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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국영은 서류 더미에 누워 어두컴컴한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문서고 지하에 설치된 마법진 덕분에 바깥 날씨와 상관없이 일정한 온도와 습도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왠지 모르게 황량한 들판에 홀로 누워 밤하늘을 올려다보는 느낌이었다.
입안이 바싹 마를 만큼, 그 기회를 놓친 게 안타까웠다. 좀 더 일찍 이런 생각을 했다면, 그 만남을 용과 인간의 공존에 대한 가능성을 탐색하는 절호의 기회로 삼았을 텐데. 그러면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도 있었을 텐데.
“……내 안에도 인간이 최고라는 오만함이 자리 잡고 있었을까?”
다시 유천주를 만난다면 어떤 말을 할 수 있을까?
현재로선 그때와 같은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음을 명국영은 직감했다. 공존을 논하기엔 용족에 대한 정보가 턱없이 부족했다. 수백 년, 어쩌면 수천 년에 달하는 긴 수명 동안 용족이 무엇을 하는지조차 알려져 있지 않았다.
앎은 관계의 시작이다.
생전 처음 만난 사람과 쉽게 친해질 수 있는 이유는, 말로 표현하지 않아도 공유할 수 있는, 이미 알고 있는 지식이 많기 때문이다.
일단 같은 언어를 사용한다. 비슷한 사고방식으로 생각한다. 흘러 다니는 소문, 최근에 닥친 재앙, 다양한 신화와 전설까지 포함한다면, 아무리 낯선 사람이라고 해도 이미 방대한 지식을 공유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니 개인적 취향만 크게 어긋나지 않으면 쉽게 친해질 수 있다.
용족은 무지의 장벽 너머에 있는 존재였다. 용이 인간처럼 말할 수 있음은 명백하지만, 용족만의 언어도 존재할 것이다. 사고방식은…… 완전히 달랐다. 공유하는 지식은 빈약하다 못해 전무했다.
용족에게도 신화나 전설이 있을까?
용족도 인간처럼 소문에 귀를 기울일까?
현재로선, 용족과 인간의 공존은 늑대와 양의 공존과 다를 바 없을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명국영은 그 가능성을 무시하고 갖다 버릴 수가 없었다. 그 환상이 현실로 이루어진다면, 제국이…… 도시가…… 뿌리부터 흔들려 새로운 세상으로 이어질 것이다.
인간은 동족을 학대하는 데 익숙하다. 필요하다면 대규모 학살도 서슴지 않는다. 철학, 역사 등을 통하여 도덕과 반성을 강조하지만, 실제 인간 세상은 그 주장과는 반대로 흘러간다. 철학은 통치자의 정당성을 지지하고, 역사는 현재 질서를 옹호한다. 과거를 돌아보고 현재를 바꾸어야 한다는 반성은 학자들이 읽는 책에서나 등장하는 개념이다.
순간, 명국영은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던, 그 가능성을 고려조차 하지 않았던 지점에 이르렀다.
“……우리에겐 용족이 필요해.”
논리적인 근거 없이, 그저 막연한 감으로 내뱉은 말이 다시 귀를 통해 뇌로 전달되자 명국영은 제국 전역을 포함한 거대한 그림을 떠올릴 수 있었다.
역사는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인간의 세계를 보여 주는데, 용령 제국의 건국 이후 깨어 있는 학자들은 국가의 구조적 변화에 우려를 드러냈다. 권력과 부가 소수의 집단에 지나칠 정도로 집중되고 있다는 지적이었다.
물론 탕무 신국 이래로 항상 지배층은 부와 권력을 독점하려 애를 썼다. 역사가 그 점을 증명한다. 그러나 그런 구조에도 한계가 있었다. 지배층의 야욕은 번번이 각 지역에 웅크린 용족에 의해 꺾였다. 아니, 꺾일 수밖에 없었다. 국가 혹은 도시가 아무리 힘을 집중시켜도 용 앞에서는 무용지물이었다.
융 왕국 시대에, 천파 대제국 시대에 용의 지위에 도전한 개인 혹은 도시가 어떻게 파괴되었는지 역사가 증명한다. 제국 북동쪽에 자리 잡은 사혈지, 남서쪽의 중막, 동남쪽 지역을 뒤덮은 계림은 용족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보여 주는 증거였다.
일치된 결론은 없지만, 다수의 학자들은 분노한 용족이 광활한 대지를 인간이 거주할 수 없도록 만든 것이라 판단하고 있었다.
마차든, 배든 일정 이상의 속도로 달리면 문제가 생긴다. 바퀴를 지탱하는 축이 부러지고, 범포가 찢어지거나 돛대가 갈라진다. 차라리 그런 문제는 마차나 배를 세워 더 큰 손상을 막아 준다. 하지만 절벽으로 달리는 마차가, 암초가 숨어 있는 해역으로 돌진하는 범선이 필요 이상으로 견고하다면…… 결과는 참혹하리라.
왜 유독 용령 제국이 들어선 후에 착취 구조가 고착화되는지, 왜 노골적으로 지배층이 하층민을 몰아세우는지 알 것 같았다. 양 떼가 하나로 뭉칠 수 있도록 만드는 늑대가 사라진 것이다.
