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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끄러운 주황색 지붕 위를 달렸다. 골목처럼 좁다란 물길을 가볍게 뛰어넘어 맞은편 건물 지붕에 안착했다. 속도를 높였다. 탁, 탁, 탁 구둣발 소리가 경쾌했다. 그러다 넓어서 도저히 뛰어넘을 수 없는 운하 앞에 섰다.
돛을 접은 대형 범선이 소마선 두 척이 이끄는 대로 운하를 미끄러지듯 움직이고 있었다. 충동에 몸을 맡겼다. 아니, 생각할 겨를도 없이 몸이 움직였다.
건물 옥상에서 벗어난 몸은 자유로웠다. 공중에서 하늘을 나는 기분이었다. 곧 그 몸은 범선의 돛대에 가로로 달려 있는 서까래 같은 나무에 올라섰다. 강은 물론 바다 위를 누빈 범선에서 짠내, 바다의 냄새가 느껴졌다. 두 팔을 좌우로 벌려 균형을 유지하며 망루로 달렸다.
망루 난간을 손으로 잡고 사방을 바라봤다.
도시가 천천히 뒤로 밀려나고 있었다. 위아래로 조금씩 흔들리면서. 배에 올라탄 느낌이라기보다는 거대한 박물관에 들어와 고대의 도시를 구경하는 것 같았다. 벌레처럼 서로를 의지할 수밖에 없기에, 그런 협력 관계가 만들어 낸 걸작품이 바로 도시가 아닌가.
망루를 벗어나 탁, 탁, 탁 가로대 위를 달리다 도약했다.
운하 맞은편 건물 4층 노대에 안착했다. 창문 안쪽에서 시선이 느껴졌다. 속옷만 입은 채로 얼어붙은 젊은 여자에게 손을 흔든 후, 지붕으로 올라갔다. 쓸모없이 건물 곳곳에 다닥다닥 붙어 있는 화강암 부조물을 잡고 올라가니 전혀 힘들지 않았다.
다시 비 오는 도시의 지붕 위를 달렸다.
여관이 보였다.
후원의 울창한 나무가 멋진 여관.
귀를 기울이자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귀는 원하는 방향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잡아내는 기가 막힌 도구로 변해 있었다.
아이답지 않아서 걱정인 소윤, 돈을 밝히면서도 따뜻함을 잃지 않은 여관 주인, 공부로 성공해야 한다는 엄마의 생각에 은근히 반대하는 아들 계두철, 그런 계두철을 가르치는 류근묵, 기합을 넣어 가며 수련을 거듭하는 류근철, 그리고 바쁜지 여관에 붙어 있지 않는 류근명의 부재와 내리는 비를 바라보며 차를 마시는 석현담까지.
여관은…… 집이었다.
아니, 집 같았다. 자연스러움과 목적이 묘하게 뒤섞인 느낌.
문을 열고 들어가지 않고 지붕 위로 뛰어내려 창문을 통해 방에 들어섰다. 그의 방. 하루, 이틀 들어오지 않아도 누군가에게 빼앗길 염려가 없는 방이었다. 아직은 거대한 용혈보다 이 작고 포근한 방이 좋았다. 아직은 용보다 인간 쪽에 가까운 모양이다.
마음이 놓인다. 용혈은 익숙한 장소이지, 마음이 편안한 곳은 아니다. 어쩌면 아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지도 모르지만.
바람의 정령을 불러 젖은 몸과 옷을 말렸다. 따뜻하면서도 습하지 않은 바람에 금세 물기는 사라졌다. 복도로 나와 계단으로 접어들었다. 왁자지껄한 소리가 들렸다. 삐걱삐걱 흔들리는 계단 소리와 함께. 계단참에서 멈추었다.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진실이 모조리 알려진다면, 인간에서 용으로 변하고 있는 중임이 까발려진다면, 사람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그래도 여전히 따뜻한 환대를 기대할 수 있을까? 아니면 용을 향한 뿌리 깊은 공포를 사람들의 눈과 몸짓에서 찾을 수 있을까?
문득 석현담이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암탄주의 유산, 유천주의 유언까지 속속들이 알면서도 그런 결정을 내렸을까? 접촉으로 그의 생각을 알아내고 싶지만, 그랬다가 오히려 더 많은 비밀이 그에게 알려질 것 같아서 엄두가 나지 않았다.
“주군!”
비 내리는 거리를 감상하던 석현담이 단태를 먼저 발견했다.
단태는 애써 웃으며 석현담 맞은편에 앉았고, 여관 주인이 차를 따랐다. 불순물이 섞여 맛과 향을 끌어내리는 하급 상품이었다. 한 푼이라도 더 벌기 위해 그런 상품을 고른 것이리라.
돈에 연연하면서 아닌 척하는 저 얼굴, 순간이나마 역겨웠다. 곧 그게 보통 사람들의 얼굴임을 깨달았지만, 씁쓸한 감정은 한동안 마음에 남아 있었다.
“빗소리가 듣기 좋다.”
“……그렇습니다.”
어색한 무언가가 공기 중에 떠돌고 있었다.
