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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국영을 만나고 싶었다. 명국영이라면 적절한 조언으로 도움을 줄 수 있을 텐데.
단태는 복도로 나가 아래로 향했다. 마침 햇볕 드는 창가에 앉은 류근묵은 책을 읽고 있었다. 석현담과 류근철은 보이지 않았다.
“잠시 앉아도 되겠습니까?”
“……이미 앉았잖소.”
류근묵은 책을 덮었다.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단태는 본론으로 직행했다. 뜸 들일 여유가 그에겐 없었다.
“편히 말씀하시오.”
“어떤 사람에게 꼴 보기 싫은 누군가가 있다고 가정하겠습니다. 단순히 보기 싫은 정도가 아니라, 죽이고 싶을 만큼 그 행태가 역겨운 겁니다. 하지만 그 누군가는 법적으로, 어떤 의미론 도덕적으로도 잘못한 게 없습니다. 어떻게 해야 두 사람이 잘 지낼 수 있을까요?”
그 말을 하면서도 단태는 속에서 샘물처럼 솟아오르는 분노, 살의, 증오를 억눌러야 했다.
이마에 잡힌 주름살은 물론 코에 난 점, 길이가 다른 수염들, 국물이 튄 소맷자락까지 류근묵의 모든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같은 하늘 아래서, 같은 공기를 마신다는 사실이 용납되지 않을 만큼 싫었다.
“……혹시 날 두고 하는 말이오?”
류근묵은 진심이었다. 노골적인 살기가 느껴져 몸은 물론 마음까지 떨렸다.
“그건, 아닙니다.”
어떻게 알았냐고 말할 뻔했다.
겨우 떨림을 가라앉힌 류근묵은 편안한 척했다. 그래야 할 것 같았다.
“간단한 해결책이 있소. 두 번 다시 보지 않으면 그만이오. 같은 공간에 있지 않는다면, 눈에 띄지 않는다면, 아무 문제도 없을 게 아니겠소?”
“같은 공간에 있을 수밖에 없다면요?”
“그런 마음을 억누르지 못한다면, 비극이 일어날 거요.”
이제 류근묵은 단태를 관찰하고 있었다. 왜 갑자기 이런 질문을 하는지, 왜 저토록 진지하면서도 살기등등한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고 싶었다. 흥미롭게 읽던 책 내용은 생각나지도 않았다.
“……어떻게 마음을 억누를 수 있을까요?”
그 질문을 듣는 순간, 류근묵은 백중이라는 인물에게 죽이고픈 사람이 생겼음을 직감했다. 하지만 그게 눈에 띄는 모든 사람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마음은 참 묘한 놈이오. 억누르면 튀어 오르고, 내버려 두면 제 풀이 지쳐 잠잠해지니 말이오. 마음은 참으로 예민한 동물이오. 애완용 동물로 삼았으나 야생의 기질을 고스란히 지니고 있어서 잘 달래 주는 동시에 필요하다면 채찍질도 서슴지 말아야 한다오. 혹시 자식이 있소?”
“……없습니다.”
단태는 류근묵에게 그 고민의 주체가 자신임을 숨기지 않았다.
“안타깝소. 자식이 있다면 마음을 다루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알 수 있고, 어떻게 해야 길들일 수 있는지도 알 텐데. 아무튼, 마음은 평생 데리고 살아야 하는 건방지고 성질 나쁜 아들이오. 하루아침에 해결할 수 없는 문제란 말이오.”
“…….”
그 말을 듣는 순간, 단태는 조급함이 문제를 키운다는 점을 깨달았다. 문제를 확대시켜 불안하게 만드는 것도 그 성급한 마음이었다.
방으로 돌아온 단태는 침대에 걸터앉았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 감각의 그물망에 잡히는 모든 것에 대한 파괴적 충동은 여전히 그를 괴롭혔다.
류근묵의 말이 옳았다. 한 번의 깨달음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한 번의 식사로 허기를 영원히 쫓아 버릴 수 없듯, 이런 충동 또한 주기적으로, 어쩌면 하루에도 수십 번 싸워서 쫓아야 하리라.
그러기 위해서 매 순간 긴장해야 하리라. 긴장을 놓치면…… 끔찍한 일이 벌어질지도 모른다.
그 순간, 머릿속 깊이 새겨진 ≪무무비경≫의 문장이 떠올랐다.
[편지]마음은 ‘불가해’ 앞에서 흔들린다.[편지]
왜 그 문장이 기억났는지는 알 수 없지만, 단태는 저항하지 않고 문장의 의미 속으로 파고들었다.
맞다.
