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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네 능력이면 백중파 내부로 들어갈 수 있지 않나?”
“…….”
눈빛이 흔들리는 류근묵.
“이미 요청을 받았군. 그렇지?”
“맞네.”
“자넨 백중파 안으로 들어가서 그자를 살피는 게 좋겠어. 난 바깥에서 움직일 테니까.”
“……알겠네.”
내키지 않았지만 해야 할 일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와 동시에 왜 진작 이런 생각을 가지고 뛰어들지 않았을까 류근묵은 자신에게 질문을 던졌다.
가끔 적절한 질문만 찾아내면 답은 저절로 떠오를 때가 있는데, 지금이 그랬다. 그는 거의 즉시 답을 알아차렸다.
그자에게 매료된 둘째, 셋째처럼 되고 싶지 않아서였다.
석현담처럼 그자를 주군으로 부르고 싶지 않아서였다.
이제 물러설 수는 없다. 가까이 다가가 그자의 비밀을 알아내어 폭로하거나, 그자에게 홀딱 반해 주군이라 부르거나.
둘 중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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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태는 일곱 명의 노인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저들의 성품, 취향, 지위는 일중에게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앉아 있는 자세와 얼굴 표정, 눈빛에는 그보다 더 많은 정보가 담겨 있었다. 탐욕에 물들어 옳고 그름에 상관없이 오로지 이익을 좇는 자, 현재 체계와 규칙을 유지할 수만 있다면 타인이 죽어도 상관없는 자 들이었다.
저들은 기득권을 유지하고자 철무를 추명에서 쫓아냈다. 그 사실만으로도 단태는 칠하를 판단할 수 있었다.
“저를 보자고 하셨다면서요?”
“험험, 그렇소.”
뚱뚱한 포역이 나섰다.
“말씀해 보시죠.”
일중에게 맡겨도 될 일이었지만, 하층민을 대변하는 추명과 관련된 일은 직접 챙기고 싶었다. 방단에게 잡혀 고문을 당했을 때, 추명은 소속 전사들을 시청으로 보내 단태를 구하려 시도했었다. 비록 성공하지 못했지만, 단태는 그 사실을 잊지 않았다.
“우리 추명은…… 백중파와의 관계에 대해 알고 싶소이다.”
포역은 대홍, 초용하를 힐끔거리며 말했다.
규율 집행을 담당한 초용하가 끼어들어 위엄 있게 말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소. 그동안 추명은 흑수파, 왕우파를 비롯한 암계 조직들과 긴밀한 협력 관계를 유지해 왔소. 한데, 백중파가 암계를 장악한 이후에 그 관계는 위험할 정도로 흔들리고 있소. 우리는 그 점에 대해 백중파의 뜻을 알고 싶소.”
“백중파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런 문제라면 흑수파, 왕우파를 직접 찾아가는 게 빠를 겁니다.”
“우릴 멍청이로 아시오? 백중파가 암계를 통일했다는 사실, 도시 전체가 다 알고 있소이다.”
정보 업무를 맡은 대홍이 차갑게 말했다.
“하하, 백중파가 있다고 칩시다. 뭘 원하십니까?”
“수입의 2할.”
포역이 말했다.
단태는 휘파람을 불며 일중을 쳐다봤다. 일중은 웃고 있었다. 늙은이들의 탐욕은 선을 넘었다. 하층민을 보호한다면서 이런 식으로 폭력조직에 돈을 뜯어낸다면, 그 부담은 고스란히 아래로 내려갈 것이다.
결국 저 늙은이들에게 추명은 돈을 버는 도구에 지나지 않았다.
“예전에는 3할이었소.”
포역이 덧붙였다.
“한 푼도 줄 수 없다면?”
표정을 굳힌 단태가 포역을 노려봤다. 대답은 다른 쪽에서 튀어나왔다. 호전적인 초용하가 말했다.
“전쟁이 시작되겠지만, 백중파가 아무리 강력해도 하층민 전체를 상대로 이길 수는 없을 것이오.”
“하층민 전체가 아니라, 돈독이 오른 늙은이들이겠지.”
단태는 더 이상 점잖게 말할 생각이 없었다.
“……뭐?”
“전쟁이든 뭐든 맘대로 해.”
일중에게 뒷일을 맡기고 본부 밖으로 나온 단태는 광장 중앙으로 걸어갔다. 란조가 날아와 어깨에 앉았다. 요즘 란조는 깃털 관리에 열심이었다. 그런 란조를 본 단태는 짝짓기 시기가 아닐까 생각했다.
분수대는 화려했다.
