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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인 해제
“모든 금속은 결국 금이 된다……?”
용령제국이 건국되기도 전에 죽어서 땅에 묻힌 연금술사 왕망이 남긴 ≪화만금≫을 읽던 위연미는 고개를 들어 어둠을 올려다보았다.
등잔불의 빛이 닿지 않는 천장은 안개 같은 암흑으로 꽉 차 있었다. 등잔을 기울이면 순식간에 달아나 버릴 어둠이겠지만.
연금술은 금속을 일종의 수목으로 간주한다. 여인이 임신하여 아이를 낳듯, 대지는 금속을 임신하여 결국 금을 낳는다는 게 연금술사의 주장이다. 나무가 땅속으로 뿌리를 뻗는 것처럼, 금속도 살아 있어서 이리저리로 뻗어 나간다는 내용도 연금술의 기본 원리였다.
차근차근 이해하려고 애를 쓰지만 연금술은 대지를 포함한 세상 전체를 연구하는, 단기간에 정복이 불가능한 학문이었다. 지질학, 물질학, 변환학, 약초학 등 다양한 학문을 섭렵해야 접근이 가능한 영역이기도 했다.
그 때문에 위연미는 반우현의 지시에 따라 연금술을 공부하고 있지만, 성과에 대해서는 회의적이었다. 평생을 파고든다고 해도 의미 있는 결과를 끄집어 낼 수 없을 것만 같았다.
편법을 동원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지겠지만.
반우현이 암탄주로부터 받은 지식에는 정상적인 단계를 건너뛰는 방법을 암시하는 부분도 있었다. 연금술이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표현 대신, 상징과 은유를 선호하기 때문에 관련 서적을 숱하게 찾은 후에야 결론을 내릴 수 있겠지만, 위연미는 지름길의 존재를 눈치채고 있었다.
반우현도 알고 있을까?
“아니야.”
말하자마자 위연미는 깜짝 놀랐다. 그렇게 단호한 어조로 말할 줄 몰랐던 것이다.
반우현은 질서가 지극히 정상적인 세계에서 자란 사람이었다. 반가는 어릴 때부터 계승자로 지목된 반우현에게 법률, 행정, 군사 그리고 역사와 철학 등 가치 있는 학문을 가르쳤는데, 그 과정에서 중시한 부분이 바로 명료함이었다.
세상이 혼돈으로 가득 차 있다고 해도, 도시를 이끄는 사람의 머릿속은 뚜렷해야 한다는 게 반명의 생각이자, 반가를 지배하는 분위기였다. 그 가풍은 고스란히 반우현에게로 전해졌다.
머릿속 깊이 박힌 그런 사고방식, 시장이 되어 도시를 다스리기엔 적합할지 몰라도 연금술처럼 난해하고, 다양하게 해석 가능한 영역과는 어울리지 않았다. 그런 이유로 반우현은 용의 유산인 연금술을 반쯤 포기했던 것이다.
편법을 묘사한 부분에는 한결같이 인체, 심장, 피가 등장했다. 이미 연금술의 상징체계에 익숙했던 위연미는 금을 대량으로, 빠르게 만들기 위해서 사람이 재료로 쓰일 수도 있음을, 또한 과거에 사용된 적이 있음을 직감했다.
근거는 없지만, 뼛속 깊이 파고드는 한기가 그 증거라고 위연미는 생각했다.
고개를 흔들어 상념을 떨친 그녀는 다시 책을 들여다봤지만 도무지 집중이 되지 않았다.
곧 위연미는 밤이 늦도록 읽히지도 않는 책을 붙잡은 이유를 깨달았다. 반우현이 알려 준 소식 때문이었다. 살아남으려는 진지한 노력과는 거리가 멀었던, 그저 어린아이처럼 징징대며 누군가의 도움만 바랐던 설희가 황제의 여자가 되었다는 그 망할 소식을 듣는 순간, 방망이로 거세게 맞은 것처럼 정신이 멍해졌다.
4년이나 이를 악물고 살았던 시간이 의미를 잃은 것만 같았다. 결국 행운이라는 별명을 가진 운명이 처절한 노력을 깡그리 짓밟는 것일까? 아무것도 하지 않았을 그 아이에게 행운이 따른다면, 누가 있는 힘껏 하루하루 살아갈까?
사악한 생각이 고개를 들었다.
설희가 노예라는 사실이 알려진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한바탕 피바람이 불 것이다. 신분을 숨기고 황궁에 들어앉은 설희 자신은 물론, 그런 설희를 황궁으로 데려간 반우현과 그 가문까지 황제의 분노 앞에서 무너지고 말겠지. 그 폭풍은 위연미도 집어삼키고, 물의 도시까지 뒤흔들 것이다.
위연미는 처음으로 자신에게도 악독한 면이 있음을 인식했다. 인격을 강조하는 ≪무무비경≫을 삶의 철학으로 삼았고, ≪역사≫를 통해 삶의 굴곡을 깊이 깨달았기에 어떤 순간에도 흔들리지 않는 평정심을 발휘할 수 있었으나, 그녀에게도 누군가의 성공을 질색하여 파괴하려는 악한 마음이 숨어 있었던 것이다.
