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단태신곡-211화 (211/2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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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나와의 계약을 받아들이겠느냐?

단태는 아레마고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소요왕령과 계약을 맺는다면 더 이상 바람이 몸을 찢어 놓을까 염려하지 않아도 된다네.”

모든 것을 아는 할아버지가 손자를 타이르듯, 아레마고는 말했다.

“……어떻게 그걸 알죠?”

“그보다 더 많은 걸 알고 있네. 충분할 만큼 알지는 못하지만. 소요왕령과의 계약은 자네 손바닥에 새겨진 봉인 마법진을 약화시킬 걸세. 자네는 더욱 강해지겠지. 그렇다고 해도, 자넨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네.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내 제안을 거절할 수도 있고, 소요왕령과 계약하여 당면한 문제를 처리할 수도 있네.”

“……제게 무엇을 원하십니까?”

“아무것도 없네. 그저 자네다워지기를, 지금보다 훨씬 더 자네다워지기를 바란다네.”

“…….”

그 말에 단태는 내면의 떨림을 느꼈다. 누군가를 닮거나 따라가기보다, 자기 자신다워진다는 것이야말로 사람에게 필요한 단 한 가지의 진실이 아닐까?

그렇다고 해도, 아무리 물어봐야 아레마고는 이유를 알려 주지 않거나, 자신도 모른다고 둘러댈 것이다. 확실한 근거는 없다. 믿거나, 믿지 않거나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단태는 구경이 재미있는지 히죽 웃는 소요왕령을 쳐다보며 말했다.

“계약, 거절합니다.”

경험이 그를 신중하게 만들었다. 아무리 진귀한 보물이라고 해도 무턱대고 받아들일 생각은 없었다. 몸이 터져 죽고 싶지 않지만, 함정일지도 모르는 구덩이를 제 발로 들어가고픈 생각은 없었다.

“어떻습니까, 소요왕령이여?”

아레마고는 환하게 웃으며 바람의 정령왕을 쳐다봤다.

-그대가 이겼다. 나와의 계약을 거절하는 인간이 존재하다니. 그대와의 내기에 진 대가로, 나 바람의 정령왕은 저 인간과 계약을 맺노라.

소요왕령이 말을 마치는 순간, 차가운 기운이 단태의 몸 안으로 쑥 들어왔다. 작아서 눈에 띄지 않는 얼음 알갱이 수백 만 개가 땀구멍을 통하여 몸 내부로 들어와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느낌이었다. 곧 그 한기는 몸 전체로 퍼져 나가며 사라졌다.

거절했는데, 계약을 맺다니!

소요왕령은 단태를 바라보았다.

-언제든 나를 불러라. 대가는 아레마고가 치렀으니. 아, 그대는 이미 물의 정령왕과도 계약을 맺었군. 기이한 일이야. 아무리 용의 심장을 가졌다고 해도 정령왕 둘과 계약을 맺다니. 아레마고, 그대는 알고 있었겠지?

“나는 아는 게 없는 사람입니다.”

아레마고는 빙긋 웃었지만, 마치 모든 것을 안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세찬 바람을 남겨 하얀 눈을 하늘로 띄워 올린 소요왕령은 공간 너머로 사라졌다.

몸이 달라졌다. 단태는 느낄 수 있었다. 용마문이 완전히 효력을 상실하진 않았지만, 상당한 양의 마력을 쓸 수 있으리라.

그때, 단태는 생사편 밖으로 튕겨 나왔다.

눈을 뜨니 무룡의 등에서 굴러떨어져 황금 깔린 바닥에 누워 있었고, 무룡이 커다란 눈으로 걱정스럽게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생사편은 사라졌다. 무룡의 옆구리, 발톱 사이를 다 뒤져도 나오지 않았다.

단태는 무룡의 두툼한 발가락에 기대고 앉았다. 옆에는 밧줄에 묶인 채 기절한 백율청현이 쓰러져 있었다.

용이 용옥에 기억을 담은 것처럼 아레마고가 생사편에 담아 놓은 기억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아레마고의 상상일까? 아니면 진실이 일부나마 섞여 있을까?

단태는 취풍장령을 소환했다. 마력이 빠져나가며 익숙한 여인의 모습이 나타났다. 소요왕령이 여왕이라면 취풍장령은…… 궁녀 같았다.

-부르셨어요?

“……그래.”

단태는 한계를 시험해 볼 요량으로 물의 정령 세산장령을 불러냈다. 현기증으로 머리가 핑 돌았지만 버틸 만했다. 건장한 체구의 사내가 단태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부르셨습니까?

무뚝뚝한 질문.

