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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우현은 중앙탑이 무너진 시청이 아니라, 임시로 자리를 잡은 건물 밖으로 나와 마둔수탑으로 향했다.
오랜만에 만난 누천파에게서 낯선 느낌을 받았다. 분명히 누천파인데, 누천파 같지 않은 느낌이랄까. 눈빛이 탁했고, 피부는 꺼칠꺼칠했으며, 목소리가 묘하게 거슬렸다. 설희의 사촌이라는 사내가 당가와 직접적 관련은 없다는 누천파의 설명이 끝나자, 반우현은 누천파에게서 받은 이상한 인상을 한쪽으로 밀어 버렸다. 느낌에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백율청현, 명종태, 유무영이 실종됐어.”
“…….”
누천파의 눈썹 끝이 위로 치솟는 순간, 이마에 주름이 졌다.
반우현은 못 본 사이 누천파가 늙었다고 생각했다. 드러내지 않은, 표현할 수 없는 심적 부담이 큰 모양이었다.
“뭔가 있어. 백율가, 명가, 유가가 은밀히 사람을 풀었는데도 소가주의 흔적조차 찾지 못한 모양이야. 방단으로 찾아왔거든.”
“심각한데.”
명문가 특유의 자존심은 내부 사정을 밖으로 알리지 않게 만든다. 그 불문율을 깨뜨렸다면, 그만큼 급박하거나 실마리조차 없다는 뜻이다.
“어떻게 해야 할까?”
반우현은 누천파라면 새로운 관점에서 실종 사건을 보지 않을까 기대했다. 도시의 계승자와 마탑의 계승자는 속한 세계가 다르다. 반우현이 정치가 주를 이루는 세상에서 호흡한다면, 누천파의 세계에서 중요한 덕목은 마법이었다.
“아무것도 하지 마.”
“……뭐?”
“오히려 잘된 일이야. 실종된 녀석들에겐 조금 미안하지만. 소가주를 잃은 가문들은 전력을 다해 소가주를 찾으려고 애를 쓸 테니 우리가 걱정할 일은 아니야. 무엇보다 그 일로 당가와의 협력 관계에 힘을 실어 주지 못할 테니, 너에겐 좋은 일이잖아. 당현추도 이런 상황에서 무모한 일을 벌이진 않겠지. 손 놓고 있는 게 곤란하다면, 바삐 움직이는 척해도 좋아. 그게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
“하긴.”
반우현은 속으로 웃었다. 역시 누천파였다. 이번엔 한 수 배웠다. 색다른 관점은 그 자체로 무기가 될 수 있다.
“천마들을 잘 지켜봐.”
“천마들?”
“요즘 모이는 횟수가 늘었어. 왜 모였는지, 어떤 이야기가 오갔는지 알아낼 방법이 없어. 그들은 천마니까. 어설프게 접근했다가는 모가지가 달아날걸. 그들이 하나의 목적을 가지고 있다는 점은 분명해. 그 목적이 무엇인지 모른다는 게 너의 문제겠지.”
누천파는 지나치게 가르치는 투로 말했다. 어떻게 도시의 계승자가 이런 점을 간과할 수 있느냐고 따지는 것처럼 반우현에게 들렸던 것이다. 실제 그런 뜻이 아니었다고 해도 반우현은 즉각 반응했다.
“충고 고마워.”
싸늘한 목소리에 담긴 미묘한 변화를 누천파는 감지하지 못했다.
“이 정도로 뭘.”
“아, 생각났다. 얼마 전에 보고를 받았는데, 명국영이 문서고에서 아예 산다는 내용이었어.”
“명국영……?”
누천파의 눈이 가늘어지고 입가가 비틀렸다.
“뭘 찾는 모양이야. 그게 무엇인지 모른다는 게 너의 문제겠지만.”
비꼬는 말에 누천파는 반우현을 응시했다.
“거기서 뭘 하든 난 상관없어. 한낱 서생이 뭘 할 수 있겠어?”
“맞아. 넌 벌써 부탑주에 올랐으니까. 생각해 보면, 엄포윤은 널 도와준 것 같아. 엄포윤 덕분에 륜사를 끌어내릴 수 있었잖아. 근데, 왜 엄포윤을 그렇게 빨리 처형한 거야?”
“……바쁘다. 회의가 있거든.”
“알았어.”
반우현은 선을 넘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물러섰다. 아무리 궁금해도, 아무리 친해도 지켜야 할 무형의 규칙은 존재한다. 앞으로도 유익한 관계를 유지하려면 더욱 철저히 그 선을 지켜야 하리라.
집무실 밖으로 나가려던 반우현은 누천파를 쳐다보았다.
“너, 나이 들어 보인다. 많이 피곤한가 봐. 몸 잘 챙겨.”
“……그래.”
