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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들어 죽겠다.”
“해야 할 일이다. 해야 할 일이다.”
“……그래, 맞아.”
힘을 주려는 듯 머리 위로 올라와 부리로 정수리를 톡톡 쪼더니 란조는 날아가 버렸다. 닫힌 공간을 싫어하는 란조가 대연회에 참석할 생각이 없음은 단태도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당주연이 진홍색과 담청색이 잘 어우러진 연의를 입고 마차로 들어왔다.
“연랑복, 처음 입은 거야?”
“이런 걸, 연랑복이라고 부릅니까?”
“몰랐어? 정말 아는 게 없는 거야? 걱정 마. 내가 다 알려 줄 테니 나만 믿어. 매조랑, 오늘 진짜 재미있을 거야.”
당주연이 지시하자 마차가 출발했다.
평소와 달리, 당가의 정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줄을 지어 정문을 통과하는 여느 마차와 달리, 당주연의 마차는 기다리지 않고 옆에 있는 문으로 직행했다.
마차는 연회장으로 이어지는 계단 앞에 멈췄다.
단태는 정확히 48개의 계단을 뒤덮은 암녹색 비단을 보고 적잖이 놀랐다. 비단 재질의 옷도 고가여서 제대로 보지 못하며 어린 시절을 살았었는데, 발을 딛고 올라가는 계단에 저런 비단을 깔 줄이야.
순간, 대혈의 바닥에 깔린 황금이 생각났다.
“손을 잡아 줘야지.”
단태는 당주연의 손을 살짝 잡은 채로 계단을 올랐다. 구두의 굽이 높아서 걸음걸이가 자연스럽지 않은 당주연은 몇 번 중심을 놓쳤지만 단태가 재빨리 허리를 감싸 추락을 막았다.
연회장 입구까지 양쪽에 등불이 매달려 있었다.
어두워질수록 등불이 발하는 빛은 부드럽게 당가의 정원을 비추었다. 입체감이 살아나 밤의 정원은 더욱 신비로웠다. 등불의 위치마저 정확한 계산에 의해 결정되었음을 단태는 곧 깨달았다. 누가 정원을 관리하는지 궁금해졌다.
“그걸 왜 물어? 당연히 난 모르지. 정원사가 했겠지 뭐.”
당주연의 대답이었다.
연회장은…… 넓다는 말로는 부족했다. 뻥 뚫린 공간이었고, 천장마저 5층 건물 높이여서 조그만 소리도 울렸다. 입구 맞은편에는 각종 악기들을 손에 든 악공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둘로 나뉘어 둔중한 연주는 왼쪽, 가볍고 청명한 연주는 오른쪽이 맡는 모양이었다.
단태는 그 독특한 배치를 눈여겨보았는데, 곧 연주가 시작되자 왜 그런 식의 배치가 필요한지 알 수 있었다. 공간의 구조적 특성을 고려한 배치였던 것이다.
“뭘 보고 있어? 따라와. 돈으로는 절대 못 사는 걸 줄 테니까.”
당주연은 단태를 끌고 먼저 와 있는 사람들에게 데려갔다. 당가의 가신들, 여러 종류의 동업조합 대표들, 당가 출신 시법원 법관들을 비롯해 곧 도착한 11개의 유력 가문 사람들에게 단태를 소개했다. 물론 백중이라는 이름으로.
노골적으로 깔보는 그들의 눈빛과 태도를 본 단태는 낯선 세계에 들어와 있음을 실감했다.
이들은 도시의 상층부에 자리 잡은 사람들이다. 지시받기보다는 명령을 내리는 데 익숙하고, 가난보다는 풍족함이 당연하며, 태어난 순간부터 결핍이 무엇인지 모르고 살아온 사람들의 세계였다.
참 재미있었다.
유타루체는…… 들여다볼수록 생소한 무언가가 튀어나오는 상자 같았다.
처음 물의 도시에 왔을 때는 노예 제도에 호되게 당했었다. 마둔수탑에서는 노력하면 원하는 결과를 일부라도 얻을 수 있다는 점, 운 나쁘면 누명을 뒤집어쓰고 죽을 수도 있다는 점을 배웠다. 유천주에게 끌려갔다가 돌아온 후, 암계를 통하여 내면에 커다란 구멍이 난 사람들을 접했는데, 여긴 또 다른 사람들이 사는 세상이었다.
거드름 피우는 법관 한 사람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억울하게 잡혀 재판을 받게 된 3년 전의 단태에게 시종일관 유죄를, 가혹한 형벌을 선고하려고 애를 쓴 그 법관이었다. 당시, 단태는 그가 저승사자처럼 느껴져 벌벌 떨었다.
“안녕하십니까?”
“……누구시더라?”
