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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문 위쪽에 커다란 자동 시계가 달려 있어 정각이 되면 종을 치는데, 약속 시간이 있는 상인과 달리 대부분 농부들이어서 서두르는 기색은 느껴지지 않았다.
단태는 새치기를 해서라도 빨리 성문 밖으로 나가고 싶었다. 란조가 더 멀리 가 버리기 전에 찾아야 한다는 결론에 이른 그는 줄에서 빠져나와 성벽으로 오르는 계단 쪽으로 달렸다. 늘어지게 하품을 하던 병사가 그를 발견했지만, 이미 중간을 넘어 성벽 꼭대기에 다다랐다.
“당신, 뭐야?”
그 병사가 소리쳤다.
소달구지 옆에 서 있는 농부가 성벽을 올려다보자 뒤에 있는 사람들도 일제히 고개를 들어 무슨 일인가 살폈다.
그때, 단태는 난간 너머로 몸을 날렸다.
“아…….”
사람들은 안타까운 탄식에 이어 젊은 남자가 왜 자살하는지 모르겠다는 둥 여자가 배신해서 그렇다는 둥 나름대로 이유를 찾아내면서 다시 일상으로 돌아갔다. 시체 처리는 성벽에서 근무하는 병사들의 몫이니 신경 쓸 필요가 없다는 투였다.
풍갑을 발 아래로 집중시켜 충격을 줄인 단태는 성벽에서 추락한 사람이 멀쩡하다는 사실에 놀라 눈이 커진 채로 얼어 버린 사람들을 무시하고 울창한 숲으로 달렸다.
점점 더 따가워지는 햇빛도 파고들기 어려운 깊은 곳에 이르자 다양한 새소리가 사방에서 들렸지만, 란조는 거기 없었다.
“비천단령.”
단태는 바람의 정령을 불렀다. 미풍이 나뭇잎을 흔드는 순간, 급한 마음에 또다시 비천단령을 소환했다. 분간하기 어려운 바람의 정령이 둘이나 나타났다.
그 순간, 단태는 한꺼번에 여러 정령을 소환할 수 있음을 깨달았다.
바람의 정령을 셋이나 불러낸 단태는 란조를 찾으라고 지시했다. 비천단령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나뭇잎을 흔들며 수풀 너머로 사라지자 단태도 란조를 부르며 돌아다녔다.
“란조!”
제법 물살이 빠른 개울을 뛰어넘다가 발이 걸려 물에 처박혔다. 아직 몸을 제대로 다루지 못해서였다.
가시덤불을 뚫고 언덕 위로도 올라가 란조를 불렀다.
노루 한 마리가 단태를 보더니 귀를 쫑긋 세웠다. 잠시 후, 노루는 시야 밖으로 달아나 버렸다.
지쳐서 나무 그늘에 주저앉은 단태에게로 돌아온 비천단령들은 란조의 흔적도 찾지 못했다. 비천단령을 돌려보낸 그는 손가락으로 땅바닥을 긁었다.
화가 나서 참기가 어려웠다. 란조를 이대로 잃어버리고 싶지 않은데. 잡초를 뜯다 못해 나무뿌리가 드러나도록 땅을 깊이 한 후에야 멈췄다.
부러진 손톱 사이로 핏방울이 맺혀 있었다. 란조가 여기 있다면, 엄마의 죽음을 알게 됐을 때처럼 노래를 불러 상처를 치료했을 텐데.
“아! 그거야!”
단태는 기억을 더듬었다.
용족처럼 선명한 기억력을 가진 그는 금세 란조의 노랫소리를 찾아냈다. 인간의 성대로 새 울음을 흉내 내기가 쉽지 않았지만, 근처에서 가장 높은 나무 꼭대기로 올라가 녹색으로 펼쳐진 사방을 향해 그 노래를 불렀다. 란조에 비한다면 투박하고 무식한 소리지만, 단태는 최선을 다했다.
목이 쉴 때까지 노래를 불렀지만 란조는 돌아오지 않았다. 미끄러지듯 내려와 밑동에 기대고 앉았다. 날은 서서히 저물고 있었다.
눈물 한 방울이 또르르 땀이 남긴 소금기를 가르며 뺨을 타고 내려왔다. 란조가 보고 싶었다. 그만큼 란조를 쫓아 버린 자신이 싫었다. 아끼는, 사랑하는 사람을 언젠가 쫓아 버릴지도 모르는 자신이 역겨웠다. 하둔으로 파괴적인 충동을 억제할 수 있다고 해도, 또 다른 이유로 설희를 아프게 할지도 모른다.
“단 한 번이라도 볼 수 있다면…….”
그 마음을 담아서 흥얼거렸다.
아름다운 란조의 노래와 달랐으나, 진심이 그 자신도 모르게 흘러나온 마력과 결합하는 순간, 신비한 마법이 펼쳐졌다. 음마성 율암이 자랑하는, 은후성탑이 보유한 소리 마법이 아니었다.
아레마고가 알려 주었으나 단태가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던 언마였다. 의지가 깃든 말이 그대로 이루어진 것이다.