그 만남을 통해 무거운 짐 하나를 던져 버린 반우현과 달리, 누천파는 거울 앞에 서서 얼굴을 들여다봤다. 나이 들어 보인다는 말을 흘려들을 수가 없었다. 더 이상 노화를 마법으로 숨길 수 없을까? 마냥 기다릴 수만은 없다. 위험이 크다고 해도 감수해야 할지도 모른다.
누천파는 주먹으로 거울을 부쉈다.
거울 속에 있는 자신을 부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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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사흘이 유천주에게 잡혀 용혈에서 보낸 시간만큼 길었다.
용족 특유의 사고방식, 급격한 신체적 변화, 유천주의 과욕 등 그 기간 동안 많은 일이 벌어졌고, 그로 인해 단태는 깊은 지혜를 배웠다. 마찬가지로 하둔이라는 기이한 마법을 통해 갖게 된 내면의 시간은 단태에게 또 다른 의미의 ‘힘’을 선사했다.
물리적 힘만큼 강력한 정신적, 내면적 힘이었다.
시선이 느껴졌다.
살짝 고개를 돌리자 석현담이 멈칫하며 앞을 쳐다봤다.
웃음이 나올 뻔했다. 방에 틀어박혔다가 다음 날 아침에 일 층으로 내려오다 뒹굴어 망신을 당한 주군을 석현담은 며칠 동안 틈만 나면 살폈다. 아마도 주군으로 결정한 사람의 정신이 이상해지지는 않았나 걱정하는 것이리라.
그럴 만도 했다.
반응이 느리고, 때로는 말을 하다가 입가에 경련이 일어나 꼴사납게 입을 크게 벌려 주변 근육을 풀어야 했으니까. 행동도 괴상했을 것이다. 걸음도 어설펐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 용즉계는 기괴한 춤으로 보였을 터였다.
다행히 요령을 터득한 후에는 일사천리였다.
몸은 빠르게 새로운 방식의 명령에 적응했다. 숱한 경험을 통해 당황하지 않고 명확한 지시를 내릴 수 있게 된 점이 결정적 변화의 원인이었다. 오히려 이전보다 더 좋아졌다. 보이지 않던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약점은 물론 상대의 장점까지도.
그 덕분에 명가와 유가의 애송이를 어렵잖게 용혈로 모셔 갈 수 있었다.
내면의 속도가 느려져 관점이 달라지자, 세상도 달라졌다.
가끔 솟구치는 충동은 그 뿌리까지 파고들면 해결할 수 있었다. 지켜볼 수 있는 시간이 늘어나 여관 주인이 은근히 류근묵을 좋아한다는 사실도 알아차렸고, 소윤이 학교에 가고 싶어 한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또한 평범한 사물을 들여다봄으로써 알아낼 수 있는 진실이 얼마나 많은지도 깨달았다.
갑자기 그 질문이 마치 거품이 수면으로 올라오듯 의식의 표면으로 떠올랐다.
유천주도 이런 내면의 속도로 살았을까?
용족에겐 지극히 당연한 생각의 속도일까?
유천주가 그리웠다.
그가 있을 때, 좀 더 깊은 이야기를 나누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제멋대로여서 열 받게 만들지만 그래도 그리운 친구 같은 용이었다. 잠룡으로서 명룡에게 버림을 받았는데도 그 악조건을 극복한 유천주가 자랑스럽기도 했다.
그 점을 살아 있을 때 알렸다면 유천주가 얼마나 기뻐했을까?
마차가 멈췄다.
“다 왔습니다.”
석현담이 말했다.
“그래.”
마차에서 내린 단태는 파란 하늘과 새하얀 뭉게구름을 올려다봤다. 하둔과 용족 특유의 시력이 합쳐지자, 하늘마저 다르게 보였다. 하늘만 관찰하며 시간을 보낸다면 석현담이 가진 의혹이 커질 터, 단태는 몸을 돌려 그를 따라갔다.
귀에 익은 소리에 다시 고개를 들자, 란조가 날아와 어깨에 내려앉았다. 단태는 란조의 은빛 머리를 손가락으로 가볍게 긁었다. 손가락을 머리로 미는 란조의 행동은 일종의 애교였다.
“밥 잘 먹었니?”
“잘 먹었다, 잘 먹었다.”
란조가 부리로 깃털을 정리하자, 단태는 서서 주군을 기다리는 석현담 쪽으로 걸었다.
곧 두 사람은 좁은 골목으로 들어섰다.
칠이 벗겨진 골목 양쪽의 벽은 불량한 젊은이들의 낙서로 가득했다. 음란한 그림, 누군가를 향한 욕설, 별 의미 없는 끄적거림은 하나의 감정에서 흘러나온 지류였다. 바로 불만이었다. 지금 상태에 대한 불만족, 앞으로 펼쳐진 미래에 대한 절망이 이런 낙서로 드러난 것이다.
단태는 그 벽을 유심히 들여다봄으로써 낙서한 사람들의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강물이 저수지로 흘러드는 것처럼, 벽에 묻은 감정이 단태의 내면으로 흘러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