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단태신곡-225화 (225/293)

<-- 225 회: 6-17 -->

“아래로 내려가야 합니다.”

석현담은 살짝 기울어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낡은 건물의 입구를 가리켰다.

“정말 저 안에 있는 사람들이 강함을 숭상할까?”

단태가 물었다.

“물론입니다. 암계에서는 주먹이 절대적 가치니까요.”

“같은 질문을 반복해서 미안해. 하지만 나로선 이해할 수가 없어. 그런 사고방식을 말이야.”

“주군의 말씀, 옳습니다. 누구나 자기가 속한 세계의 방식만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저는 살아오면서 다양한 세계를 접했습니다. 직접 그 세계로 뛰어들지 않으면 이해하기 힘든 게 세상엔 많습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암계는 특별한 세계입니다. 주먹 하나 믿고 뛰어든 사내들의 밑바닥 세계가 바로 암계입니다. 암계에서 부자는 존경을 받지 못합니다. 부하를 거느려 위세를 떠는 우두머리도 실력이 없다면 무시당합니다. 지금은 사라져 버린 무인의 세계, 이른바 무림이 암계와 비슷할 겁니다.”

“그래, 책사의 말을 신뢰해야지. 기대해. 압도적인 힘을 보여 줄 생각이니까.”

고개를 끄덕인 단태는 망설임도 없이 더러운 계단으로 내려갔다. 석현담은 즉시 주군 뒤로 따라붙었다.

담배를 입에 물고 문 앞에 선 사내가 침을 찍 뱉었다.

나서려는 석현담을 단태가 막았다. 란조를 어깨에 올린 채, 단태는 말도 없이 다가가 사내의 명치를 손가락으로 가볍게 눌렀다. 사내는 담배를 문 채 통나무처럼 쓰러졌다.

석현담은 깜짝 놀랐다. 주군의 능력을 미루어 짐작하고 있지만, 저토록 간단히 깡패를 제압하다니.

“어때?”

단태는 아이처럼 기대하며 석현담을 쳐다봤다.

“……처음 보는 기술입니다.”

“단융지야.”

“들어 본 적, 없습니다.”

“그럴 거야. 내가 만들었거든.”

단융지는 마력과 물을 바람에 주입하여 순간적으로 만든 날카로운 바늘을 급소에 찔러 넣어 몸을 마비시키는, 마법과 정령술, 무술이 뒤섞인 기술이었다.

정령왕들과의 계약으로 물과 바람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용의 심장으로 마력을 세밀하게 통제할 수 있어야 가능한 단융지는 단태만이 펼칠 수 있는 기술이기도 했다.

단태는 문을 열었다.

담배 연기, 바닥과 벽에 밴 술 냄새, 곳곳에서 묻어나는 마수초 향이 공기를 통해 훅 다가왔다. 왁자지껄한 분위기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열너댓 명의 사내들이 일제히 이제 막 안으로 들어선 두 사람을 노려봤다.

단태는 설명도 없이 움직였다.

석현담은 문 앞에 서서 바람이 숲을 통과하며 잡초와 나무를 넘어뜨리고 부수하는 장면을 쳐다보기만 했다. 말문이 막혔다. 암계를 장악함으로써 뜻을 이룰 수 있다는 제안은 석현담의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렇게 강할 줄은 몰랐다. 인간이 아닌 느낌이었다. 돌풍에 낙엽이 휘감겨 날아다니는 것만 같았다.

곧 건달들은 모두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그런데도 어깨에 앉아 있는 조그만 새는 흔들리지도 않았다.

단태는 오만과는 거리가 먼 표정으로 범강파의 우두머리 종보예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몸이 마비되어 상체를 일으킬 수조차 없는 종보예가 복잡한 시선으로 단태를 올려다봤다.

종보예가 입을 열었다.

“……무엇을 원합니까?”

“내가 뭘 원할까요?”

그 반문에 종보예의 눈에 이채가 흘렀다.

단태는 석현담의 설명이 진실임을 그 눈을 통해 깨달았다. 그리고 저 골목 벽에 그려진 낙서에서 느낀 절망이 이들에게도 있음을 감지했다. 이 사내들은 답답해서 미쳐 버릴 것 같은 세상에서 탈출하고 싶지만, 그 방법을 몰랐다. 무언가 바꾸고 싶지만, 그럴 힘도, 능력도 없어서 더 절망했다.

‘내가 이들을 바꿀 수 있을까?’

그 가능성만으로도 희열이 느껴졌다.

단태는 가벼운 접촉만으로 그들의 몸을 회복시켰다.

거짓말처럼 몸이 움직이자, 오랫동안 절망에 취해 거친 폭력을 행사하며 언제 어디서 끝날지 모르는 삶을 지속하던 그들은 마치 훈련된 병사처럼 단태 앞에 섰다.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어도 몸은 느낄 수 있었다. 저 사람이라면 희망도, 목표도 없는 이 더러운 곳에서 건져 줄 수 있지 않을까.