탁한 목소리는 멀리 가지 못했지만 마음과 마력이 빚어 낸 기이한 공명은 숲을 너머 란조를 향해 날아갔다. 사방으로 퍼지며 약해지는 평범한 소리와 달리, 그 떨림은 오직 란조가 있는 곳으로 똑바로 뻗어 나갔다.
마침내 공기의 울림은 운면산맥 기슭에서 휴식을 취하며 다음 날 일찍 계림으로 넘어가려는 란조에게 이르렀다.
나뭇가지를 박차고 뛰어오른 란조는 있는 힘껏 물의 도시로 날았다. 그 소리에 깃든 마력이 란조에게 힘을 주었다. 점점 속도가 빨라졌다. 보이지 않는 끈이 란조를 묶어 단태에게로 끌어당기는 것만 같았다.
구름이 휘영청 밝은 달을 잠시 가린 순간, 란조는 기적이 일어난 곳, 마법이 펼쳐진 곳에 도착했다.
나무에 기댄 채, 단태는 아직도 중얼거리고 있었다.
단태 주위를 맴돈 란조는 어깨에 내려앉았다.
소리가 뚝 끊겼다.
구름 밖으로 나온 달빛 아래 란조가 보였다. 처음엔 꿈인 줄 알았다. 그 미묘한 무게감이 느껴지지 않았다면 무시했을지도 몰랐다.
“……란조, 너 맞지?”
“단태, 단태, 단태.”
“고맙다, 돌아와 줘서.”
“단태가 란조를 불렀다. 단태가 란조를 불렀다.”
“그래, 내가 불렀어.”
단태는 혹시라도 란조가 날아가 버릴까 두려워 천천히 손을 뻗었다. 손가락 끝이 란조의 목에 닿는 순간, 감격으로 가슴이 벅찼다. 멍청하게도 잃은 후에야 그 가치를 알아차린 것이다.
“단태는 단태다.”
란조의 말, 단태에게 ‘시험 통과’라는 말처럼 들렸다.
눈물이 핑 돌았다.
*황제의 여자
곧 은밀히 출발할 원정대 업무만 해도 머리가 터져 나갈 지경인데, 제 앞가림도 못하는 애송이를 찾아 달라는 요청에 반우현은 기가 막혔다. 그러나 상대는 백율가의 장로였다. 방단의 수장을 괴롭히기 위해 가문의 수치를 무릅쓸 사람은 아니었다.
백율모가 말했다.
“백율운현에 이어 소가주까지 사라졌소. 도시 전역을 뒤졌소만 흔적조차 발견하지 못했소. 백율가의 인맥을 총동원해도 말이오.”
“……그렇습니까?”
반우현도 즉시 사태의 심각성을 알아차렸다.
혹시 당가가 백율가를 견제하기 위해 이런 짓을 꾸몄을까? 그럴 리는 없다. 현재 백율가는 당가를 노골적으로 지지하지는 않더라도, 당가에 힘을 실어 주고 있다. 만약 진실이 드러난다면 백율가는 복수심에 사로잡혀 당가를 무너뜨리기 위해 총력을 다할 것이다.
그때, 명문소가 단장실로 들어섰다. 백율모를 본 그는 씁쓸하게 웃으며 빈자리에 앉았다.
“종태도 사라졌네.”
“……명가의 소가주까지?”
백율모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반우현도 마찬가지였다.
백율운현에 이어 두 가문의 소가주까지 실종되다니, 전대미문의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당가는 아니다! 아무리 당현추의 간이 배 밖에 나와도 이런 짓은 하지 않을 사람이다.
그러면 대체 누가?
또 다른 인물이 단장실로 찾아왔다.
유가의 장로 유성찬이었다. 그가 온 이유도 소가주의 실종이었다. 어젯밤, 소가주 유무영이 사라지는 바람에 가문이 발칵 뒤집혔지만 아직까지 찾지 못했고, 백율가의 상황을 알았기에 유가의 가주 유마찬은 신뢰하는 동생이자 가문의 장로인 유성찬을 보낸 것이다.
“소문이 나면 곤란합니다.”
명문소가 말하자, 백율모와 유성찬이 고개를 끄덕였다. 11인위원회는 도시를 운영하는 실질적인 권력이자, 상징적인 조직이었다. 11명이 도시를 지배하는 게 아니라, 11개의 가문이 도시의 지배층이었기 때문이다. 만약 소가주들이 실종되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도시는 뿌리부터 흔들릴 것이다.
“알겠습니다.”
그들을 돌려보낸 반우현은 원정대 관련 서류를 옆으로 밀었다. 그 일도 중요하지만, 실종 사건도 무시할 수는 없다.
대체 누가 이런 짓을 시작했을까? 유타루체에 이런 일을 할 만한 조직이 있을까? 혹시 추명이? 아니다. 추명은 와해 직전이라는 사실을 방단의 보고서를 통해 그녀는 알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11개의 가문 외에는 은밀히 소가주를 납치할 수 있는 조직은 없었다. 그렇다면 역시 당가의 짓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