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단태신곡-239화 (239/293)

<-- 239 회: 6-31 -->

빚을 체질적으로 싫어하는 상류층 인물답게 당현추는 단태를 데리고 유력 가문의 가주, 경비대장, 시청의 고위관리 등에게 소개시켰다. 친절을 베풀어 무례로 인한 빚을 갚은 것이다.

단태는 한 사람, 한 사람 만나면서 그들이 어떻게 도시의 꼭대기에 올라서 있는지 깨달았다. 전부는 아니지만, 상당수는 그 자리에 합당한 실력을 지니고 있었다. 출신 가문이 좋다고 해서 오를 수 있는 자리가 아니었다.

특히 경비대장 구변웅은 유력 가문 출신이 아니었다. 상인의 아들로 경비대에 들어온 지 40여 년 만에 경비대장의 자리에 오른 것이다.

이들은 치열한 경쟁에서 살아남은 생존자였다. 백율운현을 통해 유력 가문 내부가 얼마나 냉혹한지 단태는 알고 있었다. 단태가 경험했던 것처럼, 이들도 잘못된 위치에 서 있다는 이유로 벌을 받고, 목숨까지 잃는다. 직접 오르기 전에는 튼튼한지, 부실한지 알 수가 없는 수십 개의 사다리를 적절히 이용하여 꼭대기까지 오르는데 성공한 자들에게서 흘러나오는 자부심은 결코 허영이 아니었다.

단태는 그들에게서 동질감 비슷한 것을 느꼈다.

단태가 마둔수탑에서, 용혈에서 살아남았듯 그들 또한 자신에게 주어진 냉혹한 세계에서 살아남았던 것이다. 기분이 이상했다. 시장을 비롯해 유력 가문의 가주들이야말로 유타루체를 망친 장본인이라고 생각했건만, 직접 만나본 그들 대부분이…… 뛰어난 인물이었다.

그때, 한 사람이 단태 앞에 섰다.

“……안녕하십니까?”

명국영은 공포의 떨림을 숨기고 물었다.

“오랜만입니다.”

단태는 상황 판단이 정확하고 예리한 명국영이라면 이런 곳에서 난동을 부릴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잠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까요?”

“얼마든지요.”

단태는 명국영과 함께 바람을 쐴 수 있는 창가로 향했다. 주로 은밀한 이야기를 나누기에 적합한 곳이었다.

“……이곳에는 왜 오셨습니까?”

“초대를 받았으니까.”

그 순간, 단태는 인간보다는 용족의 입장에 섰다. 유천주라면 어떤 말을 했을까 고민한 후에 대답을 했던 것이다.

“혹시, 제게 ≪지완수≫를 보내셨습니까?”

“맞아.”

단태는 사라진 그 책이 명국영에게 갔음을 지금 알았지만, 일부러 진실을 숨겼다.

“정말 여쭈고 싶은 질문은…… 위대한 존재께서 3년 전에 데려간 소년에 대한 겁니다. 그 소년은 어디에 있습니까?”

“…….”

말문이 막혔다. 하둔 덕분에 생각할 시간은 많은데도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만약 인간을 파멸로 몰고 갈 생각이라면, 인간족의 일원으로서 결코 좌시하지 않을 겁니다.”

“파멸? 난 공존의 가능성을 탐색하고자 여기 와 있다.”

단태는 ‘공존’을 강조했다.

“……믿을 수 없습니다.”

“이 도시는 나를 향해 선전포고를 했다. 원정대를 용혈로 보낸다는 결정 자체가 전쟁을 시작했다는 증거가 아닌가. 내가 여기 있는 인간을 모조리 죽인다고, 그건 정당한 행위다. 전쟁이니까. 허나, 난 지금 여기서 평화롭게 용을 신뢰할 수 없다는 인간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 이 정도면 충분한 설명이 된 것 같은데.”

“백중파, 왜 만드셨습니까?”

명국영은 심문하듯 물었다.

슬슬 부아가 치밀어 오르는 단태.

“너라면 백중파의 목적을 파악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아, 백중파를 깊이 있게 조사하지 않았군.”

“……문서보관소에서 흐름을 보았습니다.”

“단태라는 아이에게 듣기로, 너는 한 가지 사실로 한 가지 결론을 내리는 과정을 혐오한다던데. 다양한 관점을 지닌 사실들을 분석하고 종합할 때에만 진실이 드러난다고 그 아이에게 가르치지 않았나? 서류 더미에서 찾은 게 진실의 전부라고 생각하나? 그 아이는 성장했는데, 넌 퇴보했군.”

