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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히려 주어진 시간이 길수록 이 상태에 적응하는 데 유리하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은 곧 오판으로 드러났다.
누워서 꼼짝도 못한 채 열흘이나 긴 시간을 보내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상체를 일으키는 데 보름이 필요했다.
지하 감옥보다 더 답답한 시간 감옥, 미칠 것 같았다.
유천주의 목에 달린, 그 뼈로 제작된 우리에 갇혔을 때보다 더 괴로웠다. 더군다나 하둔은 스스로 만든 시간의 감옥이었다. 벌써 두 달이나 밤이 지속되었다. 앞으로 몇 달이 흘러야 몸을 제대로 움직일 수 있을지 짐작조차 어려웠다.
‘조바심을 버리자. 천천히 생각해야 돼…….’
단태는 눈을 감고 조급함에서 벗어나려 애를 썼지만 제대로 먹히지 않자, 방법을 바꾸었다.
≪무무비경≫을 떠올려 찬찬히 그 의미를 살폈고, ≪천간론≫을 비롯해 마간에서 읽은 까다로운 마법서의 내용을 곱씹었다. 성급한 태도를 버린 후에야 몸을 조금씩 움직였다. 생각보다 천천히 움직이는, 때로는 아예 움직이지 않는 듯한 몸에 짜증이 나 화를 내지 않으려고 조심했다.
먹지도, 자지도 않고 그 오랜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게 어딘지 현실적이지 않았다. 꿈을 꾸는 것 같았다.
질릴 정도로 긴 꿈이랄까.
이런 상태에 조금씩 익숙해졌다. 가끔 외롭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가 서 있는 여관에 류씨 삼형제, 푸근한 여관 주인과 소윤, 석현담이 함께 있다는 명백한 사실을 떠올리면 우울한 기분은 잦아들었다.
가끔, 단태는 용족 특유의 기억력을 이용해 즐거웠던 과거의 시점으로 돌아갔다.
엄마와 여동생을 즐거운 기분으로 만났으며, 의외로 체구가 크지 않은 아버지를 다른 관점으로 살펴볼 수 있었다. 노예상인 도양, 똑 부러진 성격의 소유자 위연미, 늙은 마법사 엄포윤, 천재 마법사 륜사와 그 수련사 여화, 누구보다 명석한 명국영 그리고 유천주까지도 얼마든지 볼 수 있었다.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는 이 고요한 시간을 통해 단태는 내면에 쌓인 여러 종류의 찌꺼기를 치웠다. 불쑥불쑥 찾아와 평정을 깨뜨리는 예리한 충동과 씨름을 했고, 앞으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한 고민에 시간을 썼다. 거기에 집중하자 시간의 흐름에 초연해질 수 있었다.
그가 느끼기에 반년이 지난 후에야 몸을 일으켜 세울 수 있었다.
일 년이 지날 무렵에는 걸을 수 있었다.
신이 나서 환호했는데, 원하는 만큼 빠르게 몸이 따라 주지 않는다는 이유로 화를 내는 바람에 마룻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웃긴 건, 갑자기 늘어난 마력의 양 때문인지 쓰러지는 데 세 시간이나 걸렸다.
드디어 단태는 몸의 시간에 적응했고, 마력의 흐름을 통제할 수 있었다. 당장 마력을 중단하면 하둔은 풀릴 터였다.
즉시 마법에서 빠져나오는 대신, 단태는 하둔에 투입되는 마력을 서서히 줄였다. 다양한 시간의 속도에 적응하기 위해서였다. 혼자만의 시간에 갇혀 몇 년은 지난 느낌이지만, 외부 기준으로는 하룻밤도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기에 단태는 여유를 부릴 수 있었다.
조금씩 시간의 흐름이 몸으로, 마음으로 느껴졌다. 능숙한 뱃사람이 파도의 높이와 빠르기에 맞춰 배를 몰 듯, 단태도 시간의 흐름에 맞게 몸을 움직일 수 있었다.
푸르스름한 빛이 창가로 들어오고, 새벽닭이 울었다. 지나치게 오랫동안 우는 닭 울음에 단태는 목이 상하지는 않을까 생각하며 속으로 웃었다. 물론 닭 입장에서는 그런 염려를 이해할 수 없겠지만.
햇살이 창을 넘어 맞은편 벽을 수놓는 순간, 단태는 하둔을 풀었다. 외부 시간의 흐름이 파도처럼 몰려와 몸을 미는 것만 같았다. 지나치게 빠른 그 시간의 속도에 덜컥 겁이 났지만 곧 평정심을 되찾았다.
“당분간은…… 계속 하둔을 펼친 채로 지내야겠어.”
단태는 하룻밤 만에 익힌, 어쩌면 몇 년이나 애를 써서 그 뜻을 터득한 마법을 펼쳤다. 보이지 않는 시간의 파도가 몰려왔다. 곧 그는 느려터진 몸을 이끌고 복도로 나갔다. 아직 적응해야 할 게 많았다.
쿵.
익숙지 않은 계단에서 굴러떨어졌지만, 기분이 이상했다. 우당탕 소리는 천둥 같지만 천천히 들려서 익숙해졌고, 뒹구는 몸에 따라 시야에 들어왔다가 사라지는 사람들의 시선도 오랫동안 볼 수 있어서 창피하지도 않았다.
무엇보다 낡은 계단을 향한 불만에서 시작된 파괴적 충동은 잔잔한 호수에 던진 돌멩이처럼 간단히 가라앉았다. 충동은 순간적으로 치솟는 격렬한 자극이어서 여유롭게 생각할 수 있는 시간 앞에서는 맥을 추지 못했다.
