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2 회: 6-4 -->
“설마……?”
백율운현의 눈이 흔들렸다.
“소가주 몇 명이면 저 우리를 깨끗이 청소할 수 있을까?”
“마, 말도 안 돼.”
“말이 되게 만들어 주지.”
단태는 몸을 돌려 밖으로 나오며 문을 닫았다. 백율운현은 반가운 동생과 함께 저 안에 갇혀 희귀 생물의 뒤치다꺼리를 하며 시간을 보낼 것이다. 건방진 소가주는 현실을 부정하고 싶겠지만, 똥 치우기에 익숙한 백율운현을 보며 자기가 어디에 있는지 깨달을 것이다.
백율청현을 잡은 건, 우연이었다.
밤마다 높은 곳에 앉아 도시를 내려다보다가 비명이 들리거나 시끄러운 소리가 귀로 파고들면 거기로 가 보는 게 취미가 되고 말았는데, 가까운 곳에서 들린 날카로운 비명에 반응하여 달려가 보니, 백율청현이 패거리와 함께 심부름 나온 여자를 에워싸고 있었다.
단태가 패거리를 단숨에 쓰러뜨리자 백율청현은 자기가 백율가의 소가주라며 위세를 떨었지만, 그 때문에 용혈로 끌려 올지는 상상도 못 했으리라.
이왕 시작했으니, 단태는 소가주 수집이나 해 볼 생각이었다. 기세등등한 열한 가문의 뒤를 이을 소가주들이 줄줄이 사라진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오늘은 용옥간에서 자고, 내일부터 찬찬히 그 계획의 타당성을 검토할 생각이었다.
@
꿈자리가 사나웠다.
이마에 잘게 맺힌 식은땀을 소매로 닦으며 몸을 일으킨 명국영은 미풍에 흔들리는 창가림 막을 보자마자 손을 뻗어 침대 옆 탁자에 올려놓은 단도를 쥐었다.
용태학을 수석으로 졸업하고 용문거에 수석으로 합격하여 황제 앞에 섰던 그 시절, 세 번이나 찾아온 암살자로부터 죽음을 면한 것은 기적이었다.
이후, 어딜 가든지 호신용 단도를 지녔는데 돈을 받고 누군가를 죽이는 암살 전문가로부터 살아남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늘 죽더라도 편히 잠들기 위해서였다.
단도를 거머쥔 채 침대 밖으로 나온 명국영은 성냥으로 등에 불을 붙였다. 방이 환해지자 그늘이 물러갔다. 암살자는 없었……다. 대신, 복면 쓴 살인청부업자보다 더 놀라운 무언가가 창문과 침대 사이 공중에 둥실 떠 있었다.
책이었다.
주인을 기다리는 애완견처럼 얌전히 공중에 떠 있는 책 한 권이 명국영을 끌어당겼다. 주위가 조용해자 마룻바닥이 삐걱이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단도를 침대에 내려놓은 명국영은 그 책 앞에 섰다.
책이 저절로 펼쳐졌다.
익숙하면서도 놀라운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아레마고.
명국영은 천천히 손을 뻗어 책을 잡았다. 둥실 떠 있게 하는 힘이 사라지자 책은 평범한 종이 묶음으로 변했다. 명국영은 선 자세 그대로 표지를 읽었다.
“지완수…….”
천마들을 이 도시로 불러 모은 그 책.
호흡이 가빠 왔다. 손가락 끝이 떨리다 못해 저렸다. 다리가 후들거려 침대에 주저앉았다.
이런 식으로 ≪지완수≫를 보게 될 줄은 몰랐다. 중앙탑을 무너뜨려 유타루체에 경고를 한 수룡 유천주를 만난 것만큼이나 예상 밖이었다. 우연은 없다. 유천주의 용혈에 있어야 할 책이 이곳에 왔다면?
명국영은 창가로 걸어가 바깥을 살폈다. 마을은 어둠에 잠겨 있었고, 자경단원 두 명이 횃불을 들고 형식적인 순찰을 돌고 있었다.
침대로 돌아간 명국영은 ≪지완수≫를 읽기 시작했다. 어릴 때 익힌 속독법을 발휘하자 그 책을 읽는 데 얼마 걸리지 않았다. 명국영은 연거푸 세 번 읽어 대부분의 내용을 머릿속에 집어넣었다. 마음에 흡족한 책을 소화하는 명국영만의 방식이었다.
