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5 회: 6-37 -->
백중파는 동업조합에 불을 붙였다.
이미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착각에서 벗어난 동업조합은 무한한 가능성을 시험했고, 그로 인해 찾아낸 결과는 또 다른 가능성의 출발점으로 작동할 수 있었다. 백중파 내부로 들어온 동업조합은 마치 되살아난 조각상처럼 자유롭게 움직이며 놀랄 만한 결과를 보여 주었다. 자연스럽게 백중파라는 거대 조직이 창출해내는 부의 규모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다.
유력 가문의 매출은 줄어들지도, 늘어나지도 않았다.
가을에 접어들 무렵, 백중파의 매출은 줄잡아 열 배나 늘었다. 이익은 전체적으로 백배나 증가했다. 유타루체에서 백중파가 차지한 부는 전체의 3할에 달했다. 당가의 부와 맞먹는 규모였다.
백중파에 소속된 사람들의 수가 1만 명을 넘어설 무렵, 단태는 크고 작은 지류가 모인 강물이 바다로 흘러드는 것처럼 갖가지 감정, 기억, 의지가 그에게로 서서히, 꾸준히 흘러든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인상적인 장면, 마음을 찔러 상처를 입힌 말, 목숨을 끊고픈 절망, 몸이 날아갈 듯한 희열 등 사람들의 마음에 담겨 있던 것들이 자연스럽게 단태의 내면을 채웠다.
1만여 명의 감정, 경험, 기억 그리고 행동은 차곡차곡 단태의 머릿속에 쌓였다.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중막의 황량한 풍경을 볼 수 있었다. 약초의 종류가 얼마나 되는지, 각 약초의 효능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는데, 마치 단태 자신이 오랫동안 약초꾼으로 심산유곡을 뒤진 것만 같았다.
유치하지만 나름대로 진지한 아이들의 감정은 물론 죽음을 목전에 둔 노인의 마음도 맛보았다. 남자와는 다른 여자의 사고방식도 접할 수 있었고, 몇 마디 말로 규정할 수 없는 삶의 다양성을 그 압도적인 경험, 감정, 기억의 폭을 통해 배울 수 있었다. 암탄주의 유산 덕분에 가질 수 있었던 용족의 기억력으로도 다 담지 못할 만큼 백중파 사람들이 단태에게 쏟아 내는 경험의 양은 막대했다.
또한 1만여 명의 사람들이 주위 사람들로부터, 혹은 신문과 책으로부터 받아들이는 다양한 지식까지 단태에게로 밀려왔다. 단태는 크게 애를 쓰지 않았는데도 유타루체 내부의 사정은 물론 제국의 전체적인 상황을 알 수 있었다.
북쪽 국경선 너머에 자리 잡은 맹진국의 판금우가 무슨 짓을 하는지, 방염루체의 시장이 얼마나 무모한지, 대사마 좌영윤이 얼마나 허술한지 등 제법 가치 있는 정보들도 그 어마어마한 지식의 더미에 숨겨져 있었다.
업무의 특성상 거래를 위해 출장을 자주 다녀야 하는 사람들의 경험은…… 매우 직접적으로 진실을 알려 주었다. 한 사람의 경험은 불완전하고, 제한적이어서 해석의 여지가 적지만, 수백 명의 사람들 경험이 합쳐지는 순간, 정보에서 특별한 의미를 뽑아낼 수 있었다. 특히 윤가학관의 교수들이 가진 식견은 단태가 이전의 사고방식에서 벗어나 새로운 관점을 가질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책을 자주, 많이 읽으면 어떤 책이 양서인지 금세 판단할 수 있는 것처럼, 압도적으로 많은 정보의 홍수에 빠져 있다 보니 단태도 본능적으로 정보의 가치를 판단할 수 있게 되었다. 그로 인해 급류를 따라 굴러다니는 보석의 원석을 놓치지 않았고, 명국영식 사고방식으로 가공해 보다 가치 있는 보석을 완성할 수 있었다.
