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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끼? 아, 돌을 돌려서 얼마나 오랫동안 회전하는지 알아보는 그 놀이?”
“내가 찾아낸 돌이 젤 오랫동안 돌았어.”
“……그래? 아주 잘했다.”
단태는 의미도 없고, 유익도 없는 놀이에 푹 빠진 소윤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생각 같아서는 회초리로 종아리를 때려서라도 무엇이 중요한지 가르치고 싶었다. 한창 뛰어놀아야 하는 아이를 보며 이런 생각이나 하다니.
아이들에겐 그런 놀이가 얼마나 중요한지 그는 잘 알았다. 단순한 놀이가 아니었다. 아이들은 놀이를 통해 서로를 평가한다. 누가 괜찮은 아이인지, 누구와 어울릴 것인지, 누구를 피해야 하는지. 무의식에 가깝지만 그런 평가를 통해 아이들 사이의 관계가 결정된다. 아이들에게 놀이를 빼앗으면 아이들이 자연스럽게 배우는 사람 사이의 관계도 사라질 터였다.
그럼에도 마음속 충동은 어릴 때부터 무엇이 중요한지 알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지혜와 지식은 무언가를 냉철하게 바라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정확한 지식을 통한 평가야말로 관계의 첫걸음이다. 지식도 없는 상태에서의 평가는…… 어림짐작이나 행운에 불과하니까.
진땀을 흘리며 충동을 억누른 단태는 소윤이 아이들과 놀기 위해 밖으로 나간 후에야 숨을 몰아쉬었다. 입고 있는 치마 아래로 내려온 연약하고 하얀 다리가 균형적이지 않다는 이유로 마음은 또다시 조그만 소녀를 짓밟고 있었다.
정령왕과의 계약? 원치 않았다.
되돌릴 수만 있다면!
“소요왕령.”
단태는 다른 누군가가 듣지 않도록 낮게 말했다.
곧 여관이 흔들리는 느낌과 함께 소요왕령이 모습을 드러냈다. 서늘한 바람이 방을 가득 채웠다. 창문을 반쯤 가린 휘장이 펄럭였고, 여관 주인이 낡은 꽃병에 꽂아 둔 들꽃 몇 개가 허공으로 올라와 춤을 추었다.
-무슨 일이지?
소요왕령은 혼기를 놓쳐 언제라도 신경질을 낼 수 있는 늙은 공주 같았다. 어쩌면 이기적인 여왕일지도.
“계약, 취소하고 싶습니다.”
단태는 힘주어 말했다.
-취소? 나와의 계약을?
바람이 강해지자 벽과 천장, 마루를 이룬 판자가 삐걱대는 소리가 커졌다.
“그렇습니다.”
단태는 물러서지 않았다. 애초에 원치 않는 계약이었다. 소요왕령과의 계약을 통해 힘을 얻고픈 마음은 없었다. 사람들과의 자연스러운 관계를 무너뜨릴 만큼 힘을 갈구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 충동 때문에?
소요왕령은 다 알고 있었다. 수탄왕령이 그러했던 것처럼.
“잘 아는군요.”
단태는 비꼬듯 말했다.
-안타깝게도 너의 요구를 들어줄 수는 없다. 엄밀히 따지면 난 너와 계약을 맺은 게 아니라, 아레마고와 맺은 셈이니까. 허나, 충고를 해 줄 수는 있다.
소요왕령은 요염하게 웃으며 다가왔다. 젖가슴의 굴곡이 고스란히 눈에 들어왔지만, 단태는 달라진 눈으로 완벽에 못 미치는 면을 찾아냈다. 흥분 따위는 하지도 않았다.
“귀가 달려 있으니, 들어는 보겠습니다.”
-무례하구나. 하지만 맘에 들어. 어떻게 설명해야 하찮은 네가 이해할 수 있을까? 그래. 아이야, 산에 올라간 적이 있니?
소요왕령은 이모가 어린 조카를 대하듯 말했다.
“……당연히 있죠.”
운면산맥 기슭에 자리 잡은 울담반의 아이들은 어릴 때부터 울창한 숲을 헤치며 산을 탄다. 안개 낀 계곡, 바위로 길이 끊긴 절벽, 강풍이 몰아치는 산등성이는 시골 아이들에겐 익숙한 장소였다. 하루나 이틀쯤은 혼자 고립되어도 자연스럽게 버틸 수 있었다.
-평지에서는 더워도 산꼭대기에 올라가면 추워서 겨울처럼 옷을 껴입어야 한다는 사실, 너는 아니?
“…….”
단태는 벌컥 화를 낼 뻔했다. 산꼭대기 근처에만 나는 약초를 캐려면 한여름에도 두툼한 가죽 외투를 준비해야 한다. 들판에 꽃이 만발한 늦봄에도 그 높은 곳에는 눈이 내리기도 하니까.
-넌 지금 산꼭대기에 있단다. 발가벗은 채로.
“……무슨 뜻이죠?”
단태는 즉시 거기 숨겨진 무언가가 있음을 느꼈다.
