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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에게 천황패를 요구한 백율운현의 행동은 곧 스스로 가주가 되겠다는 선언이나 다를 바 없었다.
온통 적이었다.
백율운현은…… 독바늘 같은 시선을 쏘아 대는 이곳보다 용혈이 낫다는 생각을 했다. 적어도 거기서는 몸만 힘들었다.
‘난 백율운현이야. 포기할 순 없어.’
백율운현은 손을 들어 서쪽을 가리켰다. 붉은 노을이 지붕 너머 하늘을 물들이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 손을 따라 서쪽을 바라보았지만, 곧 수군대는 소리가 커졌다. 대체 뭘 보라는 것일까?
득의양양한 백율모가 나섰다.
“지금이라도 잘못을 뉘우친다면…….”
“유천주다!”
한 사람이 소리쳤다.
저물어 가는 햇살을 받아 빛나는 날개를 움직이며 유천주가 다가오고 있었다. 높이 떠 있어도 거대한 몸체는 위압적이었다. 점점 커지는 유천주는 입이 쩍 벌어진 백율가의 사람들 위를 지나 동쪽으로 날아갔다. 곳곳에서 비명이 들렸지만 수룡은 도시의 상공을 맴돌더니 다시 호수 쪽으로 가 버렸다.
백율운현은 감격으로 몸을 떨었다. 자신에게 힘을 실어 주기 위해 직접 도시 상공으로 날아온 유천주는 존재만으로도 위압적이었다. 그런 존재와 손을 잡았으니, 유타루체는 백율가의 발아래에 무릎을 꿇게 될 터였다.
용혈에서의 고생은 이미 잊었다. 오히려 얻은 게 많았다. 복잡한 생각이 필요 없는 단순한 노동 덕분에 머릿속을 비울 수 있었고, 그로 인해 버릴 건 버리고, 정리할 건 정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어떻게 알았지?”
백율모가 물었다. 유천주의 출현으로 놀란 마음을 진정시킬 수 없어, 목소리가 덜덜 떨렸다.
백율운현은 늙은 장로를 무시하고 가주 앞에 섰다. 결정권은 그에게 있었다.
“이곳을 떠날까요? 아니면 제게 천황패를 주시겠어요?”
“…….”
가주는 고민에 잠겼다.
그날 밤, 백율운현은 가주로부터 천황패를 받았다. 백율가에 대한 전권을 위임받은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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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 문서고는 각종 계약서, 공증 관련 서류, 보고서 등 다양한 문서가 모여드는 곳이었다. 노예 등록소, 세관국, 시법원, 경비대 등 관공서가 만들어 내는 문서는 물론 시청이 인정하는 동업조합의 예산, 결산 보고서와 사업 관련 문서가 모조리 중앙 문서고로 모였다. 가히 문서의 바다라 불릴 만한 곳이었다.
처음 생각과 달리 황정어패를 이용하지 않았다. 황정어패를 내민다면 모두가 명국영이 무엇을 하는지 관심을 가질 터였다. 황정어패는 명국영의 행동 이면에 황제의 의지가 있다는 증거였으니까.
황정어패보다 효과 좋은 방법, 뇌물이었다. 3년 가까이 용금탄에서 관리로 일하면서 받은 돈을 털어 뿌렸더니, 중앙 문서고의 문이 열렸다.
명국영은 침식을 잊고 문서 더미로 파고들었다. 목적은 암탄주의 계략을 파악하고 단태에게 자유를 되찾아 주는 것이었으나,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취할 수 있는 접근 방법은 신중한 탐색을 통해 결정할 생각이었다.
마법에 있어서 명국영은 문외한이었다. 육체적 능력을 고려해도 명국영은 평범한 용병에도 미치지 못했다.
그러나 문자와 서류, 책의 세계에서 그는 우뚝 솟은 산맥 같은 존재였다. 중앙 문서고에서 명국영은 용태학 수석 졸업, 용문거 수석 합격의 능력을 십분 발휘할 수 있었다.
단태와 관련된 재판 기록을 훑은 명국영은 정치적 해결책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시법원이 스스로 독립적인 조직이라고 우겨도 시장과 11인위원회의 영향력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그러니 권력을 손에 쥔 자가 단태가 누명을 벗도록 힘을 써 준다면, 의외로 일은 쉽게 풀릴 수도 있으리라.
제국 최고의 권력자를 떠올렸으나, 명국영은 고개를 흔들었다. 황제가 끼어들면 일만 복잡해질 가능성이 높아진다.
황제는 제국의 지배자였지만 유타루체 내부 일까지 사사건건 간섭할 수는 없다. 그런 일이 벌어지면 유타루체를 비롯한 칠성시가 연합하여 반항할 테고, 황제는 권위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을 터였다.
시법원이 쏟아 낸 각종 기록에서 시작된 섭렵은 토지 문서, 부동산 계약서를 비롯해 노예 계약서 등 상업 관련 문서로 옮겨갔다. 명국영은 돈이야말로 진실을 드러내는 본질적인 도구임을 오래전에 알았다. 돈의 흐름을 파악하면, 그 돈을 손에 쥔 사람들의 내면까지 파고들 수 있다.