단태도 그걸 알았고, 눈치 빠른 석현담도 놓치지 않았다. 어쩌면 석현담은 단태에게서 수상쩍은 변화를 감지했을지도 모른다.
오해는 아니지만 이 미묘한 감정의 찌꺼기를 치워야 한다.
단태는 일부러 웃으며 차를 한 모금 마셨다. 특유의 맛과 향보다, 거기 있지 말아야 할 맛과 향 때문에 이맛살을 찌푸렸다. 이전보다 월등히 예민해진 후각, 미각 때문이었다.
“괜찮은 차를 사야겠어. 이건, 차가 아니야.”
그 말이 불쑥 튀어나왔다.
“알겠습니다.”
어색함은 더 무거워졌다.
단태는 손을 뻗어 석현담 앞에 놓인 신문을 집어 들었다. 법과 질서를 무시하는 흑웅을 잡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는 경비대장의 얼굴은 돼지 같았다. 그런 조치가 상류층을 위한 것임을 꼬집고 있었다.
“……무슨 일, 있습니까?”
조심스러운 석현담.
“전혀.”
단태는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보지 않았다. 눈을 들여다보면 왠지 비밀을 들킬 것만 같았다. 그리고 이 어색한 분위기가 싫었다. 간혹 처음 만난 사람과 좁은 공간에 함께 있으면 서먹서먹해지기도 하지만, 왜 석현담에게서 그런 느낌을 받을까? 편히 대할 수 있는 사람이었건만.
“사부님!”
비와 땀으로 범벅이 된 류근철이 달려왔다.
반가워하는 류근철의 얼굴을 보는 순간, 단태는 자신이 무엇을 잃어버렸는지 알 것 같았다.
너무나 간단해서 굳이 애를 쓰지 않아도 가능했던 감정 표현 방식이었다. 상대방이 무엇을 느끼는지 아는 능력, 그 감정에 맞게 반응하는 능력, 그리고 자연스럽게 서로의 감정을 나누면서 하나가 되는 능력을 잃었다.
붉게 상기된 류근철을 보면서 단태는 얼마나 제대로 수련을 했는지, 어디가 부족한지 찾고 있었다. 사부를 본 제자의 반가움이라는 무형의 감정보다는 눈에 띄는, 확인 가능한 무언가가 단태에겐 중요했다.
“쌍계의 본질은 유연함이다. 그 부분을 잊지 않도록.”
“……네.”
당황하는 류근철.
“벌써 수련을 끝낸 건 아니겠지?”
“……당연합니다.”
류근철은 다시 후원으로 향했다.
단태는 신문을 읽는 척했지만 기사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쫓아가서 뭐라고 말을 해야 하지 않을까?
한편으로는 사부로서 제자 앞에 권위를 세우는 행위는 지극히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힘겨운 기합 소리가 간간이 들렸지만 장기적으로 본다면 류근철에게 오히려 유익이라는 점 때문에 단태는 거기 눌러앉았다.
웃으며 다가온 여관 주인에게도, 투자금의 사용 내역을 설명하려고 내려온 류근명에게도 어긋난 느낌을 받은 단태는 도망치듯 방으로 올라갔다.
예전보다 훨씬 많은 것을 보고, 듣고, 감지할 수 있는데, 왜 자연스러운 대화가 어려울까? 불쑥불쑥 상대의 약점 혹은 결점을 찌르고 싶은 충동 때문일까? 아무튼, 정상인이라면 누구나 가능한 일이 단태에게는 잔뜩 긴장해도 어려운 과업이 되고 말았다.
불편함의 원인은 명확했다.
부지불식간에 떠오르는 생각의 파편, 혹은 강렬한 충동을 입으로, 몸으로 드러내지 않으려고 애를 쓰다 보니, 전혀 자연스럽지 않았다. 어색함이 뚝뚝 묻어났고, 단절된 느낌은 점점 커졌다. 그들에게 무슨 문제가 있는지 말하라면 쉬지 않고 떠들 수 있겠지만, 그들을 존중하면서, 그들이 가진 부족한 면을 보지 않는 척하며 대화를 나누기는 어려웠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
발소리를 통해 이미 누군지 알고 있었다. 소윤이었다. 단태는 선뜻 들어오라고 말할 수 없었다.
문이 천천히 열렸다.
“오빠!”
“……응.”
두 팔을 뻗은 자세로 달려온 소윤을 반사적으로 안은 단태는 그 자신의 마음과 싸웠다. 이 귀여운 소녀가 여기서 죽어야 할 이유 세 가지를 이미 찾아낸 것이다. 부모에게서 버림받을 만큼 가치가 없다면 세상을 위하여, 보다 똑똑한 인간을 위해서 소윤이 양보하는 게 마땅하다는 끔찍한 생각을 쫓아내기 위해 단태는 이를 악물었다.
“등이 딱딱해.”
단태는 소윤을 등받이가 달린 동그란 의자에 앉혔다. 긴장을 풀려고 해 봤지만 마음대로 되지는 않았다.
“당연하지. 힘이 세니까. 어제는 뭐 하고 놀았어?”
“아이들하고 ‘서끼’ 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