가늘게 뜬 눈으로 단태를 훑어보는 민도관은 저울질을 하고 있었다. 옷차림만 보면 괜찮은 집안 출신 같은데, 얼굴은 본 적이 없어서였다.
“당주연과 함께 온 백중이라고 합니다.”
“백중? 혹시 백중파를 이끄는 그 백중?”
“백중파는 존재하지 않지만, 많은 사람들이 절 과할 정도로 대접해 주고 있긴 합니다.”
단태는 묘한 말투로 부정하지 않았다.
“깡패 새끼가 올 자리는 아닌 것 같은데.”
싸늘한 말투.
“탐관오리가 올 자리도 아니죠.”
당주연이 끼어들었다.
“험험…… 당가일미께서 왜 이런 잡종을 데리고 왔는지 이해할 수 없군.”
“이 사람을 무시한다는 건 곧 나를 무시하는 거고, 나를 깔보는 건, 당가 전체를 업신여긴다는 거예요.”
“……그럴 마음은 없네.”
당주연과 갈등을 빚어 득 될 게 없다고 판단한 민도관은 다른 사람을 아는 척하면서 자리를 떴다.
“돈 밝히는 법관으로 유명한데, 아는 사람이에요?”
당주연이 물었다.
“네.”
“왠지 악연 같은데, 그렇죠?”
“사람 마음을 읽는 재주도 가진 줄 몰랐습니다.”
“내가 좀 눈치가 빠르거든. 그보다, 언제까지 존대를 할 거야. 나보다 나이가 많아 보이는데, 아니야?”
“이런 말투, 경고입니다. 나쁜 남자니까 결코 다가오지 말라는 뜻이죠.”
당주연은 까르르 웃었다.
“나도 좋은 여자는 아니야.”
“그렇습니까?”
단태는 빙긋 웃었다.
감미롭던 연주가 웅장하면서도 깊이가 있는 음악으로 바뀌었다. 사람들은 일제히 대화를 멈추고 악단 사이의 문을 쳐다봤다. 문이 열리고 황금빛 연랑복을 입은 황제가 걸어 나왔다. 그 옆에 아름다운 설희가 서 있었다.
단태는 설희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기가 막히게 운 좋은 여자야. 황궁 변두리에 머물다가 황제의 눈에 띄었다잖아. 정말 부러워.”
당주연이 속삭였다.
황제와 설희가 정해진 자리에 앉자, 다시 음악은 발랄하게, 경쾌하게 바뀌었다.
당주연에게 이끌려 11개 유력 가문의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면서도 단태는 자신도 모르게 설희를 힐끔거리고 있었다. 대연회가 어색하고 불편한지 자꾸 뒤를 보는 설희의 시선을 좇으니, 거기 위연미가 서 있었다.
반우현이 설희 옆에 붙인 감시자일까? 아마도 그럴 것이다.
당현추는 조카가 데려온 남자가 마음에 들지 않는지 눈살을 찌푸렸다.
“황제 폐하께서 참석하신 연회다. 경거망동은 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
“알고 있어요. 하지만…….”
막무가내 당주연도 당가의 가주 앞에서는 꼬리를 내렸다.
“자네.”
가주는 조카의 말을 끊고 단태 앞에 섰다.
체구보다 훨씬 위압적인 태도였지만 단태는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당가의 가주는커녕 황제가 다가온다고 해도 위축될 단태가 아니었다. 누구든 용과 3년 가까이 살면 심장과 간이 튼튼해진다.
“말씀하십시오.”
“이왕 왔으니, 내쫓지는 않겠네. 허나, 조용히 즐기다가 가 주게.”
“그러죠.”
그때, 백율운현이 끼어들었다.
“아, 이게 누구세요? 백중 씨, 맞죠? 내가 초대장을 보냈는데 알은척도 하지 않더니, 이 아가씨와 함께 온 거에요? 실망이에요.”
“……방단의 수장께서 아는 사람입니까?”
당현추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상대는 천황패를 손에 쥔 백율가의 대표였다. 방단의 수장이라는 지위도 부담스러운데, 천황패까지 손에 쥐다니.
“제 생명의 은인이에요. 가문 내부의 일이라, 자세한 이야기는 할 수 없지만요.”
백율운현은 백중이 누구인지 몰랐다.
그저 단태를 거쳐 그녀에게 전해진 유천주의 지시를 통하여 백중이 중요한 인물임을 알았을 뿐이다. 백율운현에게 탄면을 쓴 모습을 단태는 한 번도 보여 주지 않았고, 그 때문에 그녀는 백중이 단태라는 사실을 전혀 알 수 없었다. 단태가 목소리와 분위기마저 바꾸었던 것이다.
“은인? 제가 몰라보고 실례를 했군요.”
당현추는 정중하게 사과했고, 단태도 예의를 갖추어 그 사과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