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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린 설희는 반우현을 보고는 몸이 굳었다. 반우현이 눈짓을 하자, 그 뜻을 알아차린 설희는 용금탄에서 데려온 시녀들을 밖으로 내보냈다.
“어때?”
반우현은 짐짓 쾌활한 태도를 보였다.
“……일부러 폐하 앞으로 간 건 아니에요. 평소처럼 황궁 귀퉁이에서 조용히 지냈는데, 폐하가 갑자기 제 앞으로 오셨어요.”
“변명은 필요 없어. 중요한 건, 지금이니까.”
반우현의 눈이 반짝거렸다.
“……네.”
괜히 기가 죽는 설희.
“너와 나는 하나야. 그러니까 운명 공동체라고. 진실이 알려지면 넌 죽어. 나도 죽고. 그건 알고 있겠지?”
“네.”
타인으로부터 그 이야기를 듣자 속이 서늘해졌다.
“넌 지금부터 노예가 아니야. 그리고 지금부터 난 네게 말을 놓지 않을 거야. 다시 인사드리겠습니다. 저는 유타루체의 계승자 반우현이라고 하옵니다, 공녀님.”
반우현을 두 손을 모으고 허리를 굽혀 황제의 여자에 대한 예절을 지켰다.
“…….”
말문이 막힌 설희.
“공녀님, 잘 들으세요. 이제 저와 공녀님은 서로를 도와야 합니다. 전 최선을 다해 공녀님께서 황비마마의 자리에 오르도록 도울 겁니다. 그러니 공녀님께서도 저를 도와주세요.”
“……그럴게요.”
다른 말은 할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황제 폐하의 마음을 사로잡는 일이에요. 폐하의 마음을 잃는 순간, 공녀님은 끝이에요. 그렇다고 애를 쓰진 마세요. 평소처럼 하세요. 폐하는 가식을 싫어 하시니까요.”
“알았어요.”
설희는 그 순간 깨달았다. 자기가 중요한 인물이 되었음을. 황제가 자신을 찾아와서 손을 잡아 줌으로써 시작된 변화일지 몰라도,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하늘처럼 높아만 보였던 반우현이 이런 말을 할 줄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들어와.”
반우현이 입구로 다가가 문을 열고 말하자, 위연미가 안으로 들어왔다. 위연미를 본 설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언니?”
“공녀님, 말씀 낮추세요.”
위연미는 반우현의 설명을 듣고 현재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다.
“……알았어.”
설희는 그나마 친했던 사람들의 갑작스러운 변화를 황궁에서 겪었기에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위연미에게 실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위연미가 곁에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위연미라면 적절할 충고를 아끼지 않을 것이다.
반우현은 위연미를 거기 두고 밖으로 나왔다. 벌렁거리던 가슴은 진정될 기미가 없었다. 직접 돈을 주고 산 노예에게 공녀라는 호칭을 하다니. 그 수치와 모욕은 가슴 깊숙이 새겨졌다.
살기 위해서 참아야 한다.
가문을 지키기 위해서 버텨야 한다.
이런저런 계산 끝에 ‘관계 재설정’이라는 결론이 나왔다. 설희를 노예 취급했다가는 오히려 재앙을 만들 뿐이니까. 오히려 공녀라는 호칭을 먼저 사용함으로써 저 아이의 신뢰를 얻는 편이 훨씬 이득이었다. 호칭이야 어떻든 설희를 통하여 황제를 움직일 수 있다면, 도시를 지키는 데 도움이 된다면, 수치심은 참을 만하고, 참아야 하는 짐이었다.
이제 원정대 문제만 해결하면 된다. 아니, 골치 아픈 문제는 실종 사건이다.
반우현은 저택으로 향했다. 몇 번에 걸쳐 조치를 취했지만 마지막으로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설희를 직접 본 노예, 하녀, 하인, 집사 들은 유타루체에 남아 있어선 안 된다. 설희와 가까이 지냈던 자는 쥐도 새도 모르게 죽여 버릴 계획이었다. 얼핏 설희를 기억하는 자들은 멀리 쫓아 버려 시간이 흐른 후에 죽일 생각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입은 무덤 속에 묻힌 입이니까.
위연미도 죽일까 고민했지만 용의 유산인 연금술 탐구에 비상한 재주를 지닌 위연미는 죽여 없애기엔 아까운 인물이었다. 무엇보다 위연미를 설희 옆에 붙여 놓으면 황제의 뜻이 무엇인지, 황궁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설희가 무엇을 원하는지 누구보다 빨리 알 수 있을 터였다.
