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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탄주가 한 말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나는 그대가 눈치챈 것처럼 의도적으로 마법사를 이곳으로 끌어 모았다. 그들에게 한 가지 선물을 주기 위해서지. 바로 멸망이다. 종족의 멸망을 맛보게 해 주려는 거다. 난 용의 쇠퇴와 멸망을 지켜보는 인간의 태도를 잊지 못한다. 용이 약해서, 그대가 언급한 것처럼 협력을 못해서 멸망한다고 말하는데, 인간이 똑같은 현실에 부딪힌다면 어떨지 보고 싶거든. 인간은 그 잘난 협력을 통하여 그 재앙을 이겨 내는지, 아니면 서로 살기 위해 싸우다가 용보다 더 빨리 멸망하는지 알고 싶다는 뜻이다. 자, 그대가 원하는 나의 뜻을 들었는데, 기분이 어떤가?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용혈 밖으로 나가려 했는데, 몸이 얼어붙고 말았다.
암탄주가 이어서 한 말도 생각났다.
-책만 읽은 그대가 마법사조차 꺼리는 이곳으로 나를 찾아온 이유, 나는 알고 있다. 그대가 아끼는 사람들 때문이지. 인간 특유의 그 협력, 혹은 우정에서 우러난 용기겠지. 난 용기 있는 자를 높게 평가한다. 그래서 그대의 부탁을 들어줄 것이다. 그대를 위해 그들을 구해 주겠다. 허나, 그대는 용기를 내어 이곳에 들어온 것을 후회할 것이다. 왜냐하면 난 그대가 구하려는 자에게 인간족의 운명이라는 가혹한 짐을 지울 생각이니까. 그대 덕분에 그들은 인간족 전체의 운명이라는 책임을 짊어져야 할 것이다.
명국영은 말도 안 된다고 소리쳤었다. 암탄주가 뭐라고 했을까? 맞다! 망각의 늪!
-그대는 그들이 운명의 굴레를 뚫고 나올 때까지는 망각의 늪에 빠져 있을 것이다. 그때까지 아무것도 모른 채. 허나 마음 깊숙이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알고는 자책하면서 살아갈 것이다. 그들이 그대를 여전히 신뢰한다면 그대에겐 기회가 주어지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그대의 삶은 아무것도 모른 채로 늙어서 죽을 것이다. 어쩌면 그대의 운명은 그들의 운명보다는 낫다. 아무것도 모르면 고통도, 번민도, 절망도 없을 테니까. 그대는 이곳에 잘 들어왔노라.
모든 것이 명확해졌다.
암탄주의 유산은…… 인간 전체를 향한 저주였다. 그 유산을 받아들인 누천파와 반우현은 그 자신도 모르게 멸망의 길로 걸어가고 있으리라.
유산을 거절한 단태는?
한참 만에 몸을 일으킨 명국영은 만취한 사람처럼 흐느적거리며 여관으로 돌아갔다. 놀란 여관 주인의 질문에 아무런 답도 하지 않고서 방으로 올라가 침대에 누워 버린 그는 눈을 감았다. 모든 것이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생각’할 게 너무 많았다.
그의 한계를 훌쩍 뛰어넘을 만큼.
자야 한다. 그래야 생각할 수 있다.
명국영은 잠들기 위해 머릿속 혼돈과 싸웠고, 겨우 이길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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짜증나는 햇볕 아래에서, 사령마는 아레마고의 문에 손을 갖다 댔다. 견고하면서도 매끈한 감촉은 여전했지만 무언가 달라져 있었다. 그가 고개를 돌려 쳐다보자, 백휘섬선 광오선이 우뚝 선 아레마고의 문을 어루만지며 눈살을 찌푸렸다. 음마성 율암도, 광마 종만추도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암혼빙마 백탁은 만지지 않고도 그 변화를 느끼고 있었다.
천마들은 같은 결론에 이르렀다.
아레마고의 문이 알 수 없는 이유로 변했다!
그렇다면 ≪지완수≫도 나타났으리라.
천마들은 용마렵 참석을 핑계로 유타루체에 왔지만, 다들 ≪지완수≫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천마 위에 또 다른 단계가 있으며, 그 경지로 이끌어 줄 ≪지완수≫를 얻는다면, 여러 명의 천마들 중 하나가 아니라 유일한 대마법사로 우뚝 설 수 있을 터였다.
그들은 서로를 응시하다가 말없이 흩어졌다. ≪지완수≫가 출현했으니, 이제 뭉쳐서 다닐 필요는 없다. 어떻게든 ≪지완수≫를 확보하여 유타루체를 떠나면 그만이다.
사령마는 별장으로 돌아갔다. 침묵이 지배하는 조용한 곳에서 ≪지완수≫가 어디 있을지 생각하기 위해서였다.
