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단태신곡-240화 (240/293)

<-- 240 회: 6-32 -->

*개인이 사라진 세계

석장명은 더듬더듬 읽는 사내들의 묵직한 목소리를 듣고 있었다. 어릴 때 배워야 할 글을 지금 익히려니 쉽지 않은 듯 여기저기 투덜대는 소리가 들렸지만 한 명도 포기하고 뛰쳐나오지 않았다.

그동안 무척 궁금했다. 아들이 무엇을 하는지 알고 싶었지만 시간을 내어 찾아올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처음부터 석현담이 죽지 않았음을 그는 알고 있었다. 그저 아버지로서 아들의 뜻을 무시하지 않으려고 가만히 있었을 뿐이다.

아들은 의외의 길을 걷고 있었다.

이름까지 일중으로 바꾸고, 암계라 불리는 뒷골목 세계를 손쉽게 장악해 버렸다. 거기까진 그리 놀랍지 않았다. 오히려 아들의 행보에 실망감마저 들었다.

그러나 물리적 힘이 아닌, 다른 것으로 수천 명에 달하는 거친 사내들을 하나로 묶고, 까막눈들에게 글까지 가르치는 모습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황제도 해낼 수 없는 일이었다.

기침이 터져 나왔다. 입을 막은 소매에 피가 묻었다. 죽음이 가까운 곳에서 손짓하고 있었다.

“영감, 어디 아파?”

지나가던 사내가 물었다.

“……괜찮네.”

“아픈 것 같은데, 꼭 의사를 만나 봐. 왠지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생각나서 그래.”

생면부지의 사내는 석장명의 손에 금화 몇 개를 쥐여 주었다. 불쌍한 사람을 돕기엔 액수가 과했다.

그 사내만 그런 게 아니었다.

석장명은 그저 기침 몇 번 하고, 피 묻은 소매를 드러낸 채로 서 있다는 이유로 금세 10마전을 벌었다. 젊을 때, 황가를 위하여, 황제를 위하여 살기로 결심한 이후 제국 곳곳을 돌아다녔던 그였기에 지금 상황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이런 변화는…… 설명이 불가능했다. 굳이 비유한다면, 사나운 늑대가 하루아침에 온순한 양이 된 것이다.

석장명은 서쪽 지역을 돌아다니며 소위 백중파라 불리는 조직의 평판을 살폈다. 다들 환영하는 분위기였다. 술 마시고 행패를 부리지도 않고, 과한 상납금을 요구하지도 않으며, 무엇보다 폭력조직 특유의 변덕이 사라졌다는 게 상인들의 반응이었다. 일부는 노골적으로 뇌물을 요구하는 경비대나 시청의 하부 조직보다 더 깨끗하고 신뢰할 만하다고 말했다.

석현담 그 아이가 이런 변화를 일으켰을까?

아들을 과대평가하기 좋아하는 아버지라면 그런 생각에 기분이 좋겠지만, 석장명은 냉철한 사람이었다. 석현담은 아니다. 아마 백중이라 불리는 그 사내일 것이다.

그자는 어떻게 사람들을 바꾸었을까?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아무리 살펴도 알 수 없고, 믿을 수도 없는 게 사람의 마음인데.

석장명은 시장 중앙에 덩그러니 세워진 조각상 옆 계단에 앉았다. 늑대 조각상은 다리와 꼬리가 부서졌지만 누구도 고칠 생각이 없는 듯했다. 무릎이 욱신거렸고, 등이 아팠다. 천마의 경지에 올라도 노화로 삐걱대는 육체를 고칠 수는 없었다.

“어디 아프십니까?”

목소리에서 바람이 느껴졌다. 서늘한 미풍이 담긴 목소리는 듣기만 해도 마음이 산뜻해졌다.

“……아닐세.”

고개를 든 석장명은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평범한 얼굴에, 평범한 눈빛이었다. 한데, 왜 이리 기분이 좋을까? 비온 뒤의 숲을 보는 것처럼 청량한 무언가가 마음으로 스며드는 것만 같았다.

“잠시 옆에 앉아도 될까요?”

“얼마든지.”

석장명은 그를 힐끔 봤다. 그는 시장을 오가는 사람을 쳐다보면서도 그 너머에 있는 무엇인가를 바라보는 느낌이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아드님이 죽었다고 편지를 보낸 사람입니다.”

그가 말했다.

“…….”

석장명은 이 사내가 백중이라고 확신했다.

“직접 보셨겠지만, 일중은…… 석현담은 평생 걸을 길을 찾았습니다.”

“난 그 아이를 흔들려고 온 게 아닐세.”

“죽을힘을 다해도 쫓아갈 수 없고, 인정받기는 더더욱 힘든 사람이 아버지라면, 그 존재만으로 아들은 흔들릴 수 있습니다.”