혼란과 충동으로 그득한 마음이 가라앉을 때까지 위연미는 눈을 감았다. ≪무무비경≫의 충고는 어느새 그녀가 고민하지 않아도 생각의 틀을 갖출 만큼 마음 깊은 곳까지 스며들어 있었다. 평소 끝없이 마음을 단련한 덕분이었다.
파괴적 충동은 천천히 사라졌다.
“……그럴 순 없어.”
위연미는 생각을 바꾸었다. 마음이 개운해지자 시야가 밝아졌다. 설희의 성공을 시샘한 게 부끄러웠다. 축하해 주지 못할망정, 끌어내리려 그런 생각을 하다니.
“설희는 내 동생이니까.”
더러운 찌꺼기를 마음에서 쫓아낸 위연미는 또 다른 의미로 설희 생각을 시작했다. 노예라는 신분은 설희를 따라다니며 괴롭힐 텐데, 특히 반우현은 그 점을 이용해 설희를 움직이려 할 것이다. 설희가 과연 그 상황을 지혜롭게 이겨 낼 수 있을까?
아니, 극복하기 어려울 것이다.
새와 곤충, 정원과 화초에 관심이 많았던 설희에게는 도움이 필요하다. 누가 그 도움을 줄 수 있을까?
위연미는 빙긋 웃었다.
비록 노예로서 반우현을 따라다니며 그 명령을 수행하지만, 생각의 바탕…… 마음의 본질…… 인간으로서의 기본까지 스스로 노예라고 여긴 적은 없었다. ≪무무비경≫, ≪역사≫ 등 마음에 견고한 기둥을 세워 준 고전 덕분이었다.
노예는 그저 환경, 조건 그리고 법적인 제약에 불과함을 위연미는 잘 알았다. 당장 세상을 지배하고 운영하는 그 가공할 체계에서 벗어날 방법이 없을 뿐, 자신은 태생적으로, 본질적으로, 영원히 노예라고 생각하지 않으려 애를 썼고, 지금은 그 진실을 자연스럽게 아는 수준에 이르렀다. 타인의 인정을 받을 필요가 없는 진실이었다.
노예가 아니라, 평범한 자유인으로서 설희를 돕고 싶었다. 그런 행위야말로 자신이 노예가 아님을 온전히 증명할 터였다.
“설희에게 무엇이 필요할까?”
위연미는 그 질문을 던지자마자 ≪화만금≫을 치우고 은퇴한 세관국장 비춘방이 무려 10년이나 걸쳐 완성한 ≪유타루체의 속살≫이라는 책을 가져와 읽기 시작했다.
도시의 구조와 역사를 담아 낸 그 책만으로 유타루체를 알 수는 없지만, 그동안 반우현의 측근으로 보고 들은 것을 적절히 조합한다면 이곳의 상황을 모른 채 내려올 설희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수도 있을 테니까.
그 착한 아이가 우뚝 선다면, 결코 자신을 노예 상태로 내버려 두지 않을 거라는 사실도 위연미에겐 힘을 낼 수 있는 이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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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닥불이 탁탁 타고 있었다. 어둠이 내려앉은 가운데, 모닥불 주위만 빛으로 일렁거렸다.
단태는 나무를 야금야금 집어삼켜서 빛과 열기를 내뿜는 불을 바라보았다. 어릴 때부터 불은 신기한 현상이었다. 시뻘건 불은 간단히 나무를 재로 바꿔 버린다.
한때는 어떻게 불이 나무를 숯으로 만드는지 궁금해서 잠을 이루지 못했다. 엄마에게, 오랜만에 집으로 찾아온 아버지에게, 잘난 척하는 동네 어른 몇몇에게 물어봐도 원래 그렇다느니, 쪼그만 게 말이 많다느니 답은 알려 주지 않았다.
아마도 그때 궁금증과 질문에도 알 수 없는 게 세상에 많다는 진실을 배웠던 것 같다.
이후로 질문이 확연히 줄었으니까.
그때로 돌아간 느낌이다. 말이 곧 마법이라니. 아레마고는 직접 그게 사실임을 보여 주었다. 질문이 거품처럼 솟구쳐 올라왔다. 어떻게 말 자체가 마법일 수 있는지 꼬치꼬치 캐묻고 싶었다.
하지만 단태는 현실을 직시했다. 당면한 문제를 잊어선 곤란하다. 피부를 찢고 터져 나오는 바람의 압력을 막지 못한다면…… 순식간에 피가 흘러나와 끝장이 나고 말 것이다. 금룡어의 눈알로 배를 채워도 그 압력은 점점 강해지리라.
죽음 자체는 두렵지 않다.
무서운 건, 어딘가에 있을 설희를 돕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설희에게 영영 못난 오빠로 남고 싶지 않다. 이를 악물고 여기까지 왔건만. 실패로 삶을 마감하고 싶지 않다. 어떻게든 살아남고 싶었다.
애착이 클수록 상실로 인한 아픔이 큰 것처럼 그런 갈망이 클수록 공포도 커졌다.
“우라마타, 들어 봤겠지?”
고개를 들어 별이 총총 뜬 하늘을 쳐다보면서, 아레마고가 물었다. 그 목소리는 차분하면서도 몽롱해서 냉정한 현실 감각을 쫓아 버렸다.
“……네.”
단태는 무열군주가 들려준 ‘모든 것이 연결된 세계’를 떠올렸다. 용족은 그 세계와 연결되어 있었다. 저주가 덮쳐 그 연결 고리를 끊기 전까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