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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중은 말뚝 앞에 섰다. 크고 작은 나무 말뚝은 운하의 가장자리에 꽂혀 물 위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황제는 설희가 노예라는 사실, 알고 있나?”
단태는 핵심을 찔렀다.
“모를 겁니다.”
“알게 된다면?”
“…….”
일중은 입을 다물었다.
하둔으로 내면의 시간을 늦추어도 당장 쫓아가서 설희를 만나고픈 충동은 억제하기가 어려웠다. 얼마나 기다렸던가? 얼마나 보고 싶어 했던가? 설희가 살아 있어서 너무나 기뻤지만, 그 위험천만한 자리에 서 있다는 사실에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보호해야 한다.
가족으로서. 하나뿐인 오빠로서.
“비밀을 아는 자들의 명단입니다.”
일중이 문서를 내밀었다.
단태는 석장명의 아들이 아니라, 일중으로서의 삶을 선택한 석현담을 쳐다보았다. 고맙다고 말하고 싶은데, 몇 마디 말로 진심을 표현할 수 없기에 입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말보다 가치 있는 것으로 보답하고 싶었다. 그가 원한다면 대혈의 바닥에 깔린 황금 전부를 안겨 줄 수도 있으리라.
“알았어.”
일중은 돌아갔다.
단태는 운하에 면한 조그만 주점으로 들어갔다. 그 보고서를 검토하기 위해서였다. 창가에 자리를 잡고 주문한 맥주가 오자, 문서를 살피기 시작했다.
명단 꼭대기에 반우현이 올라와 있었다. 그 아래에 누천파가 자리 잡았고, 두 사람의 가족이 그 아래 공간을 차지했다. 그 서류의 뜻은 명확했다. 반우현, 누천파는 물론 두 사람과 관련된 사람들 모두를 제거해야 한다. 그래야 설희의 안전이 보장된다. 설희가 노예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을 죽여야 한다.
명단에는 위연미도 포함되어 있었다.
생각할 시간은 충분했다. 보통 사람에게 하루는 단태에게 열흘, 원한다면 한 달 이상으로 늘릴 수 있었다. 하둔을 애용할수록 내부에 침잠하여 외부 세계에 관심이 줄어드는 부작용이 있지만, 단태는 설희와 관련된 문제를 가볍게 다룰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소마선이 일으킨 물살에 주점과 운하 사이의 인도를 걷던 사람들이 반사적으로 눈길을 돌린 짧은 시간 동안, 단태는 선택 가능한 행동과 그로 인한 결과를 꼼꼼하게 따졌다. 반우현, 누천파와 연결된 사람들을 전부 죽일 수 있을까? 죽인 후에는 어떤 일이 벌어질까?
도시의 구조와 흐름을 어느 정도 알기에 그런 선택은 오히려 재앙을 불러온다고 단태는 판단했다.
차원이 다른 접근법이 필요하다.
죽이지 않으면서도 입을 막을 수 있는 방법.
순간, 단태는 반우현은 물론 누천파까지 설희의 신분을 노출시키지 않으리라는 점을 확신했다. 설희가 노예라는 사실이 밝혀지면, 반우현이 속한 가문은 멸문지화를 당할 테고, 누천파도 무사할 수는 없다. 그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설희를 보호할 터였다.
문제는 반우현, 누천파의 적이었다. 그들은 반우현, 누천파를 무너뜨리기 위해 설희의 신분을 노출시킬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무엇이 필요할까?
보다 깊은 분석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들어 창밖을 살핀 단태는 운하 맞은편 상점 앞에서 두리번거리는 노인을 발견했다. 눈이 휘둥그레졌다.
후령사탑 특유의 문양이 새겨진 망토를 걸치진 않았지만, 분명히 사령마 만표였다! 그가 왜 저기 있을까? 이곳은 저 노마법사가 머무는 별장에서 꽤 먼 지역인데.
만표는 무엇인가를 찾는 동시에 잔뜩 긴장한 태도를 유지했다. 언제든지 공격과 방어가 가능한 자세였다. 늙은 마법사는 악취 나는 시장은 물론 좁은 골목길까지 뒤지고 있었다.
날은 어두워져 다리와 운하 양쪽의 가로등에 불이 켜졌다. 점등부들이 부지런히 돌아다닌 결과였다. 공기가 시원해지자 사람들이 삼삼오오 짝을 지어 다리로, 시장으로 나왔다. 연인으로 보이는 사람들의 수도 제법 많아졌다.
만표는 다리를 건넜다.
하둔으로 자신만의 여유를 만들어 낸 단태는 이미 사령마가 무엇을 찾는지 눈치챘다. 죽음의 마법사는 용을 무서워한다. 용은 죽음의 마법사를 만나는 족족 죽여 버린다. 단태도 무시무시한 충동을 겨우 억누르고 있었다. 몰래 접근해서 사령마를 죽이고 싶었다. 갈가리 찢어 형체도 남기지 않아야 직성이 풀릴 것 같았다.