“…….”

명국영은 할 말을 잃었다. 압도적인 용의 힘 때문이 아니라, 그 말이 옳았기 때문이다.

“그 아이는 살아 있다.”

“……어디에 있습니까?”

“이 도시 어딘가에 있겠지. 그 아이가 왜 널 찾아가지 않을까 궁금하겠지. 찾아가지 않는 게 아니라, 찾아갈 수 없었을 거다. 바다로 흘러든 물은 결코 강물로 되돌아가지 않는 법이지.”

단태는 이맛살을 찌푸리고 생각에 빠진 명국영에게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는 게 나을지 고민했지만, 아직은 아니라고 판단을 내렸다.

“……찾아올 수 없었다니? 그런 생각은 해본 적이 없는데.”

명국영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문득 암탄주가 웅크린 용혈로 가기 위해 잠시 들렸던 용금탄의 광릉축제가 생각났다.

축제를 구경하기 위해 가면서 명국영은 광릉축제의 기원을 설명했다. 거인 광릉을 기념하는 축제라는 내용인데, 당시 ≪무무비경≫을 읽은 지 이틀밖에 되지 않았던 단태가 광릉과 군왕을 멋지게 연결시켰다.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생각마저도 받아들인 광릉을 군왕에 비유한 것이다.

아마도 그때, 단태의 그릇을 처음 발견한 것 같다.

단태는 지금 뭘 하고 있을까?

내면의 그릇은 얼마나 커졌을까?

순간, 깨달음이 뇌리를 스쳤다.

단태는 노예 신분으로 마둔수탑에 들어섰지만, 결국 종자장의 위치에 올랐다. 운이 좋아서가 아니었다. 마둔수탑이라는 특별한 세계가 어떤 식으로 돌아가는지, 어떤 구조를 가지고 있는지, 어떻게 해야 꼭대기로 올라갈 수 있는지 깨달았고, 그 지혜를 실천으로 옮겨 결과를 만들어냈다.

그런 아이가 용혈로 갔다면?

거기서 살아남았다면?

용혈이라는 낯선 세계에 적응하고, 그 세계의 규칙을 알고, 그 꼭대기에 이르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했으리라.

그렇다면 단태야말로 용족의 세계, 용족의 사고방식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인간으로 성장했을 것이다. 단태는 용을 어떤 존재로 생각할까? 단태는 용과 인간의 공존을 가능하다고 판단할까?

명국영의 눈에 빛이 어렸다.

“……인간과 용의 공존 가능성, 혹시 단태 생각입니까?”

“확실히 대책이 안 서는 멍청이는 아니군.”

“그, 그렇다면 단태는 지금 용과 인간의 중재자 역할을 하고 있군요! 위대한 존재여, 내 말이 맞습니까?”

단태는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누구나 자유롭게 생각할 수 있다고 자신하지만, 실상 사고방식은 습관이라는 기반 위에 세워진 복잡한 구조물이었다. 습관은 보이지 않는 그물처럼 생각의 물고기를 가둔다. 인식하기 어렵기에 바꾸기는 더 어려운 게 바로 생각의 습관이었다.

명국영은 자극에 열려 있는 사람이었다. 비록 스스로 소화하기 어려운 자극이라고 해도 무조건적으로 배척한다기보다는 다른 가능성은 없는지 생각하는 습관을 가진 인물이었다. 그 반성의 습관이야말로 명국영을 명국영답게 만드는 기질의 근원이었다.

단태는 명국영 앞에 자신을 드러낼 수도 있지만, 다른 이유로 그 충동을 참았다. 위대한 존재는 필요하다. 만약 유천주가 죽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원정대는 즉시 용혈로 내려갈 것이다. 명국영도 기존의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할지도 모른다.

“여기 있었어? 내가 얼마나 찾았는데.”

당주연이 난간으로 다가왔다.

유익한 대화는 끝났다.

단태는 당주연과 함께 도시 상층부의 사람들을 더 깊이 관찰하기 위해 연회장으로 들어갔다. 노예 매매소, 마둔수탑, 용혈, 암계에 이어 직면한 새로운 세계는 어떻게 움직이는지, 어떤 규칙이 숨어 있는지 알고 싶었다.

그래야 그 세계의 꼭대기로 올라설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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