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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20대 중반인데, 외모를 숨기기 위해 펼친 마법을 해제한다면 머리가 일부 벗겨진 50대의 남자가 드러날 것이다.
후회하지는 않았다.
다시 한 번 망려환을 골동품 가게에서 찾아낸 순간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같은 선택을 했으리라.
흑사마 고육은 용령제국의 건국 이전에 활약했던 유하탑의 탑주이자 유하탑이 배출한 천마 위슬란의 반지를 찾아 헤맸다. 고육 역시 급속한 노화라는 부작용에서 벗어나려고 애를 썼던 것이다.
위슬란이 제작한 만기누간환은 시간의 흐름을 느리게 만든다고 알려져 있었다. 평범한 사람이 그 반지를 끼면 시간은 느려지되 생명력이 고갈되어 죽어 버리는데, 충분한 마력을 사용할 수 있는 마법사만이 만기누간환의 주인이 될 수 있었다.
한숨을 내쉰 누천파는 신경질 내듯 이름을 불렀다.
“폐신단령.”
곧 흐릿한 그림자가 나타났다. 형체는 없이 그림자만 가진 그 존재는 죽음의 정령 폐신단령이었다.
“동윤을 따라가서 뭘 하는지 지켜봐.”
그림자는 열린 창문으로 빠져나갔다.
망려환 덕분에 누천파는 폐신단령이 어디에 있는지, 무엇을 보는지 알 수 있었다. 폐신단령이 보는 것을 볼 수 있고, 듣는 것을 들을 수 있었던 것이다. 폐신단령은 오랜만에 소환되어서인지 젊고 싱싱한 인간들 사이를 스치듯 지나며 생명력을 마셨다. 폐신단령에 닿는 사람은 오싹한 한기를 느낄 뿐이겠지만.
“신이 났군.”
누천파는 집무실 밖으로 나갔다. 마탑회 총회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유타루체에 자리 잡은 마탑의 조합이라 할 수 있는 마탑회를 꽉 틀어쥔다면 시청, 11인위원회와의 경쟁에서 한발 앞서 나갈 수 있을 터였다. 무엇보다 당가의 움직임을 파악할 수 있다고 그는 확신했다.
부탑주에게 주어진 중마선에 올라탄 누천파는 원기 회복을 위해 오늘 밤, 사냥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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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국영은 광장 끝자락에 서서 멀어져 가는 중마선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교한 계획으로 륜사를 밀어낸 누천파는 중마선 선수에서 바람을 마주 보고 있었다. 마둔수탑의 계승자이자 임시 부탑주, 그리고 암탄주의 유산을 이은 자. 암탄주는 인간을 파멸로 밀어 넣기 위해 유산을 남겼다.
그렇다면……?
명국영은 거칠거칠한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앞이 캄캄했다.
처음 본 순간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악의 구렁텅이로 추락해야 마땅한 아이는 아니었건만. 스스로 그 길을 택했을까? 아니면 암탄주가 남긴 유산이 그를 파멸의 길로 들어서게 했을까?
하층민의 거주 지역에서 벌어진 연쇄살인은 누천파의 솜씨였다. 죽음의 마법사를 따로 고용할 리는 없다. 십중팔구 탑주 누마탄조차 아들의 타락을 알지 못하리라.
어떻게 해야 할까?
진실을 밝혀야 하나?
명국영은 광장 중앙에 자리 잡은 분수대로 걸어갔다. 비둘기가 삼삼오오 모여 있는 곳을 바라보며 기다란 의자에 앉은 그는 진실이 드러날 경우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상상했다.
마둔수탑은…… 당장 팔마탑에서 쫓겨날 테고, 누마탄은 모욕과 수치를 당하며 수도를 떠나 이곳으로 돌아올 터였다. 마둔수탑의 위상은 산산조각이 나고 말 것이다. 용령제국의 개국 이래로 탑주를 배출한 누가는 그 특권을 빼앗길지도 모른다.
탑주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경쟁이 벌어져, 끔찍한 유혈 사태가 일어난다면…… 누가 이길까?
“당가겠지.”
명국영은 당가에 유리한 현재 상황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가가 마둔수탑을 차지한다면, 도시의 시장 자리 역시 그 가문의 몫이 될 가능성이 높아질 것이다.
답답한 나머지 륜사를 찾아가고 싶지만, 대책 없이 알렸다가는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지를 수도 있음을 그는 잘 알았다. 륜사는 강력한 추진력이 있는 반면, 제동 장치가 약했다. 한번 움직이면 모든 것을 쓸어버리고 말 터였다.
바둑이라는 기기묘묘한 놀이가 떠올랐다.
복잡해서 머리를 굴려도 다음 수를 예측할 수 없는 그 놀이에 푹 빠졌던 시절이 있었다. 바둑의 즐거움은 예측 불가능함에 있었다. 파고들어도 끝을 보여 주지 않는 광활함은 기가 질리기도 하지만, 그만큼 탐험할 수 있는 세계가 크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가끔은 너무나 복잡해서 머리가 지끈지끈 아팠다. 선명하면서도 모호하고, 형세가 결정적이면서도 비등비등해서 도무지 돌을 놓을 방법을 모를 때, 판을 엎고 싶기도 했다.