11인위원회로 대변되는 11개의 유력 가문은 과연 유타루체를 꽉 쥐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물의 도시가 가진 부의 6할, 관점에 따라서는 7할 이상이 그 가문들에 집중되어 있었다. 경비대와 방군부를 포함한 관공서 조직, 마탑, 용병단 그리고 무수한 동업조합들에 들어가 있는 유력 가문 출신 사람들을 고려한다면 9할이 그 가문들의 소유였다.
그런데 대략 4년 전부터 또 하나의 흐름이 나타났다. 천천히 야금야금 도시의 부를 잠식하는 그 세력은…… 실체를 알아내기가 쉽지 않았다. 건물과 땅 그리고 상회 등을 사들이는 방식은 비슷했으나 계약서에 올린 이름은 일치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럼에도 명국영은 그 세력이 적어도 유타루체가 가진 부의 2할을 차지했으리라 여겼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최근에 등장하여 압도적인 기세로 영향력을 넓히는 세력이 또 하나 있었다. 유천주의 습격으로 부동산 가격이 폭락한 시점을 노려 대규모 자본을 투입한 모양이었다. 공포에 질려, 그리고 일자리를 찾아 도시를 떠난 사람들 때문에 버려진 방책 근처의 땅과 건물은 모조리 그 세력이 집어삼켰다.
놀라운 건, 관련 계약서에 이름이 오른 자들이…… 대부분 암계 출신이라는 점이었다. 암계는 멋들어진 이름이지만, 뒷골목에서 돈이나 뜯는 깡패들의 세계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었다. 시야가 좁고 마음까지 옹졸해서 서로 싸우기 바쁜 깡패들이 하나의 세력을 이루었다는 점은 그냥 넘길 수 없는 특징이었다.
거기에도 일정한 흐름이 있었다.
명국영은 시청과 11개의 유력 가문, 4년 전에 나타나 조심스레 힘을 키우는 세력, 그리고 맹렬하게 활동하는 세력이 유타루체의 미래를 결정하리라 확신했다. 복잡함으로 관리들도 들여다보기 전에 질리는 중앙 문서고를 파고들지 않았다면, 명국영조차 대규모로 진행 중인 삼파전을 알지 못했으리라.
눈이 뻐근했다. 낮과 밤이 존재하지 않는 문서고에 처박혀 있으니, 잠도 제대로 자지 않았고 먹는 것도 부실했다.
문득 유천주와의 위험천만한 만남을 떠올렸다.
지혜로운 용은 약육강식, 적자생존이라는 인간 특유의 사고방식이 지닌 맹점을 지적했다. 노예 제도는 인간이 스스로 짐승임을 드러내는 증거라고 그 용은 암시했다. 그러면서 용과 인간의 공존 가능성을 물었다.
당시엔 저주로 쇠약해진, 죽음을 코앞에 둔 용의 마지막 몸부림이라고 생각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공존’이라는 단어가 지닌 가능성에 마음이 떨렸다.
용과 인간이 공존할 수 있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륜사를 비롯해 일부 마법사들은 용족이 인간에게 마법을 전했다는 이론을 한사코 반대하지만, 명국영이 보기에 용마설은 진실 같았다. 역사 기록을 판단 기준으로 삼는다면, 모든 용은 마법에 능한 존재였다. 그에 반해, 인간은 극소수만 힘겨운 과정을 거친 후에야 마법을 펼칠 수 있었다.
상식적으로 생각다면, 마법은 용족에게서 인간으로 이동한 셈이다.
인간은 용족의 우월함을 인정하기 싫겠지만, 신체적으로…… 마법적으로…… 어쩌면 지혜라는 기준으로도 용족이 탁월하다면 그 용족과의 공존은 인간에게 상상 이상의 이득을 가져오지 않을까? 인간의 거주 영역 확장은 그 이익의 일부에 지나지 않을 터였다.
그런 생각에 이른 후에야 명국영은 뼈아픈 진실을 알아차렸다.
“……용족에 대해 아는 게 없구나.”
전쟁은 무기를 든 병사들이 맞붙어 피를 흘리며 승리를 결정하는 투쟁이지만, 전쟁에서 승리하려면 상대방에 대한 정보가 필수적이다. 적을 알아야 그에 적합한 전략, 전술을 채택하여 최소한의 희생으로 승리할 수 있다.
왜 용족에 대한 지식은 전무할까?
관심이 없어서?
그럴지도 모른다. 어쩌면 접근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게 전부는 아니야.”
명국영은 인간 특유의 오만함이 용족을 향한 호기심을 막은 게 아닌가 생각했다.
사람은 누구나 뛰어나기를 욕망한다. 더 많은 지혜와 지식, 더 거대한 부, 더 강대한 권력을 얻기 원하는 근본적 동기는 타인보다 탁월해지고픈 욕망이니까.
그 본능에 가까운 욕망이 용족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으리라. 용족 앞에 서면 자연스럽게 인간의 허약, 무지, 한계가 드러날 테니, 아예 접근할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지도 몰랐다. 그래야 인간이 최고라는 망상을 유지할 수 있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