≪지완수≫처럼 강력한 마법서가 출현했으니, 곧 움직임이 시작될 것이다. 보물은…… 사람들의 탐욕을 자극한다. 평생 친구로 지내 왔다고 해도, 보물 앞에서는 갈대처럼 흔들리는 게 사람이다. ≪지완수≫는 우정을 파괴하고, 가족을 무너뜨릴 뿐 아니라, 탐욕을 극대화할 것이다.
음습한 공간을 선호하는 그는 지하실로 내려갔다. 소음으로부터 자유로운 그 공간에 들어선 후에야 사령마는 무언가 일이 벌어졌음을 깨달았다. 지하실 바닥에 설치된 사유위룡진이 용투기를 감지한 것이다. 지난번과 달리, 지금도 사유위룡진은 유천주의 위치를 추적하고 있었다.
“이런…….”
유천주는 현재 유타루체의 서쪽 지역에 있다!
노골적으로 용투기를 드러내 놓다니.
≪지완수≫를 향한 욕심만큼이나 유천주에 대한 두려움도 컸다. 생존 본능을 따른다면 당장 짐을 꾸려, 아니 짐도 챙기지 않고 도시를 떠나야 하리라. 하나, 또 다른 본능이 사령마로 하여금 도시를 떠나지 못하게 막았다. 두려움만큼이나, 두려움보다 더 강렬한 탐욕이 서서히 우세를 차지했다.
혹시 유천주가 ≪지완수≫를 가지고 있을까? 그럴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다른 천마들에게 알려야 할까?
“그럴 순 없지.”
사령마는 패혈력을 비롯한 어둠의 힘을 억누른 채 유천주부터 찾아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본체로 나타났다면 이미 도시 전체가 극심한 혼란에 사로잡혔을 터, 유천주는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으리라.
문득 궁금했다.
왜 유천주가 서쪽 지역에 있는지.
*충동
눈을 뜬 순간, 무언가 달라졌음을 알아차렸지만 그게 무엇인지 알 수가 없어서 답답했다. 손에 잡히지 않는 무언가가 바뀌었다.
풍혈지체의 부작용이라는 끈질긴 문제가 해결되었다. 마땅히 기분이 좋을 거라고 기대했으나, 그 반대였다. 무시할 수도 없고, 무시해서도 안 되는 변화가 일어났는데, 그게 무엇인지 모르고 있는 멍청이가 된 느낌이었다.
그래, 마음을 가라앉히자.
차분해지면 이 찝찝함의 원인을 알 수 있으리라.
곧 무거운 침묵이 깔렸다. 익숙하면서도 부담스러운 정적 앞에서 단태는 평정을 되찾았다.
그러자 무엇이 바뀌었는지 알 것 같았다.
어둡지만 밝았다. 조용하면서도 귀를 건드리는 소리로 가득했다. 눅눅한 냄새와 산뜻한 향이 뒤섞인 공기도…… 익숙지 않은 무언가를 포함하고 있었다.
잠시 후에야 단태는 진실을 알아차렸다.
또다시 감각이 예민해진 것이다. 바람의 정령왕과의 계약 때문이리라.
손을 올려 오른쪽 가슴에 댔다. 다행히 두 번째 심장의 고동은 느껴지지 않았다. 가슴이 쪼그라들며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용족의 고유한 특징이라 할 수 있는 두 개의 심장이 자리를 잡는다면, 혼란은 한층 커지고 말 것이다.
“단태, 단태.”
용옥 사이에 앉아 있던 란조가 날아왔다. 동그랗고 새까만 눈, 보드라운 은색의 털로 덮인 머리, 진홍색의 몸통 그리고 새하얀 날개를 가진 란조는 단태의 어깨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단태는 부리 아래쪽을 손가락으로 긁어 주었다.
“지하 통로로 온 거냐?”
“통로, 통로, 통로.”
그 말을 듣는 순간, 단태는 무룡의 등 대신 두 발로 란조를 따라 도시로 올라가리라 마음먹었다.
아무리 신경을 쓴다고 해도 무룡의 몸은 숨기기 어려울 만큼 거대했다. 아마 유타루체 인근의 숲에서 거대한 용이 출몰한다는 소문이 돌고 있을 것이다.
머릿속 생각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엉뚱한 방향으로 튀었다. 처음으로 란조의 목소리, 인간의 음성을 닮은 새 울음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솔직히 말한다면, 역겨웠다. 분필로 칠판을 긁을 때 나는 소리처럼.
왜 그런지 그도 몰랐다.
좀 더 완벽한, 좀 더 아름다운 소리를 낼 수도 있지 않을까? 어떻게 하면 더 좋은 소리를 내게 할 수 있을까? 소리를 내는 구조를 들여다볼까? 구조를 파악하여 문제점을 알아낸다면 해결법도 찾아낼 수 있을 텐데.
생각은 너무도 빠르게 끔찍한 결론에 이르렀다. 빨라서 막을 수가 없었다.
자연스럽게 손이 올라갔다.
란조를 잡기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