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단태신곡-229화 (229/293)

<-- 229 회: 6-21 -->

기다렸다는 듯 엄포윤을 범인으로 잡았을 뿐 아니라, 처형까지 하지 않았던가. 게다가 누천파는 이번 일로 임시 부탑주의 자리에 올랐다. 별다른 일이 없다면 누천파는 그대로 부탑주가 되고, 시간이 흐르면 탑주의 자리에 오를 터였다.

순간, 명국영이라면 진실을 알았을 텐데 왜 알려 주지 않았는지 궁금했고, 그만큼 실망스러웠다.

“명 선생은 자네가 경거망동을 하지 않을까 싶어서 진실을 숨긴 걸세.”

“……그렇군요.”

륜사는 씁쓸하게 웃었다.

“자네가 땅에 떨어진 명예를 회복할 길은 하나뿐이네.”

“황마사가 되라는 말씀이군요.”

“명 선생이 자네 옆에 있으니 그 애송이의 음모를 밝혀낼 수도 있겠지. 안 그런가?”

륜사는 방책을 이루는 거친 통나무 끝을 손으로 꽉 잡았다. 손가락이 나무에 자국을 남겼다. 수치심과 분노가 뒤섞여 가슴 안쪽에서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경거망동이라니!

더 부끄러운 건, 부정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

너무나 오랫동안 잃고 살았다. 깊고 진중한 마음을. 평정심을. 한 걸음 물러나 전체를 보는 여유를.

륜사는 갑자기 시청을 덮친 유천주, 여전히 떠나지 않고 있는 천마들, 부탑주 자리를 꿰찬 누천파, 휴식을 취한다는 명목으로 유타루체로 찾아온 황제를 생각하며 ‘전체’를 떠올렸다. 명국영처럼 일부로 전체를 통찰해 내는 기적 같은 능력은 없지만, 그에게도 어떤 흐름이 느껴졌다. 맹렬한 회오리 같은 것이었다.

륜사의 말이 옳았다.

태풍이 몰려오고 있었다.

륜사는 몸을 돌려 답을 기다리는 노마법사를 쳐다보았다.

“선배님의 뜻을 따르겠습니다.”

“허허, 고맙네. 내 죽어서도 자네를 잊지 않겠네.”

석장명은 그 어느 때보다 호탕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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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홍은 복도에서 왔다 갔다 하며 초조하게 손을 만지작거렸다. 몇 번이나 연락을 했는데도 반응이 없어 직접 달려왔는데도, 백율가는 기다리라고만 했다. 방단의 수장 백율운현은 물론 소가주 백율청현까지 실종되었다는 그 소문이 사실인 것 같았다.

‘말을 갈아타야 하나……?’

타고 있는 말이 지쳐서 쓰러지기 일보 직전이라면, 마땅히 그래야 한다.

마침내 문이 열렸다.

묘홍을 본 백율모가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뒷골목에서 자릿세나 뜯으며 살아가는 부류에 대한 경멸이 담긴 시선에 묘홍의 뺨이 달아올랐다. 그러나 묘홍은 감정에 휘둘려 대세를 그르칠 만큼 혈기왕성한 사람이 아니었다.

“장로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따라오게.”

백율모가 앞장섰다.

“……세 번이나 사람을 보냈습니다만.”

“알고 있네.”

백율모는 집무실에 도착한 후에야 이야기를 나눌 기세였다.

묘홍은 입을 다문 채 백율모를 따르며 속에서 올라오는 울분을 꾹꾹 눌렀다. 자릿세를 뜯어냈다. 주류 판매로 돈을 벌었다. 도박은 물론 매춘에도 손을 댔다. 심지어 마수초 매매와 청부업에도 관여했다. 그러나 그 사업에서 번 돈 중 무시 못 할 몫을 가져간 게 백율가였다.

고고한 척하는 저 위선이 보기 싫었다. 그래도 입 밖에 그런 생각을 내뱉을 생각은 전혀 없었다. 말 한마디에 그가 평생 이룩한 왕우파가 무너질 수도 있으리라. 그만큼 백율가의 영향력은 거대했다.

집무실에 들어선 백율모는 딱딱한 의자에 앉아 고개를 들었다. 이야기를 들 준비가 됐다는 뜻이다.

묘홍은 최근 심상찮은 분위기를 최대한 과장하여 전달했지만, 백율가의 장로는 심드렁한 표정을 잃지 않았다.

“그러니까, 사소한 패거리 싸움에 본가의 지원을 바란다는 건가?”

“……범강파, 상도파, 경부파, 완파 그리고 도체파가 힘을 합쳤습니다. 결코 사소한 충돌이 아닙니다, 장로님.”

“그동안 충분한 지원을 했다고 생각하는데.”

백율모는 수면 마법이 걸려 있어 상대를 잠재울 수 있는 반지를 비롯해 다양한 종류의 마법 도구와 무기를 왕우파에 지원했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다.

