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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할 생각인가? 이 책은 위험해. 천마들이 눈에 불을 켜고 찾으니 말이야.”
“그냥 태워 버릴까?”
“……미쳤나?”
륜사는 정색을 했다. 마법사라면 누구도 그런 생각을 하지 않는다. 서생이기에, 마법의 길을 걷지 않았기에 이 귀한 책을 태워 버릴 생각을 한 것이다.
“그건 안 되겠지?”
“아무렴!”
“그러면 자네가 갖고 있게.”
“……내가?”
륜사의 눈빛이 흔들렸다.
“자네도 알다시피, 난 마법엔 문외한이지 않는가? 그러니 자네가 갖고 있게.”
“그, 그렇게 하지.”
≪지완수≫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명국영은 륜사에겐 적절한 자극이 필요함을 잘 알았다. 마둔수탑에서 쫓겨났으니, 당분간 무언가 목표를 갖고 매진할 대상이 있어야 하는데, ≪지완수≫라면 친구의 공허함을 충분히 채워 줄 터였다.
“자네가 깊이 연구해 보고 내게도 알려 주게. 초보자인 내가 이해하게 만들려면 꽤 골치 아플 걸세.”
“하하, 불가능을 가능케 만들어야지.”
륜사는 호탕하게 웃었다. 오랜만에.
≪지완수≫를 륜사에게 맡긴 명국영은 익숙한 영역, 잘할 수 있는 부분에 집중하기로 마음먹었다.
지금 자신이 파고들어야 할 문제는 암탄주의 계략이었다.
*통과
유타루체가 내려다보이는 집무실 창가에 선 누천파는 말할 수 없는 만족감과 더불어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불안감을 느꼈다. 어릴 때부터 꿈꾸던 일을 성공시켰는데, 왜 이리 씁쓸할까? 륜사는 마둔수탑 소속으로 남겠지만 두 번 다시 이 집무실로 돌아오지 못할 터였다. 완벽한 승리인데, 왜 이리 찝찝할까?
정당하지 않은 대결이라서?
방법은 중요하지 않다. 결과가 모든 것을 결정하니까.
거무스름한 책상으로 걸어간 그는 시시각각 색깔이 바뀌는 조그만 돌멩이를 손에 쥐었다.
반지에 저장한 마력이 쉭쉭 소리를 내며 빠져나가자, 주변의 광경이 바뀌었다. 분명히 책상 앞에 서 있는데, 창가에서 도시를 응시하는 또 다른 누천파를 볼 수 있었다. 흑백의 빛바랜 모습이라는 점만 달랐다.
돌멩이를 책상에 놓는 순간, 창가의 누천파도 사라졌다.
누천파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같은 무게의 황금보다 최소 열 배, 아니 백 배 이상 비싸다는 간류석을 입수하려고 들인 거액의 돈을 생각하면 마음 한쪽이 쓰리지만, 시간 마법이라는 매력적인 힘을 떠올리면 돈은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을 터였다.
똑. 똑.
“들어와.”
누천파는 간류석을 주머니에 넣으며 말했다.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여화였다. 보주관 자리에서 물러나지 않았던 것이다. 누천파는 일부러 여화를 보주관으로 삼았다. 마둔수탑의 마법사들에게 신임 부탑주이자 계승자가 얼마나 관대한지 보여 주기 위한 행동이었다.
“유하탑의 계승자께서 도착하셨습니다.”
“들어오라고 해.”
“네, 부탑주님.”
여화는 최대한 속내를 숨겼지만, 눈에 들어간 힘 그리고 비틀린 입매를 드러내고 말았다.
누천파는 개의치 않았다. 저 앙칼진 여자를 볼 때마다 짜릿한 쾌감이 몸을 돌아다녔다. 저 여자가 곁에 없다면 승리에 대한 기쁨이 반감되리라.
동윤이 들어섰다.
“우와.”
감탄이 먼저 터져 나왔다.
누천파는 부드럽게 웃으며 그를 창가로 데려가 광활한 물의 도시를 보여 주었다.
팔마탑의 일원이라고 해도 유하탑은 스러져 가는, 어쩌면 10년 내로 무너지고 말 쇠락한 마탑이었다. 시간 마법이라는 특별한 영역이 아니었다면 유하탑은 오래전에 팔마탑에서 퇴출되고 말았을 것이다.
“부럽다, 부러워.”
동윤은 솔직했다.
“임시 부탑주일 뿐이야.”
누천파는 동윤뿐 아니라 혜금성, 천무휼, 성주명, 묘강적 등 또래의 사람들 앞에서는 진심을 숨겼다. 야심만만한 마법사가 아니라, 겸손하고 언제 어디서든 솔직담백해서 믿을 만한 인물로 자신을 포장했다.
