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단태신곡-226화 (226/293)

<-- 226 회: 6-18 -->

유천주가 약해지지 않았을 때, 단태는 거미가 싫은 일을 억지로 한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용혈에서 거미들은 군대처럼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설고처럼 표현이 풍부한 다른 거미를 본 적이 없어서, 거미들이 복종을 기쁘게 받아들였는지 확신할 수는 없다. 이럴 줄 알았다면 설고를 통해 알아볼걸.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함을 단태는 알았다. 일중의 제안을 받아들여 암계를 장악해 나갈지, 아니면 여기서 그만둘지.

단태는 자신에게 질문을 던졌다.

‘너, 군림하고 싶은 거냐?’

답은 즉시 튀어나왔다.

‘전혀!’

마음을 어지럽게 만드는 그 찝찝한 감정을 애써 밀어낸 단태는 그들의 변화가 얼마나 극적인지 생각했다. 하루하루 죽지 못해 살아가는 그들은 순식간에 바뀌었다. 눈이 반짝거렸고, 몸은 의미 있는 무언가를 해 보고 싶다는 열망으로 가득했다.

혁명 같은 변화에 단태는 감격을 억누르기 어려웠다. 굶주린 사람에게 먹을 걸 주는 건 지극히 당연하다. 희망에 굶주린 자에게 그 필요를 채워 주는 것도 당연한 일이 아닌가.

그래, 이건 지배가 아니다.

그들의 필요를 채워 주는 것이다.

앞으로 가 보기로 결정했다. 여기서 멈추고 싶지 않았다. 유천주를 비롯해 용족이 아끼는 보물을 안전하게 지킬 뿐 아니라, 물의 도시를 바꾸고 싶었다. 노예 제도를 없애고, 사람들에게 더 나은 세상을 보여 주고 싶었다.

지상으로 올라온 일중은 뜨거운 뙤약볕에 서서 날아다니는 잠자리를 들여다보는 주군을 발견했다. 신비로운 기운,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분위기가 주군을 둘러싸고 있었다. 방해할 수가 없어 한동안 기다렸다.

오가는 사람들도 주군을 힐끔거렸다. 아무리 평범해도 주군이 온몸으로 발산하는 기이한 분위기를 느낀 것이다. 눈에 띄는 아름다운 새 란조도 그 분위기에 한몫하고 있었다.

“자, 갈까?”

단태는 이미 일중이 곁에 와 있음을 알고 있었다.

“네, 주군.”

그날, 단태는 경부파, 상도파, 완파, 도체파까지 수중에 넣었다.

일중은 세심하게 고른 암계의 조직들을 장악하는 데 최하 열흘은 걸리지 않을까 생각했었다. 한데, 기적이 일어났다. 그게 아니라면, 사회의 밑바닥에서 쓰레기 생활을 하던 저 사내들이 그토록 갈구하던 무언가를 주군이 채워 준 것이리라.

일중은 후자라고 확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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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천황룡의 등에서 내려다본 물의 도시는 운하와 주황색 지붕이 어우러져 감탄을 자아내는 걸작이었다.

황제는 탄성을 터트렸다.

“용금탄보다 아름답군.”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설희였다.

옆에 서 있던 환관 물항이 설희에게 속삭였다.

“마마님, 그리 말씀하시면 아니되옵니다. 용금탄은 그 어떤 도시보다 아름답사옵니다.”

“……알았어요.”

설희는 시무룩해졌지만 황제는 못 본 척했다. 제국의 지배자가 칠성시에 속하는 유타루체를 아름답다고 칭찬할 수는 있어도, 황제 앞에서 다른 사람이 같은 말을 해서는 안 된다. 용금탄은 곧 황제의 거처, 황제의 상징이었다.

황제는 단아한 학자 같은 물항을 눈여겨보았다. 환관장 평용구가 감시 역할로 붙여 준 자였지만, 행동거지가 남달랐다. 잘만 쓴다면 제국을 운영할 인재로도 손색이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황제는 황명거사 석장명의 충고를 잊지 않았다. 부윤성, 비백포, 무청 그리고 물항까지. 그들이 승상, 어사부, 대사마 그리고 환관장의 배후에 있다고 석장명이 말하지 않았던가.

석장명은 물항의 동행을 반대했었다. 그런 노마법사에게 황제는 웃으며 말했다. 치명적인 적은 가까이 두는 게 상책이라고.

착륙장이 눈에 들어왔다. 극천황룡은 서서히 고도를 낮추었다. 의혹을 거두지 못한 시장 반명의 얼굴이 보이자, 황제는 빙긋 웃었다. 방문 목적을 몰라 답답한 그 심정이 고소하기 짝이 없었다.

극천황룡은 사뿐히 착지했다.