딱히 할 일이 없었던 단태는 두 정령을 돌려보냈다. 심장은 금세 마력으로 차올랐다. 한동안 마력을 쓰지 않았기 때문일까? 마력을 담는 그릇 자체가 커진 느낌이었다.

아레마고의 말처럼, 몸 내부의 압력은 느껴지지 않았다. 나무를 뿌리째 뽑아 버릴 기세로 불었던 돌풍은 어느새 잠잠한 미풍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의 말은 사실이었고, 또한 진실이었다.

그렇다면 언마도 받아들여야 할까?

단태는 누런 금괴 하나를 노려보면서 말했다.

“내 손으로 날아와.”

믿음을 그득 담았지만 금괴는 들썩거리지도 않았다.

고개를 가로흔든 단태는 풋 웃었다. 말하는 대로, 믿는 대로 이루어진다고 생각하다니. 아이들도 그런 말에 속지는 않는다. 대체 아레마고는 왜 그런 기억을 생사편에 남겼을까?

그때, 금괴가 흔들렸다.

정확히 단태가 머릿속으로 떠올렸던 그 금이었다. 날아오기는커녕 떠오르지도 않았지만 분명히 금괴는 덜커덕덜커덕 소리를 내며 가볍게 몸부림을 쳤다.

단태는 달려가서 무거운 금덩이를 들어올렸다. 혹시 아래에 힘 좋은 벌레가 있지는 않을까? 오랫동안 유천주가 내뿜은 용투기로 인해 대혈에는 벌레가 살지 않았다. 그러면 어떻게 금괴가 털럭거렸을까? 아레마고의 말이 옳을까?

자연스럽게 결존계와 정령소환술이 머릿속을 채웠다. 대형 마법진과 대량의 마력이 필요하지만 결존계, 정령소환술의 핵심은 순수한 고백이었다. 말로 맺는 계약이야말로 결존계, 정령소환술을 완성시키는 핵심이었다. 마법진과 마력은 부수적이었다.

심호흡으로 흥분을 가라앉힌 단태는 또 다른 금괴, 더 크고 무거운 금괴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명령했다.

“이리로 날아와!”

이번에는 덜컥거리지도 않았다. 기다려도 소용이 없었다.

세 번, 네 번째도 마찬가지였다.

“윽…….”

백율청현이 내뱉은 신음이 단태를 그 고민의 수렁에서 끌어냈다.

꿈에서 깬 사람처럼, 단태는 언마에 대한 기억을 옆으로 밀었다. 당장 해야 할 일에 집중하기 위해서였다. 탄면을 벗은 후, 그는 무룡의 발톱 사이에 묶인 채 기절해 있는 사내를 어깨에 걸치고 대혈을 벗어났다. 언마에 대한 고민, 급한 일은 아니니까.

백율운현이 열심히 청소하고 있을 주혈 안쪽으로 들어서자, 며칠 만에 노예처럼 옷이 누더기가 된 백율운현이 양동이 들통을 든 채 달려오다 단태가 내려놓은 남자를 보고는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누군지는 잘 알지?”

“…….”

“당신이 아끼는 동생이자, 백율가의 소가주 백율청현인데 벌써 잊은 건 아니지?”

“감히!”

백율운현이 고함을 지르며 달려들었지만, 곧 고통으로 쓰러져 몸부림을 쳤다.

단태는 겨우 몸을 일으킨 백율운현을 차가운 눈으로 쳐다보았다.

“돈이 넘쳐 날 텐데도 당신 동생은 악취미를 가졌더라고. 젊은 여자를 납치하여 강간한 다음, 돈 몇 푼 쥐여 주고 돌려보내는 걸 ‘휘풍’이라고 부르더군. 심지어 잡혀 온 여자들의 반응을 두고 돈을 걸기도 하던걸. 강간당한 사실을 숨기고 조용히 지내는 데 500마전, 수치심을 무릅쓰고 경비대를 찾아가는 데 300마전, 자살하는 데 1,000마전 등. 그런 걸 사람이라고 부를 순 없잖아?”

“그건…….”

“당신도 알고 있었지? 하긴, 방단의 수장인데 어떻게 모를까? 아마도 당신은 저 새끼가 저지른 악행이 들통 나지 않도록 조치를 취했겠지.”

“……왜 백율가만 건드리는 거지?”

백율운현은 윗니로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이 녀석은 내 눈에 띄었을 뿐이야. 운이 나쁜 거지. 그렇다고 기분 나빠 하진 마. 곧 이 녀석 친구들도 하나 둘씩 여기로 데려올 생각이니까. 당신도 알다시피 여긴 넓잖아. 할 일도 많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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