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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이 한순간에 겨울이 될 수는 없으니까. 단태는 곧 그 생사편이 용옥처럼 누군가의 기억을 담아놓은 그릇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렇다면 이 노인은…… 대마법사 아레마고리라.
흥분이 등골을 타고 내려갔다.
용옥은 용족의 전유물이라고 생각했건만.
“어르신께서 찾는 사람은 제가 아닐 것 같습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나?”
수염이 가슴 언저리까지 내려오고 잘 씻지도, 먹지도 못해서 추레한 몰골의 노인이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전 아레마고의 계승자가 아니니까요. 책의 주인은 따로 있습니다.”
단태는 명국영을 떠올렸다. 명국영으로 인해 책은 생명을 되찾았다. 그러니 명국영이 여기로 와야 할 사람이다. 인정하기 싫지만, 이 책은 인간과 용의 공존은 불가능하다고 잘라 말하던 명국영의 것이다.
“난 자네를 기다렸네. 아주 오랫동안.”
아레마고는 새끼손가락으로 귀를 후비며 말했다.
“……그렇습니까?”
“배가 고프군. 밥부터 먹어야겠어.”
노인은 단태를 무시하고 늪지대로 가더니 얼음을 딛고 호수 가까이 걸어갔다. 단태는 용족처럼 제멋대로인 아레마고를 따라 호수 쪽으로 향했다.
아레마고는 팔짱을 낀 채 호수를 노려보고 있었다.
한참 동안 기다린 단태가 물었다.
“여기서 뭘 하십니까?”
“물고기가 나오길 기다리고 있네.”
“…….”
단태는 용이든, 인간이든 까마득한 경지에 오른 존재는 죄다 엉뚱하다 못해 괴팍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순간, 팔뚝만한 물고기가 튀어 올라 물 밖으로, 정확히 아레마고 앞으로 떨어졌다.
“고맙다, 이 녀석아.”
아레마고는 손날로 기절시킨 물고기의 아가미를 잡고 뭍으로 걸었고, 단태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뒤따랐다. 마법은 사용되지 않았다. 마력의 흐름이 있었다면 누구보다도 먼저 느꼈을 것이다.
노인은 축축한 나뭇가지를 모아 놓더니 그 앞에 앉아서 또 기다렸다.
설마?
저절로 불이 붙기를 기다리는 걸까?
아레마고가 단태를 보며 히죽 웃는 순간, 돌로 둥글게 쌓아서 만든 조그만 임시 화로에 불이 붙었다. 이번에도 마력은 사용되지 않았다. 단태는 마을로 찾아와 속임수로 사람들을 놀라게 만들었던 마술사 때문에 입을 벌리고 다물지 못한 어린 시절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내장을 손질하고 뼈를 발라낸 노인이 생선을 꼬챙이에 꽂아 굽기 시작했다.
“……어떻게 하신 겁니까?”
단태는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떻게 한 것 같나?”
“……모르겠습니다.”
비록 완전한 용은 아니지만 마법의 종족이라 불리는 용족 특유의 심장을 가지고 있으며, 마력을 민감하게 느낄 수 있는 단태에게 그 말은 자존심 상하는 고백이었다.
“내가 물고기를 잡았을까? 아니면 물고기가 스스로 올라와 잡혀 주었을까? 한번 맞혀 보겠나?”
“…….”
말문이 막혔다. 마음은 아레마고가 물고기를 잡았다고 여기지만, 냉철한 머리는 그 반대였다. 낚시를 하지도 않았고, 마법도 펼치지 않았던 것이다.
“다 익었구먼. 들게.”
아레마고는 잘 구운 생선의 절반을 단태에게 내밀었다.
단태는 별다른 양념 없이도 훌륭한 생선구이를 맛있게 먹어 치웠다.
“자네는 인간인가? 아니면 용인가?”
“…….”
또 다시 할 말을 잃었다.
“자네는 인간일 수도 있고, 용일 수도 있네. 허나, 인간이어서도 안 되고 용이어서도 안 되네.”
“……그게 무슨 뜻입니까?”
아레마고는 낮과 밤의 경계, 빛과 어둠이 뒤섞인 석양을 닮은 묘한 표정을 지은 채 화제를 바꿔 버렸다.
“언마에 대해 들어 본 적은 있지?”
“어르신의 책 ≪지완수≫를 읽었습니다.”
“언어가 곧 마법이라는 것, 황당하지 않았나?”
“……조금 그랬습니다.”
“왜 언어가 마법이 아니라고 생각하는가?”