계단을 뒹군 단태는 몸이 일 층 바닥에 떨어지기 전에 그 충동이 어떻게 시작되는지, 왜 강렬하고 파괴적인 감정으로 발전하는지 알 수 있었다. 하둔을 펼치기 전에는 워낙 빨리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려 몰랐던 진실이 드러났다.
음식이 담긴 접시를 손에 들고 단태를 쳐다보는 여관 주인을 처음 본 순간, 내면 깊숙한 곳에서 추운 겨울날 어린 단태에게 욕을 퍼붓고 찬물을 뿌린 마을 아주머니가 떠올랐다. 단태뿐 아니라 아이들이라면 치를 떠는 그 아주머니에 대한 기억에 이어, 온갖 쓰린 경험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당시 단태는 힘이 주어진다면 반드시 복수하겠다고 중얼거렸다. 누가 봐도 억울한 경험, 스스로 다짐한 맹세 그리고 이제야 주어진 힘은 산사태를 일으킨 조그만 돌멩이들이었다.
돌멩이가 굴러떨어지며 주위의 바위를 무너뜨리듯, 그 쓰라린 기억과 맹세가 지금 가진 힘을 만나 감정의 산사태를 일으킨 것이다.
하둔을 통해 살필 여유를 갖지 않았다면, 알아내지 못할 그 충동의 생성 과정을 파악한 단태는 여관 주인을 향한 증오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리고 소요왕령과의 계약으로 내면의 속도, 즉 생각의 속도가 지나치게 빨라져 그런 충동에 사로잡혔다는 사실도 알아차렸다. 왜 죽이고 싶은지 모르면서 그런 충동에 휘둘린 건, 강화된 내면의 힘 때문이었다.
일 층 마룻바닥에 떨어진 후에야 단태는 입을 벌리고 감탄사를 내뱉었다.
“아!”
탄성이라고 하기엔 짧은 소리.
근거는 없지만, 용은 늘 이런 식으로 생각할 것 같았다.
용의 심장을 하나만 가져도 내면의 힘 때문에 이런 충동에 휩싸이는데, 두 개의 심장을 고스란히 지닌 용은 월등히 빠른 속도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결정할 것이다. 그렇다면 용은 선천적으로 내부의 속도와 외부의 속도를 조화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가졌을까?
단태는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여관 주인이 괜찮냐고 물었다. 느리게. 하품이 나올 만큼 천천히.
투령수, 훤편, 담검 등 마둔수탑이 자랑하는 기본 마법의 구조와 발출 과정을 생각하니, 질문이 끝날 때까지 그리 지루하지 않았다.
단태는 여관 주인에게 괜찮다고, 그저 딴생각하면서 내려오느라 발을 헛디뎠다고 말했다.
엄격히 표현하면, 몸…… 특히 입이 그런 말을 하도록 지시를 내린 다음, 단태는 다른 생각에 빠져들었다. 입이 오랫동안 그 말을 전할 테니, 시간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생각할 거리는 무궁무진했다.
≪무무비경≫은 파고들수록 끝이 멀어지는 책이었고, ≪천간론≫도 꽤 흥미로웠다. 도안집의 ≪역사≫, 장투의 ≪정전서≫, 방전직의 ≪법술서≫, 탄수의 ≪복합화서≫ 등 각종 고전서뿐 아니라 단태가 그동안 읽어서 이해보다는 암기에 치중한 마법서들은 무료한 시간을 보내는 데 좋은 친구였다.
천천히 몸을 일으킨 단태는 이쪽을 쳐다보는 사람에게로 향했다. 석현담은 일어서려다 단태의 손짓에 다시 앉았다.
“……주군, 괜찮으십니까?”
“당……연……히 괜……찮지.”
뚝뚝 끊어지는 목소리는 전혀 괜찮지 않았지만, 단태는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때, 단태는 석현담이 어디까지 알고 있는지, 무엇을 모르는지 알아차렸다. 마치 석현담의 내면을 직접 들여다보는 것처럼 명백해서 근거를 찾을 필요도 없는 깨달음이었다.
단태가 석현담의 삶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 것에 반해, 석현담은 단태에게 격렬한 영향력을 끼친 유천주의 존재를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저 단태가 운 좋게 은거한 실력자를 만났다고 생각할 뿐이었다.
결존계의 영향은 쌍방이되, 그 강도는 다른 모양이었다. 석현담은 단태에게 괴팍한 스승들이 있다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유천주가 내키는 대로 몸을 바꾼 노인, 중년 남자, 젊은 여자의 모습이 석현담에게는 그런 식으로 전달된 모양이었다.
“어제부터 이상하십니다.”
석현담은 단태의 얼굴 곳곳에 든 멍을 쳐다보고 있었다.
“사소한 문제는 해결됐으니, 본격적으로 움직여야지. 그 전에 할 일이 있어서. 나중에 보자.”
단태는 여관 밖으로 나갔다. 란조는 보이지 않았다. 근처에서 지켜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틀렸다.
영영 사라졌을까?
아직 걷는 모양새가 어색했지만 단태는 한시라도 빨리 란조를 되찾고 싶어서 동쪽 성문으로 서둘렀다. 줄을 서서 기다리는 내내 란조가 성벽 너머로 날아올지 몰라 하늘을 두리번거렸다.
쌍둥이 탑 아래에 있는 성문은 좁고 긴 동굴의 입구 같았지만, 다들 익숙해서 날씨나 소문 등 적당한 대화를 주고받으며 자신의 차례를 기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