에 움막 혹은 통나무집 따위가 모여 있을 뿐, 복잡하면서도 묘한 아름다움을 발산하는 물의 도시는 없었다. 얼어붙은 늪지대 너머로 일렁이는 호수가 회색 구름 아래 펼쳐져 있었다.
“어서 오게.”
폐병 환자처럼 기침을 하는 노인이 옆에 서 있었다.
이 실감나면서도 몽롱한 분위기, 낯설지 않다. 공간이동 마법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