장작 하나를 불에 던져 넣은 아레마고는 단태에게도 예상 못한 질문 하나를 던졌다.
“……말을 한다고 해서 마법이 펼쳐지지 않으니까요.”
“아기가 처음 엄마, 아빠라고 말을 하면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아는가? 밤낮으로 울음을 터트리는 아기 때문에 고생한 부모의 얼굴에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미소가 떠오른다네. 그보다 더 강력한 마법은 없지.”
“그건 마법이 아니잖습니까?”
“왜 아니라고 생각하나?”
앙상한 두 손을 뻗어 열기를 쐬던 아레마고가 고개를 돌려 진지한 눈빛으로 단태를 쳐다보았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그건 마법이 아니니까요.”
당황한 단태는 자신이 생각해도 멍청한 답을 내놓고 말았다.
“마법이 무엇인가?”
“……마력을 사용하여 원하는 변화를 일으키는 행동입니다.”
“마력을 사용하지 않아도 원하는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면? 아니, 마력으로는 상상도 못 할 일을 할 수 있다면 어떤가?”
“그건 불가능합니다.”
종자로, 종자장으로 마둔수탑에서 시간을 보낸 단태에게 마법은 변화를 가져오는 가장 확실한 수단이었다. 마법에 관해서는 물러서고 싶지 않았다.
“그런가?”
아레마고는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
인기척이 느껴져 고개를 돌린 단태는 보자마자 인간이 아님을 직감할 만큼 잘 생긴 사내를 발견했다. 비틀거리며 모닥불로 다가온 그는 아레마고를 노려보더니 맞은편에 털썩 앉았다.
“늙은이, 무슨 짓을 한 거지?”
“난 아무 짓도 하지 않았소, 위대한 존재여.”
아레마고의 말에 단태는 흠칫 놀랐다.
“그대의 예언이 이루어졌어. 나 만운주는 용족 역사상 처음으로 감기에 걸렸으니까. 열이 오르고, 기침은 물론 콧물까지 흐르더군. 대체 어떻게 한 거지? 마법은 아닌데.”
“제안을 받아들이시겠소?”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평생 감기로 고생할지도 모르지요.”
그 말에 만운주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감기는 죽을병이 아니다. 인간의 경우, 보름만 견디면 저절로 낫는다. 그 사실을 알지만 만운주는 저 늙은이의 말을 무시할 수 없었다. 평생 감기로 골골거리면 다른 용들 앞에 나설 수 없으리라.
“좋아. 받아들이지.”
“염려 말고 돌아가시오. 사흘 안에 위대한 존재는 예전처럼 건강해질 겁니다.”
“거짓말이라면 물의 도시는커녕 여기로 몰려든 인간을 모조리 죽이겠다.”
“안녕히 가시오, 위대한 존재여.”
아레마고의 말에 만운주는 죽일 듯 노려보다가 고개를 흔들며 어둠 너머로 사라졌다.
단태는 직접 본 이 광경을 믿어야 할지, 거짓으로 판단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사실이라면 한낱 인간에 지나지 않는 아레마고가 위대한 용 만운주를 협박하여 유타루체를 세운 것이다! 아레마고가 꾸며낸 기억일까? 그럴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자네는 용족에 대해서 누구보다 잘 알고 있지? 자네가 보기에 용이 스스로 자기 영역을 인간에게 허락한 적이 있나?”
“……없습니다.”
“그렇다면 자넨 무엇이 진실인지 알겠군.”
누더기 같은 망토를 걸친 대마법사의 목소리에 담긴 무게를 결코 가볍지 않았다.
만운주는…… 용오군 중 하나였다. 당대를 대표하는 다섯 용 중 하나라는 건, 천마의 경지에 오른 대마법사 열 명, 아니 백 명이 찾아와도 당해내지 못할 극강의 존재라는 뜻이다. 용오군이 마음을 먹으면 나라 하나쯤은 어렵잖게 무너뜨릴 수 있었다.
그런 만운주에게 땅을 뜯어 내다니!
“어떻게 하신 겁니까?”
“내 말을 듣지 않으면 감기에 걸릴 거라고 했지.”
“……그게 정말입니까?”
“자, 만운주가 용족 역사상 처음으로 인간처럼 감기에 걸린 게 우연일까? 아니면 필연일까?”
아레마고는 어린 손자에게 수수께끼를 들려주는 할아버지처럼 주름진 웃음을 보였다.
아레마고가 달리 보였다. 추레한 노인이 아니라, 그 누구보다도 위대한 대마법사! 하지만 여전히 언어가 곧 마법이라는 아레마고의 말은 받아들이기 어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