“내가 왜 유하탑에 들어갔을까? 그 늙은이에게 속지만 않았다면, 나도 이런 탑에 들어갔을 텐데.”
동윤은 자주 한탄을 했다. 재능을 타고났기에 다른 마탑에서도 두각을 드러낼 거라는 자신감이 묻어났는데, 누천파는 속으로 ‘웃기는 소리’라고 생각했다. 물론 입에서는 전혀 다른 말이 나왔다.
“그래도 유하탑은 시간 마법을 다루는 유일한 탑이잖아.”
“그건 그래. 날 왜 불렀어?”
“이걸 보여 주려고.”
누천파는 간류석을 꺼냈다.
“아!”
간류석을 보자마자 그게 무엇인지 알아차린 동윤이 입을 쩍 벌렸다.
“우연히 구했어. 너, 가져.”
“……뭐?”
동윤의 눈이 탐욕과 의심으로 번들거렸다. 이 귀한 간류석을 우연히 구했다는 것도 믿을 수 없지만, 가지라니!
“넌 내가 황궁에 머물 때 어색하지 않도록 날 도와줬잖아. 네가 없었다면 거기서 버텨 내지 못했을 거야.”
“아무리 그래도…….”
동윤은 이미 간류석에 마음을 뺏겼다.
“중쾌를 익히는 데 간류석이 꼭 필요하다면서?”
“그건 그래.”
중쾌를 포함하는 쾌둔은 유하탑에 남은 유일한 시간 마법이었다. 간렬풍, 정간방, 탐과여 그리고 월릉 등 다양한 시간 마법이 존재하지만, 익힐 방법은 사라지고 말았다. 유하탑이 힘을 잃어 다른 마탑으로부터 멸시를 받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었다.
“혹시 중쾌 익힐 때 옆에서 봐도 될까? 그냥 궁금해서.”
누천파는 관심 없는 척하며 슬쩍 질문을 던졌다. 간류석이라는 보물을 안겨 주었으니 거절하기 어려운 부탁임을 그는 잘 알았다.
마탑에는 엄격한 내부 규율이 존재한다. 은밀한 지식이 외부로 빠져나가지 않도록 이중, 삼중으로 막는데, 그중 하나가 외부인이 수련 장면을 보지 못하도록 조심하라는 항목이었다.
“……그건 어려워.”
동윤은 유하탑의 계승자였다. 그 점을 모를 리가 없었다.
“아, 미안. 내가 과한 부탁을 했지? 미안하다. 내 말은 잊어버려. 그냥 떠오른 생각이었으니까. 그보다, 열심히 수련해서 다른 마탑 놈들에게 본때를 보여 주자. 어때?”
“고마워. 이해해 줘서.”
“나도 계승자잖아.”
두 사람은 웃었지만 속내는 달랐다.
동윤이 장갑 낀 손으로 간류석을 쥐고 집무실을 나가자, 누천파는 문을 노려봤다. 감히! 저따위 놈이 부탁을 거절하다니! 호흡이 거칠었다. 쫓아가서 패혈운으로 놈을 녹여 버리고 싶었다.
눈을 감고 심호흡을 하던 누천파는 쿵 소리에 번쩍 눈을 떴는데 깜짝 놀라고 말았다. 패혈운이 의자와 책상다리를 녹여 버려 의자, 책상이 한쪽으로 기운 것이다.
급히 패혈운을 거둬들인 순간, 여화가 문을 열고 집무실로 들어왔다.
“무슨 일……이에요?”
“나가.”
“괜찮으십니까?”
“나가라니까!”
여화는 집무실을 나가면서도 부러진 게 아니라 녹아서 짧아진 의자, 책상 다리들을 눈여겨봤다.
누천파는 손을 살폈다.
평범한 반지로 위장한 망려환도, 마력을 저장한 온귀환도 멀쩡한데, 왜 패혈운이 흘러나와 의자, 책상을 건드렸을까? 처음 있는 일이었다. 패혈운이 제멋대로 빠져나오다니. 여화가 그 광경을 봤다면, 당장 죽여야 했으리라. 그랬다면 여화로 인해 수상쩍은 시선이 집무실로 쏟아졌을 것이다.
동윤의 허락을 받지 못했지만, 홀로 중쾌를 익히도록 내버려 둘 마음은 없었다.
보여 주지 않는다?
훔쳐보면 그만이다.
이 모든 게 만기누간환을 찾아내지 못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망려환을 통해 얻은 죽음의 마법은 단숨에 용마의 경지에 다다르게 했지만, 그 부작용은 만만찮았다. 마법으로 외모를 유지하고 있지만 곧 한계에 봉착할 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