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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질문, 낯설지 않았다. 어릴 때, 가정을 버린 아버지를 원망하면서 자신에게 던진 질문이자, 유천주에게 잡혀간 후에도 입에 올렸던 질문이었다. 문제가 생길 때마다,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는 덫에 걸렸을 때마다 던진 질문이었다.
돌이켜 보면, 그런 질문을 던지면서 문제와 부딪치면서 삶이, 무엇보다 자신이 달라졌다.
아버지에게 책임을 떠넘기고 포기하는 대신, 무능한 어머니 때문이라고 비난하는 대신, 단태는 스스로 움직였고, 그 행동이 문제를 해결하여 뛰어넘는 출발점이 되었다. 마둔수탑에 노예로 팔려갔을 때도, 유천주에게 잡혀 용혈로 끌려갔을 때도 단태는 환경과 조건에 짓눌려 포기하기보다 오히려 이를 악물고 문제로 뛰어들었다.
그래, 꼭대기에서 미련하게 내려갈 수는 없다.
“그건 내가 아니니까.”
그 말을 내뱉는 순간,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실마리가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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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국영은 며칠 동안 자고 먹기를 반복했다. 아레마고가 대가를 치렀지만 수탄왕령의 소환에 명국영 자신의 체력도 일부 필요했던 것이다. 겨우 원기를 회복한 그의 눈에 비친 세상은 이전과 달랐다.
왠지 모르게 촉촉한 느낌이랄까.
딱 꼬집어 말할 수 없는 변화가 구체화된 것은 명국영이 세수를 하려고 대야에 담긴 물에 손을 집어넣었을 때였다. 정확히 말하면 손이 물에 닿기도 전에 물이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부풀어 올라 손을 감싸 버렸다.
눈을 의심한 명국영은 손을 들었다가 다시 대야로 가져갔다. 손이 수면에 가까워지자 물은 둥그스름하게 늘어나더니 포도 알처럼 뭉게뭉게 늘어나 손을 덮었다.
명국영은 뒤로 넘어지고 말았다. 대야가 놓인 탁자의 다리를 차는 바람에 그 안에 담긴 물이 아래로 쏟아졌는데, 크고 작은 과일들이 보이지 않는 실에 매달린 것처럼 공중에 둥실 떠 있었다.
두렵기보다는 신기했다.
명국영은 손을 뻗어 그 투명한 구슬 같은 거대 물방울을 건드렸다. 손가락 끝이 물방울 안으로 불쑥 들어갔는데도, 묵직한 물 덩어리는 깨지지 않았다. 어떻게 공중에 떠 있는지도 궁금했다.
명국영은 물방울을 집어 대야에 담을 수 있었다. 대야에 담긴 물방울은 다시 출렁거리는 액체로 변해 있었다. 혹시나 해서 대야를 쏟았는데, 이번에는 갈라진 마룻바닥으로 물이 스며들었다.
“여관 주인에게 한 소리 듣겠는데.”
대야에 물을 담아서 온 여관 주인은 툴툴거렸지만 명국영이 돈을 건네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가 버렸다.
얼굴과 목, 손을 씻은 후에 수건으로 닦은 명국영은 낡은 침대에 걸터앉아 생각을 정리했다. 아레마고의 문 아래서 유천주를 만난 일은 사실이며, 수탄왕령이라는 물의 정령왕과 이야기를 나눈 것 역시 꿈은 아니었다. 아마도 조금 전 본 그 기이한 현상은…… 정령 때문일 것이다.
여관을 빠져나온 명국영은 녹색의 세상이 이토록 아름다운지 처음 알았다.
세상은 그대로였다.
그의 눈이 달라진 것이다. 눈에 보이는 모든 나뭇잎이 윤기가 흘렀고, 공기 중에도 미세한 물방울이 바람에 따라 이리저리 흔들리며 신비롭게 반짝이고 있었다. 노루 한 마리가 오솔길을 가로질렀는데, 명국영은 그 노루에 깃든 생명력을 느낄 수 있었다. 명국영을 쳐다보며 고개를 갸웃거리던 노루는 깡충깡충 수풀 너머로 사라졌다.
충동적으로 수풀을 헤치고 숲 안으로 들어섰다. 무성한 나뭇잎 사이로 파고드는 햇살이 기다란 빛의 기둥처럼 숲 안쪽을 장식하고 있었다.
졸졸 흐르는 개울물 소리가 정겨웠다.
개울물 옆 바위에 앉은 명국영은 잠시 눈을 감았다. 바람이 잎사귀를 스치며 만들어 내는 소리, 어디선가 지저귀는 새 소리, 벌레들 움직이는 소리 등이 귀로 스며들었다. 오랜만에 여유를 만끽하는 것 같았다.
잠시 후, 이 반가운 여유의 원인을 그는 알아차렸다. 수탄왕령이 한 말 때문이었다. 단태가 살아 있다는 말 때문이었다. 오랫동안 단태를 지켜 주지 못했다는 자책으로 괴로워했다. 그만큼 단태가 무사하다는 말은 그에겐 너무나 필요했던 위로였다.
