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1 회: 6-23 -->
“…….”
광오선은 길게 숨을 내쉬고 백탁에게 그 말을 전했다.
백탁은 즉시 주위를 돌며 광오선이 알려 준 조건에 걸맞은 사람을 찾기 시작했으나 성과는 없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천마들 간에 긴장이 고조되었다. 말투는 눈에 띄게 퉁명스러워졌고, 수정구를 통한 연결 시간이 길어졌다. 거대 조직의 수장 혹은 그에 준하는 지위에 익숙했기에 누군가의 지시는 그들에게 불만을 가져왔다.
유천주는 서쪽 지역을 자유롭게 오가고 있었지만, 천마들로 이루어진 추격자들은 반응이 느렸다. 서로를 신뢰하지 않았다. 광오선조차 만표가 알려 주는 위치가 정확할까 의심했고, 나머지는 용에 대한 광오선의 충고를 가볍게 생각했다. 오래지 않아 그들은 이런 식의 접근이 무용지물임을 깨달았다.
광오선의 목소리에 불신의 기색을 알아차린 사령마 만표는 수정구를 박살 냈다. 이로써 천마들의 추격은…… 끝이 났다.
백탁, 율암 그리고 종만추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숙소로 돌아갈 무렵, 광오선은 마력을 끌어 모아 빛의 기둥을 만들어 공중으로 쏘아 올렸다. 서서히 어두워지는 저녁의 하늘로 선명한 백색의 기둥이 솟구쳐 오르자, 사람들이 걸음을 멈추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광오선은 유천주가 반응을 하지 않을까 기대했지만, 사람들이 구경을 하러 모여들 뿐이었다.
결국 의견을 조율한 끝에 짜낸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
광오선은 사령마 만표의 별장에 모이도록 천마들을 설득했다. 광오선이 지닌 권위 덕분에 륜사와 석장명, 계림 어딘가에 있을 은림자 차명을 제외한 천마들이 사유위룡진이 설치된 지하실에 모였다. 지하실 구석에 깨진 수정구의 조각이 떨어져 있었다.
“무슨 일이지?”
만표는 노골적으로 불만을 드러냈다.
“유천주가 숨어서 나타나지 않는다면, 우리가 직접 내려가는 수밖에 없네.”
광오선이었다.
천마들은 시선을 교환했다. 그들은 광오선의 제안에 담긴 뜻을 간파했다. 천마들끼리 은밀히 흑야궁을 통해 유천주의 용혈로 가자는 의미였다. 어차피 시장과 계승자를 비롯해 유력 가문들은 황제와 도시 내부 형편에 신경을 쓸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소리 소문도 없이 지하로 사라지기에 지금보다 좋은 시기는 없다.
그들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 새벽에 이곳에서 떠나도록 하지.”
광오선이 결정을 내렸다.
@
쏟아지는 질문에 백율운현은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꿈을 꾸는 기분이었다. 몽롱해서 뺨이라도 한 대 치면 정신이 들어, 그 더러운 우리를 소가주와 치워야 할 것만 같았다.
“대체 어딜 갔다 온 거냐?”
백율모가 다그치듯 물었다.
말을 많이 할수록 품위를 잃는다는 생각을 가진 가주 백율만해는 위엄을 가장한 위선을 떨며 지켜보기만 했다.
지랄병이 취미인 백율모의 역겨운 면상을 보니, 확실히 꿈은 아니다. 희망을 접고 절망을 택할 무렵, 느닷없이 희망이 현실이 되는 것만큼 짜릿한 경험도 없을 것이다. 백율운현은 단태가 찾아와 위로 올라갈 거라는 말을 전했을 때, 아무런 말도 못 했다. 그런 날이 이토록 빨리 오리라곤 기대하지 않았기에.
단태가 들려준 이야기에 충격은 그 범위가 늘어났다. 단태의 말에 따르면, 유천주는 백율가를 ‘선택’했다. 그중에서도 백율운현을 택한 것이다. 백율운현은 두 손으로 입을 막고 잠시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서서히 그 의미를 알아차린 백율운현은 단태 앞에서 눈물을 흘렸다. 감격의 눈물이었다. 유타루체 역사상 누구도 용과 손을 잡지 않았다. 아니, 잡을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11개의 유력 가문 중 하나였던 백율가는 유천주의 도움을 받아 공중으로 비상할 것이다. 어쩌면 자신이 반명을 밀어내고 백율가 최초의 시장이 될지도 모른다.
“나도 도와줄게.”
단태가 말했다.
“……너?”
“그동안 미안했어. 유천주 님께서 다 듣고 계셨거든. 엄하게, 거칠게 하지 않으면 오히려 날 벌하신다고 해서.”
“……그랬었어?”
“물론 개인적으로도 빚이 있었잖아.”
“그건 그래.”
“그러니 과거는 잊기로 해. 어때?”
“당연하지. 넌 유천주 님 옆에 있고, 난 그분의 선택을 받았으니 우리는 한편이라고 할 수 있어.”