“……알고 있습니다만, 도와주시지 않으면 왕우파가 무너질지도 모릅니다.”

“상납금을 두 배로 늘린다면.”

묘홍은 욕을 퍼부을 뻔했다. 두 배? 도둑놈 같으니라고!

“싫은가?”

백율모는 마음에 들지 않으면 꺼지라는 뜻을 담아서 말했다.

“……알겠습니다.”

묘홍은 급한 불을 먼저 끈 후에 뒷일을 생각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래도 백율운현은 막무가내로 이런 요구를 하지는 않았다. 그 여자는 대체 어디로 갔을까? 혹시 저 구렁이 같은 녀석이 그 여자를 없앴을까?

백율모로부터 단단히 약속을 받은 후에야 백율가 밖으로 나온 묘홍은 길게 숨을 내쉬었다. 백율모의 요구, 억울하지만 이해 못할 바도 아니었다. 범강파, 상도파 따위는 암계에 속한다고 말을 하기 부끄러울 정도로 허술한 조직이었다. 왕우파가 그런 조직 때문에 백율가를 찾아가서 손을 벌렸다는 것 자체가 말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게 현실이었다.

허구한 날 싸우기만 하던 그 조직들이 왜 하나로 뭉쳤을까? 흑수파와 왕우파조차 하나로 묶지 못해 내버려 둔 그 꼴통 같은 놈들을 누가 이끌고 있을까?

그래도 마음이 한결 놓였다.

백율가가 보낼 마법사와 용병이라면, 제아무리 거친 놈들이라고 해도 쓸어버릴 수 있으리라. 이번이 제대로 본때를 보여 줄 생각이었다. 일벌백계로 몇 놈을 잔인하게 죽여 그 머리를 장대에 꽂아 뒷골목에 걸어 두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이다.

파월이 달려왔다. 걸음이 빨라 심부름을 시키는 녀석이었다.

“형님, 큰일 났습니다.”

“큰일?”

이야기를 듣기도 전에 묘홍은 가슴이 떨렸다.

“……놈들이 쳐들어왔습니다.”

“…….”

말문이 막혔다.

감히!

심호흡으로 마음을 가다듬은 후에야 입을 열 수 있었다. 간이 배밖에 나온 놈들이 수의 우세를 앞세워 쳐들어오다니.

“경비대는?”

이런 일을 대비하여 평소 거액의 뇌물을 경비대에 갖다 바쳤다.

“그게, 아무도 오지 않았습니다.”

“뭐?”

묘홍은 달리기 시작했다. 경비대가 움직이지 않았다면 그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더 많은 돈을 받아 처먹은 것이다. 누가 그런 짓을 했을까? 범강파, 상도파 따위를 하나로 뭉친 그놈 짓이리라.

그 수완이 놀라웠다. 경비대까지 손을 쓰다니.

기루와 주점이 밀집된 차망로 초입에 자리 잡은 본부 앞에는 한눈에 봐도 불량하고 거친 놈들이 모여 있었다. 암계에서는 전설로 통하는 묘홍을 보고도 물러서지 않았다.

묘홍은 적잖이 놀랐다. 대체 뭘 믿고 저리 자신만만할까?

싸움에 능하다고 조직을 이끌 수는 없다. 혼자 싸우는 것과 다수를 이끌고 전투에 나가 승리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였다. 이 차이점을 알아야 조직을 키울 수 있다. 묘홍은 깡패로 살면서 그 지혜를 일찍 배웠기 때문에 왕우파라는 거대 조직을 키워 낼 수 있었다.

저 쓰레기 같은 놈들을 하나로 묶다니!

누가 그랬을까?

백율가가 보낼 마법사, 용병이 도착하면 이곳의 상황은 정리될 거라고 확신했기에 묘홍은 사분오열 싸우기만 하던 군소 조직들을 통일한 장본인이 누군지 몹시 궁금했다. 그래서 대담하게 본부로 들어섰다.

복도 양옆으로 칼과 도끼 따위를 든 놈들이 묘홍을 향해 눈을 부라렸다. 곳곳에 피를 흘리며 쓰러진 부하들이 보였다. 밧줄에 묶여 무릎을 꿇은 조직원들도 꽤 많았다.

묘홍을 본 그들은 패잔병처럼 고개를 푹 숙였다. 그들에게 곧 있을 반전을 알려 주고 싶지만, 이번 기회에 쓴맛을 봐야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갈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묘홍은 힘으로만 조직을 운영할 수 있다고 믿지 않았다. 어릴 때, 명가가 운영하는 상회에서 일을 하면서 거대 상업 조직이 어떤 식으로 운영되는지 눈으로 본 적이 있었다. 당시의 경험을 왕우파에 적용했고, 생각할 줄 아는 자들을 위로 끌어 올려 조직 운영에 활용함으로써 다른 조직을 압도할 수 있었다.

사흘에 한 번씩 간부들이 모여서 당면한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찾는 회의실에 낯익은 녀석들이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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