세상에 홀로 남겨진 쓸쓸하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여유로운 그 분위기를 즐기며 명국영은 ≪지완수≫를 떠올렸다. 천마들을 유타루체로 불러 모은 책이자, 아레마고가 계승자에게 남긴 책이었다. 그 책에는 아메라고의 이야기 외에 단 하나의 마법이 기록되어 있었다.
바로 ‘해령수체’였다.
정령을 특별한 물건에 담는 마법인 봉령수체는 들은 바 있지만, 해령수체는 처음이었다. 몇 번 읽어 암기해 버렸기에 해령수체가 봉령수체의 반대라는 점은 이미 알고 있었다. 물건에 깃든 정령을 풀어 주는 마법이 바로 해령수체였는데, 명국영은 왜 ≪지완수≫에 달랑 이 마법 하나만 기록되어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천마들이 이 사실을 알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길길이 날뛸지도 모른다.
문득, 이 책을 그들에게 보여 주고 싶은…… 짓궂은 생각이 들었다. 거들먹거리고 오만한 그들의 일그러진 얼굴을 보고 싶었던 것이다.
시원한 개울물에 손과 발을 담그고 싶어 구두를 벗었다. 혹시나 싶어 발끝을 흐르는 물 쪽으로 가져간 순간, 돌멩이 사이를 구르며 흘러가던 개울물이 불쑥 발을 덮었다. 발이 놓인 곳만 부풀어 오르며 흘러간 것이다.
조그만 돌에 엉덩이를 깔고 앉아 손과 발을 이용해 개울물을 살폈다. 때로는 물이 손, 발에 반응을 했고, 때로는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점차 그 요령을 터득할 수 있었는데, 한마디로 정신 집중이었다. 다만 책을 읽을 때와 달리 교감을 기초로 하는 집중이라서 한동안 명국영은 엉뚱한 곳에서 헤맸다.
결국 비결을 익힌 명국영은 물을 원하는 대로 움직일 수 있었다. 주먹 크기의 물 덩어리를 손으로 쥐고 들어 올릴 수도 있었고, 길고 납작한 책 형태로 변형시킬 수도 있었다. 물은 가지고 놀기에 멋진 장난감이었다.
멀리서 종소리가 들리자, 명국영은 아쉬움을 뒤로한 채 개울물을 떠나 오솔길로 돌아갔다. 성문이 닫히기 전에 유타루체로 들어가려면 서둘러야 했다. 의외로 숲에서 꽤 시간을 보낸 셈이었다.
“대체 어디 갔었나?”
륜사가 광장 입구 쪽 선착장에 있다가 명국영을 보고 달려왔다.
“……일이 좀 있었네.”
마둔수탑에서 쫓겨나 마음이 상했을 텐데도 사라진 친구를 걱정하고, 기다린 륜사의 행동에 명국영은 감동했다.
“얼마나 걱정했는지 모를 거야.”
“미안하네. 그보다, 할 말이 많아. 조용한 데로 가지.”
“……그래.”
륜사는 근처 잘 아는 주점으로 명국영을 데려갔다.
명국영은 맥주를 한 잔 들이켠 후에 품에서 ≪지완수≫를 꺼내어 륜사에게 보여 주었다. 책을 본 륜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자신도 모르게 주위를 훑은 후에야 륜사는 명국영을 쳐다보았다.
“어떻게 된 건가?”
“유천주를 만났네.”
“…….”
륜사의 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아레마고의 문 아래서. 하마터면 죽을 뻔했네.”
“대, 대체…….”
“일단, 내 말부터 듣게.”
명국영은 유천주를 만난 일, 밤에 자다가 ≪지완수≫가 갑자기 나타난 일, 물의 정령왕 수탄왕령과 계약을 맺은 일, 그리고 물을 움직이는 능력 등에 대해 빠르고 정확하게 설명했다. 이야기를 다 듣고도 륜사는 한동안 입을 열지 못했다.
명국영은 그런 친구를 위해 직접 보여 주었다. 맥주를 허공으로 살짝 띄운 것이다. 륜사가 그 광경을 보고 입을 벌리자, 맥주는 다시 원래 상태로 돌아갔다.
“무엇보다, 단태가 살아 있네.”
“그, 그렇군.”
륜사는 명국영에게 벌어진 일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다. 질긴 고기를 씹는 기분이었다.
명국영은 인내심을 갖고 기다렸다. 사람마다 이해의 속도는 다르다. 자신조차 며칠이나 걸려서야 납득할 수 있었다.
“확실히, 대마법사 자네를 택했군. 마법이라고는 전혀 못하는 자네를 말이야.”
“……그런 셈이지.”
명국영은 륜사의 말투에서 자괴감 비슷한 감정을 읽어냈다. 그럴 만도 했다. 부탑주였다가 마둔수탑에서 쫓겨났으니 친구의 행운을 순수하게 받아들이기 어려울 터였다. 비교는 사람의 마음을 파괴하는 예리한 칼날이니까.
“축하해.”
“고맙네.”
명국영은 륜사가 자기의 처지를 비관하기보다 친구를 찾아온 행운을 함께 기뻐해 주기로 마음먹었음을 깨달았다. 역시 륜사는 사내 중의 사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