지금이 딱 그런 상황이었다.
도시는 거대한 바둑판이었고, 시청과 11인위원회, 마둔수탑 그리고 각종 조직은 바둑판에 놓인 돌이었다. 위치에 따라 역할과 중요성이 결정되는 바둑의 특성상, 전체를 들여다보지 않으면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 수가 없다. 바둑판과 달리, 도시는 그 속살을 들여다보기 어렵다는 점도 문제였다.
“파고드는 수밖에.”
주머니에서 패를 꺼냈다. 금색으로 반짝이는 황정어패는 황제가 부여한 권위 이상으로 빛나고 있었다.
마둔수탑에서 시작하되, 제국 전역을 파악해야 하리라.
암탄주가 인간 전체를 파멸로 몰고 가려 했다면, 그 징조가 어딘가에서 시작될 것이다. 어떤 재앙이든 미리 안다면 대처할 법도 찾을 수 있다. 그러니 저주에 걸려 죽어 버린 용 따위의 협박을 무서워하는 대신, 누천파와 반우현을 살피며 어디에서 재앙이 시작될지 알아내야 하리라.
수탄왕령을 불러내고 싶은 마음이 일었다. 물의 정령왕이라면 그 답을 알고 있을 테니까. 하지만 이미 하나의 질문을 써 버린 명국영은 좀 더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이번에도 받아들이기 힘든 답을 내놓을지도 몰랐다.
“내가 이미 단태를 만났다니…….”
명국영은 시법원으로 향했다. 재판 관련 기록을 들여다보면 단태를 자유롭게 해 줄 무언가를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또한 시법원의 기록을 통하여 도시의 상황, 제국의 형편을 깊이 알 수도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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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살 속에서 춤추던 먼지 알갱이가 얼어붙었다. 이어서 창밖에서 들려오는 크고 작은 소리가 뚝 끊겼다. 갑작스러운 고요에 마음이 덜컥 내려앉았다. 익숙한 운하의 악취와 입맛을 자극하는 고기 굽는 냄새도 사라졌다.
보이지 않는 거대한 손이 몸을 움켜잡은 것처럼, 단태는 꼼짝도 할 수 없었다.
‘하둔이 펼쳐졌어!’
먼지는 천천히, 미세하게 요동쳤다. 소리도…… 길고 단조롭게 들렸다. 냄새는 금세 익숙해져서 더 이상 특별하지 않았다. 투명한 감옥에 갇혀 느려진 바깥세상을 바라보는 것만 같았다.
그 순간, 심장이 터질 듯 아팠다.
단태는 마력을 끊는 순간, ≪천간론≫에서 배운 마법 하둔은 즉시 풀렸다. 추온벽, 회모방 등 마둔수탑이 자랑하는 고급 마법을 펼쳐도 끄떡 않던 용의 심장은 하둔을 펼치자마자 마력이 고갈되고 말았다.
어딘가에 문제가 있으리라.
하둔이 펼쳐져 시간이 느려진 경험 때문에 단태는 흥분했다. 문제 해결은 그다음이었다.
세상이 멈췄다. 실상은 그 반대지만.
선 자세로 하둔을 펼친 단태는 쓰러진 채 숨을 헐떡거렸다. 하마터면 죽을 뻔했다. 조금이라도 늦게 마력을 중단시켰다면…… 싸늘한 시체로 변하고 말았을 것이다. ≪천간론≫을 기록한 장철상의 경고를 무시한 대가로.
한참 만에 몸을 일으켜 앉았는데도 호흡이 가빴다. 몸은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고, 마룻바닥에는 피가 고여 있었다. 코피가 흘러내린 것이다.
장철상이 왜 죽을 각오로 덤벼들어도 시간 마법은 익히기 힘들다고 말했는지, 왜 시간 마법에 손을 댄 자들 중 대다수가 죽거나 반신불수가 되는지 알 것 같았다. 그래도 포기할 수는 없다.
현재로선 시간 마법만이 그 파괴적 충동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인식하기도 전에 결정을 내리고 움직이는 기괴한, 설명 불가능한 충동 자체를 없앨 수 없다면, 그 충동이 몸을 움직이기 전에 충동과 싸워서 이길 시간을 확보해야 하리라.
쾌둔은 시간을 느리게, 혹은 빠르게 만든다.
원한다면 세계 전체의 시간 흐름까지 조작할 수 있는데, 문제는 필요한 마력의 양이었다. 장철상은 팔마탑이 일 년 동안 소비하는 마력석을 다 동원한다면 세계의 시간을 멈출 수 있지만, 너무나 짧아서 누구도 시간이 멈췄는지 알아차리지 못할 거라고 단언했다.
그 때문에 장철상은 좁은 영역을 다루는 쾌둔에 집중했고, 그 결과 여러 종류의 시간 마법이 탄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