유타루체와 달리 성 밖 마을 주변의 치안은 그리 좋지 않다. 노골적으로 무리를 지어 강도짓을 자행하는 도적떼는 없지만, 초행길이라 헤매는 여행객을 노리는 놈들은 꽤 많았다.
명국영은 도저히 해가 뜨는 아침까지 기다릴 수 없어 등불을 손에 들고 여관을 나섰다. 저 멀리 늑대 울음이 들렸다. 바람이 숲에서 속삭이는 소리와 함께. 어둠은 두렵지 않다. 사람이 무서울 뿐이다. ≪지완수≫의 내용을 떠올렸더니 금세 아레마고의 문이 있는 성문 앞에 도착했다.
아레마고의 문을 조사하러 나왔던 경비대는 주위를 샅샅이 뒤진 다음, 돌아가고 없었다.
명국영은 하늘을 반으로 가르는 아레마고의 문을 올려다보았다. 기다란 기둥 같은 가로대 좌우로 별이 총총 떠 있었다. 문은 하늘을 반으로 나누고 있었다.
입안이 바짝 말랐다. 다시 흥분이 솟구쳐 심장이 필요 이상으로 거세게 뛰었고, 급히 오느라 무리했던 발목이 시큰거렸다. 혀로 입술을 축인 후에야 명국영은 입을 열었다.
“나, 명국영은 계……약을 받아들……입니다.”
그 말이 공중에서 흩어져도, 윙윙 바람 소리가 그 자리를 대신해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혀를 차며 과하게 반응한 자신을 책망하던 명국영의 머릿속으로 묵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수탄왕령이다, 인간.
“나, 나는…….”
깜짝 놀란 명국영은 주위를 살피다 엉덩방아를 찧었다.
-나는 그대와의 계약을 받아들인다. 그대는 나를 세 번 소환할 수 있다. 그 대가는 이미 받았다. 나는 아레마고를 위하여 그대를 세 번 도울 것이다.
천둥 같은 소리가 머릿속에서 울리고 있음을 깨달은 명국영은 천천히, 힘겹게 일어섰다. 물의 도시 유타루체와 관련된 역사서, 초급 마법서, 철학서 등 다양한 서적을 독파한 그는 수탄왕령이 무엇인지는 잘 알고 있었지만, 현재 상황은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명국영은 평생 몸 대신 정신을 갈고닦은 사람이었다. 정신의 무게와 예리함은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기에, 그는 금세 평정을 되찾고 ≪지완수≫가 진실이며, 머릿속에서 포효하는 존재가 그 수탄왕령임을 받아들였다.
“……무엇이든지 가능합니까, 물의 정령왕이여?”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나는…… 한 사람을 찾고 싶습니다.”
-사람을 찾고 싶다? 그대는 내가 누구인지,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모르는가?
“아닙니다.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말씀드리는 겁니다. 그 아이는…… 수룡 유천주에게 붙잡혀 갔습니다. 살아 있다면 아마도 유천주의 용혈에 있을 겁니다.”
-재미있군.
“그 아이의 이름은 단태입니다. 나는, 단태를 찾고 싶습니다.”
명국영에게 망설임은 없었다.
-그대가 이미 찾았다면?
수탄왕령의 묵직한 목소리에 장난기가 담겼다.
“……그럴 리가 없습니다.”
-귀중한 소원 하나를 허비했군. 그대는 이미 그 아이를 찾았고, 또한 만났다. 그대는 신중하라. 세 가지 소원을 그대에게 주기 위해 아레마고는 목숨을 버렸다.
“…….”
단태가 어디 있는지 알려 달라고 말하려 했던 명국영은 말문이 막혔다. 1,500년이나 되는 유타루체의 역사를 다 훑는다고 해도 수탄왕령과 계약을 하고도 살아남은 마법사는 존재하지 않는다. 적어도 기록에는 없다. 명국영은 그 말을 무시할 수 없었다.
-그대의 머릿속에 봉인이 있군. 나와의 계약으로 그 봉인이 풀릴 테니, 그대는 생각하고 또 생각하라.
머리를 무겁게 짓누르던 그 존재감이 사라졌다.
그때, 명국영은 기억을 되찾았다. 륜사와 여화, 단태를 살리기 위해 암탄주를 찾아갔던 기억이었다. 한마디, 한마디 주고받던 대화가 모조리 떠올랐다.
명국영은 무릎을 꿇었다. 숨을 몰아쉬어도 폐에 공기가 부족했다. 혈액이 모조리 빠져나가는 느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