활달하게 웃었지만 백율운현은 그 굴욕과 수치를 잊지 않았다. 언젠가 이 당돌한 녀석을 없애고 유천주와 직접 대면할 생각이었다. 이런 녀석이 유천주의 마음에 들었다면, 자신이 왜 못 할까? 백배는 더 잘할 자신이 있었다.
“그리고 하나 더, 유천주 님은 내가 도시에서 무슨 일을 당했는지 아셔. 하지만 그 일에 당신이 개입한 건 모르시지. 이건 한편으로서 충고하는 건데, 그분이 아시기 전에 내 누명을 벗기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백율운현은 금세 대답하지 못했다. 방단의 수장으로서 그녀가 직접 주도한 일이었기 때문에 없었던 일로 만들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나 곧 영민한 그녀는 방법을 찾아냈다. 또 다른 희생자를 찾아내면 그만이다.
“좋아.”
“잠깐 눈을 감아 봐.”
“……그래.”
개운치 못한 느낌을 받으며 눈을 감는 순간, 정신이 아득해졌다. 의식을 잃은 것이다.
다시 눈을 떴을 때, 백율운현은 햇살이 나뭇잎 사이로 흔들리는 숲의 풀밭에 누워 있었다. 상쾌한 공기, 따뜻한 햇살, 무엇보다도 자유로운 해방감이 그녀를 환호하게 만들었다. 흥분이 가라앉자 주머니에 든 편지를 찾아내어 읽었다. 유천주가 단태를 통해 전달한 편지였다.
그로부터 두 시간 후, 백율운현은 백율가 최고회의라 할 수 있는 ‘천회’에 참석하여 높은 자리와 어울리지 않게 멍청한 늙은이들로부터 질문을 받고 있었다.
“그게 중요한가요? 장로님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지엽적인 것, 부차적인 것에 집착하는 버릇이 있어요.”
“뭐?”
백율모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소가주가 어디 있는지 아세요?”
“…….”
백율모는 입을 다물었다.
“명가 짓이에요.”
백율운현은 단언했다. 의심의 여지가 없다는 말투에 백율모는 물론 가주까지 깜짝 놀란 눈치였다.
“가주님, 제게 천황패를 주세요.”
“……천황패가 필요할 만큼 급박한 상황이라는 뜻이냐?”
가주가 물었다.
“그 이상이에요. 소가주가 납치되어 생사를 확인할 수 없는 데다가, 천마들이 여전히 도시에 머물러 있고, 유천주가 시청을 무너뜨렸으며, 황제까지 이곳으로 왔어요. 자칫 잘못하면 본가는…… 붕괴되어 사라질 수도 있어요.”
붕괴라는 단어가 가주의 뺨을 후려쳤다. 그 충격이 깊이 파고들수록 잠시 기다린 백율운현이 말을 이었다.
“허나, 가문 전체가 일사불란하게 움직인다면…… 오히려 위기는 기회가 될 수도 있어요. 제게 천황패를 주신다면, 나는 반드시 백율가를 유타루체 최고의 가문으로 우뚝 세울 거예요.”
“말로는 누구나 할 수 있지.”
백율모가 툴툴거렸다. 그는 백율운현의 실종 덕분에 가문 운영의 전면에 나섰기에 갑작스러운 귀환을 마냥 기뻐할 수 없었다.
“증거가 필요한가요?”
“근거도 없이 천황패를 요구한다는 게 이상한 일이 아니냐?”
백율모는 말도 없이 사라져 가문을 위기에 빠뜨린 조카를 맹렬하게 공격했다. 그 말에 일리가 있기에 천회의 참석자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주도 그 의견에 힘을 실었다.
백율운현은 천회에 참석한 11명을 쳐다보았다. 비교적 젊은 나이에 방단의 수장까지 오른 그녀를 진심으로 지지하는 인물은 한 명도 없었다. 과거엔 백율운현의 힘에 못 이겨 찬성하는 척했지만, 씻을 수 없는 실수를 범한 지금 자원하여 백율운현의 편을 드는 사람은 찾기 어려웠다.
‘내 편이 없을 거라던 유천주 님의 말씀이 옳았어.’
“직접 봐야 할 겁니다. 밖으로 나가시죠.”
백율운현은 답답한 회의실을 벗어나 대리석을 깎아서 만든 ‘맹감석’ 옆으로 걸었다.
사특한 마음을 가진 자를 알아본다는 그 조각상은 사자와 곰 등의 맹수가 섞인 형상이었다. 돌아가신 어머니는 맹감석을 어루만지며 왜 눈이 부리부리한지, 왜 발톱이 크고 날카로운지 알려 주었지만, 맹감석이 악인을…… 사기꾼을…… 잡아 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시선을 느낀 백율운현은 돌아섰다.
백율가를 이끄는 사람들이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천황패는 멸문지화의 위기 앞에서나 주어지는 패찰로 전통적인 규율에 묶여 제한적인 명령을 내리는 가주마저 천황패의 소유자에게 복종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