-정상적인 인간이라면, 특히 마법사라면 누구나 올라가고 싶어 하는 꼭대기에 네가 서 있다는 뜻이야. 용의 유산을 받은 자, 수탄왕령과 계약을 맺은 자, 그리고 나 소요왕령이 택한 자. 넌 아무런 노력도 없이, 타인의 도움으로 산꼭대기에 올라간 셈이다. 그러니 모두가 부러워하고 목표로 삼는 여기 꼭대기가 네게 편할 리는 없지. 두툼한 옷을 준비하지 못했으니까. 넌 어리석게도 두꺼운 가죽옷을 찾아서 입기보다 그저 산꼭대기에서 내려가고 싶어 한다. 왜 거기 서 있는지도 모르면서. 웃기지 않니?
“……당신은 내가 왜 꼭대기에 서 있는지 압니까?”
단태는 소요왕령의 말을 무시할 수 없었다.
-멀리 보기 위해서지. 다가오는 적을 일찍 발견하여 막아 내고, 없애 버리기 위해서지.
소요왕령은 묘한 미소를 머금었다.
“만약 내가 스스로 산꼭대기에서 내려간다면 무슨 일이 벌어집니까?”
단태는 소요왕령이 의미 있는 단서를 하나라도 남기기를 바라며 물었다.
-무엇을 생각하든, 그보다 비참한 일이 벌어질 거야.
“……난 믿을 수 없습니다.”
-믿고 말고는 네 자유야. 원하는 대로 해. 하지만 그 선택으로 인한 결과는 네 몫이라는 것만 잊지 않으면 돼.
단태는 다른 세계에서 이곳으로 소환을 통해 나타난 소요왕령에게서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했다. 아니, 한 가지는 알 수 있었다. ‘비참한 일’이 무엇이든 정령과는 관계가 없다. 수탄왕령도 방관자처럼 행동했고, 눈앞에 있는 바람의 정령왕도 마찬가지였다.
“당신이 나라면 어떻게 할 겁니까?”
-재미있는 질문이구나. 난 인간이 아니라서 인간의 사고방식을 이해할 수 없지만, 오랜만에 시도를 해 보지. 내가 너라면 단 한 걸음도 그 꼭대기에서 내려가지 않을 거다. 그 추위에 몸을 적응시키거나 가죽옷을 찾아내어 입겠지. 그건 그릇을 빚는 과정과 흡사해. 한 모금의 물을 담을 잔은 대충대충 만들어도 상관이 없겠지만, 호수를…… 혹은 바다를 담아야 한다면 어떨까?
“바다를 담는 그릇? 그런 건 존재하지 않습니다.”
-안타깝지만 네가 바로 그 그릇이다. 바다처럼 거대한 힘을 담고 있으니까. 결과는 둘 중 하나겠지. 그릇이 깨지거나, 오히려 견고해져서 더 많은 것을 담을 수 있거나. 난 재미있는 구경을 오랫동안 보고 싶다. 행운을 빈다, 인간.
소요왕령은 방을 가득 채운 돌풍과 함께 사라졌다.
지진이라느니, 여관이 무너진다느니 요란을 떨면서 올라온 사람이 없는 걸 보면 소요왕령이 일으킨 바람은 방 내부에만 영향을 미친 모양이었다. 단태는 자신도 모르게 단어 하나를 입 밖에 올렸다.
“적.”
울림이 깊은, 여운이 남는 단어였다. 죽음의 마법사를 대면했을 때 내면에서 솟구쳤던 그 뜨거운 기운 비슷한 무언가가 가슴 안쪽에서 스멀스멀 움직이고 있었다.
길게, 천천히 호흡을 하자 그 기운은 가라앉았다.
적은 존재한다.
그게 누구든, 혹은 어떤 현상이든 간에. 어쩌면 용족을 덮친 저주일지도 모른다.
따라서 지금 상태에 적응해야 한다. 산꼭대기가 춥다면 나무를 모아 불을 피우면 된다. 방법을 찾으면 된다. 방법을 찾기 위해서는 문제부터 정확히 파악해야 하리라.
무엇이 문제일까?
지나치게 탁월한 감각, 판단력 자체가 문제였다.
세상에 완벽함은 존재하지 않는다. 아무리 매끄러운 표면도 확대경을 가져와서 살피면 울퉁불퉁 요철이 드러난다. 자연이 그럴진대, 사람 또한 예외는 아니다. 사람은 서로를 깊이 들여다볼 수 없기에, 대충 보기에, 서로를 받아들일 수 있다.
사람들 중에도 취향이 까다로워서 사사건건 트집을 잡거나 다른 사람에게 잔소리를 해 대는 경우도 있는데, 단태는 상식이라는 선을 훌쩍 뛰어넘어 단숨에 파괴, 살인이라는 극단에 이르렀다.
너무나 쉽게!
너무나 빠르게!
그게 문제였다!
청결한 사람이 얼룩이나 조그만 검댕도 용납하지 못하듯, 단태는 눈에 들어오는 사람들의 결점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바로잡고 싶었다. 그 과정에서 사람들이 희생되어도 어쩔 수 없다는 게 그 판단의 사악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