종보예가 단태 앞으로 나와 무릎을 꿇었다. 수치를 씻기 위한 복수심이 아니라, 그토록 찾아 헤맨 희망을 발견한 사람의 태도였다.

“뭐야?”

단태는 갑작스러운 변화에 당황했다. 여전히 란조는 깃털 청소에 여념이 없었다.

“저희를 거두어 주십시오.”

“거두어 주십시오!”

나머지 사내들까지 무릎을 꿇고 소리쳤다.

눈살을 찌푸린 단태는 석현담을 쳐다봤다. 아무리 암계가 강함을 으뜸으로 친다고 해도 이런 변화는 충격적이었다.

석현담은 기이한 느낌을 받았다. 거친 사내들이 저토록 빨리, 간단히 누군가에게 굴복하다니.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서는 살인도 불사하는 흉악한 놈들의 변화는 그만큼 극적이었다.

그 순간,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어쩌면 저들도 주군에게서 무언가를 받았으리라. 주군의 기억 중 일부를 얻었을까? 아니면 주군이라면 저들이 원하는 곳까지 갈 수 있으리라 확신했을까?

“주군, 받아 주십시오.”

석현담은 종보예가 남 같지 않았다. 천마의 경지에 오른 마법사의 아들로 태어나 지금까지 그 자존심을 버팀목 삼아 살아온 자신이 단번에 주군이라 부른 것처럼, 종보예도 지금 그런 결단을 내린 것이다.

“일어서.”

결정을 내린 단태의 말에 종보예와 그 패거리는 벌떡 일어섰다.

“주군께 인사드립니다. 종보예입니다.”

종보예는 눈치가 빨라 금세 ‘주군’이라는 호칭을 익혔다.

그 순간, 단태는 석현담이 여관으로 찾아와 자신을 책사로 삼아 달라며 주군이라고 불렀음을 기억해 냈다. 혹시 저 사내들이 이토록 고분고분한 이유가 결존계의 영향력 때문일까? 석현담과 기억을 공유하게 만든 그 기이한 마법이 이들에게도 작용했을까?

단태는 석현담을 보며 손짓했다.

석현담은 대번에 단태 앞으로 다가섰다.

“내 오른팔 일중이다. 이 사람의 말은 곧 내 말이다.”

“알겠습니다, 주군!”

종보예와 사내들이 소리쳤다.

석현담, 아니 일중은 배 에서 시작된 전율이 몸 전체로 퍼져 나가는 느낌을 받았다. 마치 아버지에게 아들로서 인정을 받은 기분이었다.

종보예와 사내들이 일중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단태는 일중에게 뒤를 맡겼다.

단태가 나가자, 일중은 종보예에게 앞으로의 계획을 일부 알려 주었다. 종보예의 얼굴은 열정으로 빛이 났다. 지나치지 않도록 일중이 조언을 해야 할 정도였다.

일중은 범강파를 해체하지도, 종보예를 내쫓지도 않았다. 범강파 전체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범강파는 더 이상 예전의 폭력 조직이 아닐 터였다. 오늘, 범강파는 새로 태어났다. 단태라는 사람에 의해서.

골목을 빠져나와 마차가 오가는 길 옆 나무 그늘 아래 선 단태는 그 의문에 빠져들었다.

결존계가 저들의 변화에 기여했을까?

결존계가 저들의 마음을 바꾸었을까?

유천주가 계약을 통해 거미들을 부리는 것처럼?

속이 메스꺼웠다. 반쯤 소화된 음식물이 목구멍을 비집고 올라올 것 같았지만, 천천히 규칙적으로 호흡을 하자 욕지기는 사라졌다.

아니다! 저들은 스스로 선택했다. 복종하지 않으면 죽어야 하는 가혹한 조건 때문에 강제로 결정한 게 아니었다.

그럼에도 단태는 찝찝한 기분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전혀 개운치 않았다.

만약 결존계가 저들의 마음 깊숙한 곳을 건드렸다면, 그래서 충성과 복종을 기쁘게 생각한다면?

그럴 수 있을까?

마음의 방향을 바꿔 버릴 수 있는 마법이 세상에 존재할까?

그때, 잠자리가 눈에 들어왔다. 붉은 잠자리는 자유롭게 공중을 날고 있었다. 자유롭게? 정말 자유로울까? 무엇이 자유일까? 질문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자유는 의지적인 선택을 뜻한다. 원하는 대로 선택할 수 있는 게 곧 자유인데, 무엇을 원하는지 누군가 결정한다고 해도 자유라고 할 수 있을까?

의지 자체가 사라진다면……?

누군가의 조종을 인식할 수 없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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