이 강렬한 살심은 어디서 나올까?
사령마는 일부러 허약한 노인 흉내를 내며 지팡이로 바닥을 짚었지만, 실상은 주위를 예리하게 살피고 있었다. 그 행동을 지켜본 단태는 빙긋 웃었다. 사유위룡으로 용투기를 감지할 수는 있으나, 대강의 위치만 짐작할 뿐 누가 유천주인지는 알 수 없음을 사령마를 통해 깨달았던 것이다.
기가 막힌 정보였다.
또 하나, 저들은 유천주가 유타루체에 머물고 있음을 알았으니 굳이 원정대를 꾸려 어두컴컴한 지하로 내려가지 않을 터였다. 저 악독한 마법사는 유천주가 어디 있는지, 왜 도시에 머무는지 알지 못해 직접 찾아온 것이리라.
오후 내내, 심지어 저녁 늦게까지 근처를 뒤진 만표는 단태가 앉아 있던 주점 안으로 들어섰다. 주위를 살핀 그는 단태에게서 멀지 않은 탁자에 앉았다. 별장으로 돌아가기 전에 목이라도 축이고 갈 생각인 듯했다.
멀쩡한 의자와 탁자를 걷어차며 주점으로 들어선 깡패 두 명이 주위를 살피다가 손쉬운 먹잇감으로 만표를 택하고 거기로 향했다. 단태는 종보예, 학용, 광월, 신균 그리고 단강이라는 건달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왜 거칠게 살아왔는지 알았기 때문에 그 멍청이들이 만표를 얕잡아 보다가 죽는 꼴을 가만히 지켜볼 수가 없었다.
“이봐, 늙은이. 그 자리는 내 거야. 미리 예약한 거라구. 그 썩은 눈으로 날 꼴아봐? 이 영감탱이가 죽고 싶나?”
일부러 시비를 걸어 돈을 뜯어내려는 수작이었다.
단태는 말없이 다가가 손바닥으로 따귀를 때리고, 쓰러진 두 놈을 잘근잘근 밟았다. 최대한 아프게, 최대한 굴욕적으로 만들어야 만표가 나서지 않을 것 같아서였다. 두 녀석은 곧 정신을 잃고 뻗었다.
몇 명의 손님들이 단태를 향해 박수를 쳤다.
“……괜찮으십니까?”
단태는 만표에게 물었다. 그냥 가 버리면 의심을 살 것 같았다.
“보기 드문 젊은이로군.”
“어릴 때부터 어른을 공경해야 한다고 배워서요. 그럼.”
재빨리 주점을 빠져나온 단태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골목길로 접어들었다. 지붕으로 올라가 안전하다고 판단될 때까지 달렸다. 하필 그 주점으로 들어오다니. 하마터면 들킬 뻔했다.
일단 위험에서 벗어났다는 생각이 들자, 웃음이 삐져나왔다. 사령마 만표 같은 대마법사를 속였다는 사실이 주는 쾌감은 의외로 컸다. 왠지 모르게 뭐든 다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만표를 속였으니, 세상 전부를 상대할 수 있는 느낌이랄까.
*우리에겐 용족이 필요해
어둠이 깔린 서쪽 방책 끝에 서서 호수를 바라보던 륜사는 한숨을 내쉬며 몸을 돌려 옆에 선 황명거사 석장명을 쳐다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제안을 이해할 수 없었다.
“저는 더러운 방법으로 천마의 자리에 올랐다고 마법사들로부터 비난받는 중입니다만.”
륜사는 화끈거리는 얼굴로 말했다. 다행히 호수 쪽에서 불어온 바람이 열기를 식혀 주었다.
“상관없네.”
석장명의 목소리는 차분해서 감정이 배제된 것 같았다.
“폐하께 짐이 될 뿐입니다.”
“자네, 죽음의 마법에 발을 담갔나?”
“아닙니다!”
격앙된 목소리.
“그럼 됐네. 자네가 나 대신 폐하 곁을 지켜 주게.”
석장명은 갑자기 기침을 했고, 곧 바닥에 핏물이 고였다. 륜사는 그제야 석장명의 삶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날 그런 눈으로 쳐다보지 말게.”
“……죄송합니다, 선배님.”
“그 사건에 대해서는 나도 나름대로 알아봤는데, 의문이 몇 군데 있더군.”
“무슨 말씀이십니까?”
“엄포윤은 범인이 아닐세.”
“…….”
륜사는 속이 뜨끔했다. 그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다만 증거가 없어서 억누르고 있었다.
“누군가 엄포윤을 범인으로 몰았다는 뜻이야. 그 일로 가장 큰 이익을 본 자가 그런 짓을 했겠지.”
그 말을 듣자 한동안 자신을 괴롭힌 불안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륜사는 곧 누가 꾸민 음모인지 깨달았다. 처음엔 시장 반명이 아닐까 생각했지만 도시의 운영만으로 벅찬 시장이 마둔수탑을 건드릴 이유는 없다는 사실을 직감했다.
누천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