테두리와 기반암은 화강암이었으나 우뚝 서서 하늘을 향해 손을 뻗은 조각상은 청동 재질이었고, 그 옆으로 세 마리의 말이 질주하는 자세 그대로 자리를 잡고 있었다. 서로 다른 방향을 보고 있는 말의 입에서 물이 콸콸 흘러나와 분수대를 채웠는데, 풍만한 가슴을 드러낸 여인이 찰랑거리는 물 밖으로 몸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 여인의 하체는 물고기처럼 비늘로 덮였고, 끝에는 지느러미가 달려 있었다.
과연 상류층이 애용하는 광장답게 돈을 처바른 분수대였다.
장당전 앞에 솟아 있는 기둥도 필요 이상으로 정교했다. 건물 5층에 이르는 꼭대기에는 책을 든 대머리 노인의 조각상이 세워져 있고, 그 아래의 기둥 벽면에는 누구도 기억 못하는 전쟁의 장면이 돋을새김으로 덮여 있었으며, 아래쪽에는 다양한 꽃을 심어 인위적인 자연미를 강조하고 있었다.
광장 곳곳에 대리석 조각상이 서 있었다.
나체 혹은 가려야 할 곳은 벗고, 가리지 않아도 될 곳만 살짝 옷을 걸친 조각상은 사람의 몸이 얼마나 아름다울 수 있는지 경쟁적으로 보여 주었는데, 불량한 건달이나 사춘기 소년들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그 조각상들만 감시하는 관리가 따로 있었다.
단태는 분수대 난간에 걸터앉았다.
콸콸 흐르는 물소리가 시원했고, 마둔수탑보다는 낮지만 그래도 근처에서는 제법 높다고 자부할 만한 탑이 만든 그늘 덕분에 곰곰이 생각을 하거나, 중요한 보고서를 읽기에 좋았다.
두툼한 보고서를 꺼내 읽던 곳을 펼쳤다.
황제의 일거수일투족을 기록한 보고서에는 황제가 누구와 함께 있는지, 어떤 대화를 나누었는지, 무엇을 했는지 상세히 나와 있었다. 단태가 주목하는 부분은 당연히 설희와 관련된 내용이었다.
그 보고서를 통해 단태는 설희의 처지를 읽어 냈다. 황제는 공식적인 행사에는 설희를 대동했지만, 사적으로는 오랫동안 시간을 보내지 않았다. 일중은 조심스럽게 설희는 황제의 속임수라고 의견을 냈다. 단태도 그 점을 무시할 수 없었다. 황제는 목적을 위해 설희를 택했다. 굳이 설희여야 할 필요는 없었으리라.
사랑이 아니었다.
이용이었다.
노예보다는 낫지만, 오빠로서 만족할 만한 처지는 아니었다.
설희를 만나고 싶은 마음은 점점 커졌다. 상류층이 모이는 공식 연회에 뒷문으로 들어간다면 먼발치서나마 설희를 볼 수는 있으리라. 하지만 단태는 그런 식으로 설희를 보고 싶지 않았다. 당당하게, 자유롭게, 여유 있게 만나고 싶었다.
반연하 광장은 사람들로 붐볐다.
양산을 들고 귀부인을 쫓아가는 잘생긴 하인들, 귀부인이 구입한 물건을 양손에 쥐고 따라다니는 하녀들. 귀족 한 명이 부리는 하인, 하녀는 못해도 열 명은 되는 것 같았다. 어쩌면 체면을 세우려고 일부러 많은 하인, 하녀 들을 데리고 다니는지도 몰랐다.
“안녕.”
꾸며 낸 듯한 명랑함이 묻어나는 목소리.
단태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나비와 꽃이 수놓인 양산을 든 채 활짝 웃는 여자를 발견했지만, 가만히 쳐다보기만 했다.
“난 당주연이라고 해.”
“무슨 일입니까?”
단태로선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설마, 날 모른다는 거야?”
있을 수 없는,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라도 벌어진 것처럼 당주연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뒤에 서 있던 20대 초반의 여자들은 당주연이 듣지 못하도록 속닥거렸는데, 고소하다는 내용이었다.
“제가 알아야 하나요?”
단태의 말에 여자들에게서 억누른 웃음이 터졌다. 당주연이 사납게 노려보자 그 웃음은 기어들어갔다.
“당가일미 당주연, 이래도 모르겠어?”
“아하.”
단태는 당주연의 이목구비와 얼굴 윤곽에서 당고를 보았다. 직접 단태를 죽이러 왔다가 오히려 륜사에게 죽을 뻔했던 그 여자의 딸이 바로 당주연이었다. 자칭 당가 최고의 미녀라는데, 제법 봐줄 만했다.
“날 모를 수는 없어. 유타루체 사람이라면.”
잔뜩 뻐기는 당주연.
“무슨 일이죠?”
“당신에게 좋은 일이야.”
“그건 제가 판단하지요. 무엇을 좋아하는지는 저 스스로만이 판단할 수 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