방단의 단장실로 돌아온 반우현은 실종된 소가주들과 관련된 정보를 훑었다.
하나같이 멍청이에…… 악독한 놈들이었다. 놈들에게 억울하게 당한 누군가가 개인적으로 보복을 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으리라. 하지만 비슷한 시기에 사라졌고, 흔적조차 없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상대는 개인이 아니라, 조직일 가능성이 높아진다.
똑똑.
“들어와.”
보고서에서 눈을 떼지 않는 반우현은 문을 열고 들어선 사람을 보고 깜짝 놀라 벌떡 일어섰다.
“어르신?”
“무척 바쁜 모양이군.”
“……아닙니다. 앉으세요.”
반우현은 천마 광오선이 직접 찾아오리라곤 상상도 못 했다. 광오선 위치라면 심부름 보낼 사람이 한둘이 아닐 텐데.
“원정대 때문에 왔네.”
“무슨 일입니까?”
“원정대의 필요성이 사라졌다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요?”
“유천주는 여기 있네. 용혈이 아니라.”
“…….”
반우현은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움켜쥐었다.
“후령사탑에는 사유위룡이라는 마법이 있네. 그 마법의 기능은 단 하나, 용투기를 감지하는 것이지. 용의 접근을 미리 알기 위해 후령사탑의 마법사들이 죽을힘을 다해 만든 것이라네. 단장도 알고 있겠지만, 용은 죽음의 마법사를 만나면 살려 두지 않네.”
“그래서요?”
“사령마는 유천주가 도시에 있다고 확신하고 있지. 사유위룡진이 그렇다고 하니, 그 생각이 옳을 거야.”
“……어르신도 사실이라고 생각하시는군요.”
“자존심 센 사령마는 그런 거짓말을 할 위인이 아니거든.”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좋은 질문이야. 유천주가 왜 유타루체에 있는지를 묻는 대신,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묻다니. 감탄했네. 대부분의 사람은 왜에 집착하니 말이야. 오히려 잘된 일이네. 깊고 위험한 흑야궁의 미로를 통과하여 용혈을 찾는 것도 힘겨운 과정이니까. 천마들이 힘을 합친다면 도시에 들어와 있는 유천주를 죽일 수 있겠지.”
“문제가 있군요.”
“맞네. 유천주가 왜 유타루체에 올라와 있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없지만, 현재로선 인간의 몸을 하고 있을 걸세. 만약 천마들이 유천주를 공격한다면, 유천주는 본체로 돌아갈 테고, 그러면…… 유타루체는 파괴될지도 모른다네.”
“…….”
유천주가 시청을, 중앙탑을 박살 낸 순간을 떠올린 반우현은 숨을 헐떡거렸다. 그 거대한 용이 물의 도시에서 천마들과 싸운다면 그 피해는 상상을 초월할 것이다. 유타루체는 폐허가 될지도 모른다.
“사령마는 유천주의 위치를 특정할 수 있지만, 그 범위가 꽤 넓네. 누가 유천주인지 단정할 수 없다는 뜻이지. 대규모 마법을 퍼붓는다고 해서 유천주를 제거할 수 있다는 보장도 없네. 물론 자네 혼자 결정할 수 없겠지. 시장에게도 알리게. 허나, 신중하게. 황제 폐하가 여기 와 있음을 잊지 말게나.”
“……알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무튼, 원정대 계획은 당분간 보류하세. 유천주가 여기 있으니 용혈로 내려갈 이유는 없지.”
“알겠습니다.”
반우현은 겨우 평정을 일부나마 되찾았다. 백휘섬선 광오선을 정중하게 보낸 후, 그녀는 생각에 잠겼다. 빌어먹을 유천주는 왜 도시에 올라와 있을까? 그 이유가 무엇일까?
머리가 지끈지끈 아팠다.
황제가 머무는 이 시점에 유천주가 날뛴다면…… 물의 도시는 사라지고, 칠성시가 아니라 육성시만 남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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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태는 황제가 탄 대마선이 운하를 통과하여 사라진 후에도, 몰려든 사람들이 떠난 후에도, 그 자리를 벗어날 수 없었다.
황제를 보기 위해 몰려든 사람들 중에서, 손을 흔드는 황제에게 환호하는 함성 속에서, 단태는 설희를 보고 있었다. 그날 아침 일중으로부터 설희가 살아 있을 뿐 아니라, 황제 곁에 있음을 전해 들었지만 직접 보기 전까지는 그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주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