저주가 용족을 덮친 결과였다.
용족이 완전히 사라진다면 어떻게 될까?
명국영은 긴 숨을 천천히 내뱉으며 생각을 거듭했다. 인간 스스로 속도를 조절할 수 있을까? 절벽이나 암초 해역으로 돌진하지 않을 이성적 사고가 가능할까? 아니면 욕망에 이끌려 끝장을 보게 될까?
유타루체의 서쪽 지역을 공포로 물들였던 연쇄살인 사건도 용족이 저주로 쇠약해져 파멸 직전에 이른 결과로 해석할 수 있다.
후령사탑을 비롯한 죽음의 마법사들이 지금처럼 편히 돌아다닐 수 있는 시기는 없었다. 최근 몇 년 동안 대륙 곳곳에 죽음, 어둠을 추구하는 마탑이 들어섰다. 용금탄에만 크고 작은 죽음의 마탑이 다섯 개나 늘어났으니, 제국 전체를 고려한다면 단기간에 힘을 얻을 수 있는 죽음의 마탑은 그 수가 훨씬 많을 것이다.
그런데도 제국은…… 도시는…… 죽음의 마탑, 죽음의 마법사를 문제로 여기지 않는다. 마탑과 마법사는 이익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근근이 먹고 사는 사람들보다 몇 배, 때로는 몇십 배나 많은 세금을 내기에, 오히려 죽음의 마탑을 환영하는 도시도 있었다.
억측일지도 모른다. 세상을 속속들이 알지는 못하니까.
그때, 문이 열렸다.
몸을 일으킨 명국영은 희미하게 웃었다.
“어이, 거기서 뭘 하는 거지?”
륜사가 손을 흔들며 다가왔다.
“……이것들과 씨름 중이네.”
몇 마디 농담을 덧붙이려던 명국영은 륜사의 옷차림을 보고 그가 누구를 만났는지, 황제가 어디 있는지까지 깨달았다.
“맞아. 황제의 마법사 자리, 앉기로 결정했다.”
“잘 생각했어.”
“두고 보면 알겠지.”
“폐하께서 날 보자고 하신 건가?”
“……코빼기도 안 보이는 자넬 끌고 오라고 하시더군.”
“같이 가지.”
명국영은 륜사와 함께 중앙 문서고를 빠져나왔다. 기다리는 마차에 올라탄 그는 륜사의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폐하께서 궁녀와 동행하셨단 말인가?”
“공식 행사에 참석할 때마다 그 궁녀와 함께하셨지.”
“……그래?”
명국영은 몇 번 대면한 황제의 성품으로 볼 때, 여자에 푹 빠져 공과 사를 구분 못 할 인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궁녀의 역할은 황제에게 집중되는 시선 분산용일 것이다. 젊은 황제에게 어울리는 미녀라면 모두의 관심이 쏠릴 테니까.
중요한 점은 왜 시선을 분산시켜야 하는가, 바로 그 부분이었다.
때가 온 것이다.
등극 이후, 뿌리 깊은 영향력을 발휘하는 기존의 고위 관료들을 잘라 내는 모험 대신 그들을 껴안는 안정적인 지배 방식을 택한 황제가 제국을 자기 것으로 만들기 위해 드디어 칼을 뽑은 것이다. 적절한 이간책으로 승상, 어사대부, 대사마 그리고 환관장을 다룰 수 없다는 판단 때문이리라.
권력을 움켜쥐려는 자와 잡은 권력을 놓지 않으려는 자 사이에 벌어지는 이 피비린내 나는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넌 퇴보했군
철무는 육엽식을 한 입 베어 물고 오물거리며 며칠 전까지만 해도 금황사 본점이었던 건물로 들어서는 두 사람을 쳐다보았다.
금을 비롯한 각종 보석과 값비싼 장신구를 파는 금황사는 늘어난 빚을 감당하지 못해 본점 건물을 팔았다.
유천주의 출현으로 폭락한 부동산 가격 때문인지 금황사가 곧 파산할 거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용령 제국의 건국과 더불어 유타루체에 자리를 잡은 금황사는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보석 상점이었으나, 무리한 확장과 젊은 사장의 오판으로 반등의 기회를 잃고 말았다.
금황사가 매각한 5층 건물은 상류층이 거주하는 상아별로 중앙의 ‘반연하’ 광장 입구에 자리 잡고 있었다. 반가가 처음 배출한 시장의 이름을 딴 반연하 광장에는 고급스러운 상점이 들어서 있는데, 그 건물은 광장을 드나드는 길목이어서 소위 노른자위였다.
“왕우파가 저런 건물을 확보하다니…….”
비둘기를 내쫓고 기다란 돌 의자에 앉은 철무는 무시한 척 그 건물을 살폈다. 서쪽 지역에 기반을 둔 폭력 조직이 상아별로로 진출한 건 왕우파가 처음이었다. 왕우파를 이끄는 묘홍은 개인적으로 인정하는 사람이지만, 왕우파 홀로 저런 건물을 구입할 수는 없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