마음은 익숙한 상태, 편안한 조건에서는 평정을 유지한다. 편안하면 골치 아프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의 책은 읽어도 기억에 남지 않는다. 반면에 한 장 넘기기도 힘겨운 난해한 책은 시간과 노력이 들지라도, 때로는 내용 자체를 이해하지 못할지라도 분명한 흔적을 머릿속에 남긴다.
누구나 익숙한 길을 걸을 때 불안해하지 않는다. 사람은 낯설고, 위험을 예상할 수 없는 길을 걸을 때 생각을 거듭한다. 마음은, 생각은 이해할 수 없는, 혹은 이해하기 어려운 무엇 때문에 흔들리는 것이다.
그렇다면 눈에 들어오는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없다는 뜻인가. 왜 그럴까? 감각의 예리함은 이전보다 월등히 좋아졌는데.
구름을 빠져나와 은은한 빛을 뿌리는 달처럼 또 다른 문장이 불쑥 생각났다.
[편지]너를 괴롭히는 마음일수록 너와 가까운 마음이다.[편지]
수십 번을 읽고 곱씹어도 그 의미를 지엽적으로, 표면적으로만 이해할 수 있었던 문장이 전혀 다르게 다가왔다.
의미 없는 무언가로 괴로워하는 사람은 없다. 관계도 없는 사람의 죽음에 대성통곡하는 사람은 미친놈이다. 홍수나 지진도 나와 상관이 없으면 금세 잊힌다. 고민이 깊을수록 나와 관련도 깊다.
누군가를 죽이고픈 충동, 맘에 안 든다고 해서 파괴하려는 마음보다 격렬한 감정은 찾기 어렵다.
그건 갑자기 튀어나온 바퀴벌레에 비명을 지르며 자신도 모르게 구둣발로 짓밟아 죽이는 여인의 반응과 비슷하다. 손등에 앉아 피를 빠는 통통한 모기를 다른 손으로 쳐서 죽이는 행동과도 전혀 관련이 없지는 않을 터였다.
“……내가 소윤이를 바퀴벌레나 모기로 생각했을까?”
말이 안 된다고, 그럴 리는 없다고 단언하고 싶지만, 세상을 속여도 자신은 속일 수가 없었다.
바람의 정령왕과의 계약으로 풍혈지체의 치명적인 부작용으로부터 해방되었지만, 용족의 마음을 얻고 말았을까? 자신을 제외한 다른 존재를 벌레 따위로 여겨 언제든 죽일 수 있게 된 것일까?
아니다. 그런 부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해도,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벌레를 죽이면서 이토록 깊게 고민을 하지는 않는다. 대체 무엇이 더 있을까?
마침내 단태는 진실을 깨달았다.
왜 란조를 죽이려 했는지, 왜 사람들을 파괴하고 싶어 했는지를.
두 개의 마음이 맞서고 있었다.
이전까지는 그래도 인간의 마음이 용의 본능을 억제했지만, 소요왕령과의 계약으로 용의 마음이 강해지는 바람에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인간의 마음은 란조를 사랑하고 아꼈다. 용의 마음은 그 란조에게서 치명적인, 당장 고치지 않으면 안 될 결함을 찾아냈다.
두 마음의 충돌은 예기치 않은 결과를 가져왔다.
사랑이 깊을수록 배신의 상처도 깊다. 마찬가지로 란조를 아끼고 사랑했기에 그 란조에게서 발견한 결함의 충격도 컸다. 용의 관점으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하자였다. 인간의 마음이 가진 애정은 불에 끼얹은 기름처럼 용의 마음에 그득한 분노를 폭발시켰던 것이다.
사랑과 증오의 기괴한 조합.
류근묵의 충고처럼 당장 떠나야 할까? 아끼는 사람일수록 그를 향한 파괴적 충동도 커질 텐데. 강화된 감각은 누구에게서든 죽어 마땅한, 죽여야 할 이유를 찾아낼 터였다.
그때, 세 번째 문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편지]흔들리는 마음 너머로 걸어가라. 거기 네가 있다.[편지]
이번에도 ≪무무비경≫의 문장이었다.
마음 한구석이 시원해졌다. 이유는 알 수가 없었다.
파괴적 충동, 강렬한 살심 너머에 무엇이 있을까? 뼈아픈 후회와 극심한 자책 그리고 절망만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지옥과 같은 삶이 바로 내게 주어진, 허락된 삶이라는 뜻일까?
그 문장이 옳다면, 흔들리는 마음 너머에 ‘내’가 있다면, 지금 여기에는, 즉 흔들리는 마음에는 ‘내’가 없다는 뜻이다. 단태는 그 부분을 놓치지 않았다. 이해하기 어려워 다 그만두고 용혈로 내려가서 고요한 시간을 보내고 싶었지만, 여기서 포기할 만큼 어리석지는 않았다.
나는 어디 있을까?
이런 생각을 하는 나는 누구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