“……하긴.”

석장명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들의 속내를 어렴풋이 알면서도 오랫동안 다가갈 수도, 위로할 수도 없었다. 그럴 여유가 그에겐 없었던 것이다.

“얼마 남지 않았군요.”

그는 석장명을 정면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자네 같은 인물이 있다니, 역시 세상은 넓군.”

“만나 보십시오.”

“그럴 생각으로 왔는데, 직접 보니…… 어느 쪽이 좋을지 확신이 서지 않는군.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오직 그 아이만을 위해 결정을 내리고 싶네. 아버지로서 말이야.”

“그렇다면 만나야 합니다. 데리고 오겠습니다.”

그가 일어서자, 석장명이 물었다.

“……어떻게 사람들을 바꾸었나?”

“간단합니다. 그들이 원하는 걸 주면 됩니다.”

“돈으로는 그런 변화가 생기진 않네.”

“돈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숙인 그는 시장을 벗어났다.

석장명은 품에서 꺼낸 알약 몇 개를 입에 털어 넣고 삼켰다. 바늘처럼 찌르는 통증이 줄어든 느낌이었다.

그는 원하는 것을 채워 주었다고 대답했다. 대체 무엇을 주었을까? 석장명이 아는 세상에서 서로를 신뢰하며 주고받을 수 있는 유일한 매개체는 돈이었다. 신뢰도 돈으로부터 출발한다.

인정하기 싫지만, 석장명은 어느새 그를 신뢰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몇 마디 나누지도 않았다. 그에게 받은 것은…… 숲이 뿜어내는 것 같은 청량한 분위기뿐이었다.

그런데 왜 그와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을까? 왜 그가 무엇을 원하는지 궁금할까? 아들 때문에? 아니었다.

평생 명료한 사고방식을 유지한 석장명은 자신이 그를 좋아하고 있음을 인정했다. 이유는 없다. 마치 사내가 아름다운 여인을 보자마자 열정에 사로잡히듯, 백중이라는 사람이 마음에 들었던 것이다.

석장명은 빙긋 웃었다. 아들이 괜찮은 사람을 만난 까닭이다. 한편으론 아들이 부러웠다. 과거 그가 섬겼던 황제도, 현 황제도 그릇의 크기만 따지자면 저 사내보다 못했다.

황제라는 자리가 시야를 좁게 만들었다. 광활한 세상을 가슴이 아니라 머리로 보도록 황궁이, 주위 환경이 황제를 흔들었다. 왠지 저 사내 곁에 있으면 세상을 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아들이 걸어왔다.

천천히.

숱한 위기를 뚫고 지금에 이른, 황마사로서 처음으로 천마의 경지에 올라 그 어떤 일에도 흔들리지 않으리라 자신했던 석장명은 순간 당황했다.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때, 아들이 먼저 와서 앙상한 아버지를 안았다.

부드럽게.

아버지도 아들을 안았다.

어색하지만 단호하게.

생각해 보니, 처음으로 아들을 안았다. 어릴 때부터 혼자 자란 아들이었다. 대의를 위한답시고 아내와 아들을 내팽개친 아버지를 저주할 수도 있는데.

“전, 아버지가 자랑스러워요.”

석장명은 목이 멨다.

“혼자 어머니 장례를 치를 때는 좀 야속했지만요.”

“……미안하다.”

생애 처음으로 아들에게 사과를 했다.

“아버지?”

“나도 네가 자랑스럽구나.”

이번엔 아들의 몸이 떨렸다.

두 사람은 소리 없이 그동안의 삶을 나누고 있었다. 누구도 엿볼 수 없는 감정의 교환이 거기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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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가 머무는 객관 군강검은 상아별로 동쪽에 자리 잡고 있었다. 언덕 위에 들어선 군강검 주변은 나무 한 그루 없는 공터로 잔디만 깔려 있어, 근위기사단의 감시를 뚫고 접근하기가 까다로웠다. 견고한 화강암을 반듯하게 잘라 쌓은 건물은 튼튼하기 짝이 없었고, 창과 옥상은 성채를 닮아 방어에 유리했다.

기사단장 계효상은 옥상으로 올라가 어둠이 내려앉은 군강검 인근 지역을 눈으로 훑었다. 위험 요소는 느껴지지 않았지만, 그날을 잊을 수가 없었다.

용병 새끼 따위가 감히 황제 폐하를 죽이려 뛰어들다니!

그것도 황궁에서!

다행히 암살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지만, 현 황제의 지배를 반대하는 세력이 얼마나 대담한지 보여 주었다. 그 사건으로 황궁 방어를 책임진 자들이 줄줄이 죽거나, 옷을 벗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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