황제는 설희, 물항, 석장명보다 먼저 미끄러지듯 용에서 뛰어내렸다. 수백 명의 시선을 받으며 묘기를 부린다는 건, 짜릿한 경험이었다. 공중제비를 돌고 땅을 디딘 황제는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반명을 쳐다보았다. 이곳에서 황제가 다리라도 부러진다면 반명을 향한 비난이 제국 곳곳에서 쏟아질 터였다.

“잘 지냈소?”

“폐하의 은덕으로 유타루체는…….”

“유천주가 한바탕 난동을 부렸다던데.”

“……그렇사옵니다.”

“먼저 피해 지역으로 가야겠군.”

황제는 준비된 대마선으로 올랐다. 마둔수탑 출신 마법사 열 명이 움직이는 대마선은 황제 일행과 반명의 수행원까지 모조리 싣고 서서히 움직였다. 서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제법 서늘했다.

대화는 판에 박힌, 상투적인 내용이었다. 황제는 주로 듣기만 했다. 지배자는 귀가 발달해야 한다. 말을 하면 실수가 많아지고, 실수를 통해 약점이 드러나며, 약점이 곧 파멸에 이르는 지름길이라는 게 황제가 어릴 때부터 배운 가르침의 정수였다.

곧 시청이 시야에 들어왔다.

황제는 대마선 갑판에 서서 무너진 시청 중앙탑을 바라보았다. 휘파람을 불려다 옆에 서 있는 시장 반명을 생각해서 입술을 폈다. 유천주가 제대로 부순 흔적을 치우기 위해 경비대원은 물론 간척장에 투입된 노예들까지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아무래도 세금 감면 혜택이 필요하겠군.”

“그렇사옵니다, 폐하.”

반명은 기회를 봐서 꺼내려던 말을 황제가 먼저 하자 마음이 놓였다. 지금 상태에서 세금 부담이 낮아진다면 한시름 놓을 수 있을 것이다.

“북방에서 느껴지는 불온한 움직임을 정리한 후에 감면책을 의논해 보겠네.”

“황공하옵니다, 폐하.”

반명은 진심이었다.

“3년 전에는 자네가 소리 마법사를 고용하여 의도적으로 유천주를 자극했는데, 이번에도 그랬나?”

“…….”

놀란 반명은 아무 말도 못 했다.

“아닌 모양이군. 앞으론 그런 장난, 치지 말게. 용은 상식이 통하지 않는 존재니까.”

“……네, 폐하.”

황제의 정보력이 상상 이상임을 직감한 반명은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황제 옆에 서서 주위를 호기심 어린 눈으로 쳐다보는 궁녀가 보였다. 아니, 더 이상 궁녀가 아니었다. 오랫동안 정무에 몰두하던 황제가 처음으로 손을 잡고 연회에 나타난 여인이니, 승상이나 대사마, 환관장보다 더 큰 영향력을 지녔을지도 몰랐다.

그 여자와 눈이 마주치자 반명은 고개를 돌렸다.

“아, 그렇군. 설희는 자네의 여식이 황궁으로 데려왔다던데, 그런가?”

“……그렇사옵니다.”

“암탄주의 유산을 이은 자네의 여식이 내게 큰 선물을 주었어. 자네가 고맙다고 전해 주게.”

“알겠사옵니다, 폐하.”

허리까지 굽힌 반명.

그 모습을 지켜보는 설희는 이 불편한 자리가 얼마나 대단한지 다시 한 번 실감했다. 평소 그녀를 깔보고 무시하던 모든 사람들의 태도가 달라졌다. 이제 누구도 전처럼 그녀를 대하지 않았다.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이라도 되는 것처럼 다가와 말을 걸고, 값비싼 선물을 놓고 가고, 친한 척 곁을 지켰다.

설희는 황제의 얼굴을 힐끔 쳐다봤다. 잘생긴 얼굴에 매력까지 넘쳤다. 태어난 순간부터 제국의 황제 자리가 예정된 사람다운 위엄이 몸 전체에서 흘러나왔다. 이 사람 덕분에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없는 사람 취급하지 않았다.

유타루체로 함께 가자는 말을 들었을 때, 설희는 무척 기뻤다. 거기서 엄마와 오빠를 찾을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 때문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불안으로 잠을 설쳤다. 황제가 진실을 아는 순간, 지금의 이 대접은 사라져 버릴 터였다.

설희는 황제와 함께 도시 곳곳을 살폈다. 가는 곳마다 환영을 받았다. 황제를 향한 연호였지만 설희는 황제 옆에서 그 영광을 같이 누릴 수 있었다. 전율이 몸을 돌아다녔다. 이런 식으로나마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을 수 있다는 게 기뻤다.

공식 행사를 마친 황제가 시장, 11인위원회와 함께 은밀한 회의에 들어가자, 설희는 혼자 크고 화려한 방에 남았다. 거기서는 도시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었다. 운하가 거미줄처럼 펼쳐진 물의 도시는 햇살에 반짝이는 거대한 보석 같았다.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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