단태 자신은 몰랐지만, 그 누구도…… 심지어 황제조차도 단태만큼 풍부한 정보를 갖추지 못했다. 백중파는 의도치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제국 최대의 정보 조직으로 성장해 있었다. 백중파에 소속된 조직원들은 주관적 판단을 배제한 채, 상황을 최대한 객관적으로 전달하는 염탐꾼이었다. 어느 정보 조직도 1만여 명의 성실한 첩자를 거느리진 못했다.
결존계의 영향력은 상호 교환적이다.
백중파에 소속된 사람들은 점차 생각이 명료해졌다. 가물가물하던 상품 목록도 쉽게 기억할 수 있었고, 머리가 나빠 글을 포기했던 사람들은 가르치는 교사가 놀랄 만큼 똑똑해졌다. 여기저기서 신동 소리를 듣는 아이들이 나타났고, ≪무무비경≫을 줄줄 외는 아이들도 제법 있었다.
특히 단태 가까이 있는 사람들의 변화가 두드러졌다.
일중은…… 여기저기서 올라오는 보고서를 훑기만 해도 그 내용을 머릿속에 집어넣을 수 있었다. 또한 암기한 보고서를 다각적으로 검토해 어떤 방법이 적절한지 머릿속으로 결론을 내릴 수도 있었다. 대규모 조직 운영은 처음이어서 관련 서적을 섭렵했는데, 낯선 영역인데도 이해는 어렵지 않았다.
묘홍, 종보예, 학용, 광월 등도 긍정적인 영향력에 노출되어 제각기 다른 방식으로 성장했다. 재정 운용법에 눈을 뜬 묘홍, 병법에 뛰어든 종보예, 금융을 깊이 파고들기 시작한 학용, 체계적인 무술 수련에 열중하는 광월 등 자신이 있는 분야를 정해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몰두했기에 성과는 눈부셨다.
결존계의 효과가 눈으로 드러나자, 단태는 기대 반 염려 반이었다. 사람들이 알을 깨고 밖으로 나와 새로운 세계, 이전에 존재했지만 이제야 제대로 발견한 세계를 접하고 달라지는 모습은 기적이었다. 하지만 돈이나 권력으로는 만들어 낼 수 없는 변화의 이유를 누구보다 잘 알기에 염려는 떠나지 않았다.
저 사람들의 변화, 근원적일까?
아니면 결존계로 인한 일시적 변동일까?
답을 찾을 수 없어, 마음이 무거웠다.
바람에 담긴 가을의 향취를 느낀 어느 날, 단태는 불쑥 내면으로 파고든 타인의 경험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거지로 살다가 백중파의 조직원이 된 후, 처음으로 돈을 벌어 친구들을 기루로 데려간 사람의 기억인데, 단태는 벌떡 일어서고 말았다.
스치듯 지나간…… 중년 여자 때문이었다.
단태는 미친 사람처럼 평소 머물던 본부 건물을 빠져나가 서쪽 지역으로 달렸다. 백중파가 그가 사용하도록 구입한 전용 소마선을 탈 수도 있지만, 물 빠진 주황색의 지붕이 빠르다고 판단했다. 기루와 주점이 밀집한 차망로에 들어선 그는 기억에서 본 기루를 찾기 시작했다.
대략 한 시간 후, 단태는 취영루 앞에 서 있었다. 기억 속의 그 기루였다. 마음이 떨려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손님인 척하며 들어선 단태에게로 짙은 화장으로 얼굴을 강조한 기생들이 다가섰다. 그 중 하나가 단태를 알아봤다.
“아! 백중님, 아니세요?”
그러자 다른 기생들도 맞장구를 쳤다.
취영루는 대표하는 기생이 단태를 맞이하러 나왔다. 소영이었다. 백중파를 이끄는 거물이 홀로 기루로 찾아왔다는 사실에 부담을 느꼈지만, 그녀는 속을 숨기고 단태를 조용한 정자로 안내했다. 후원과 운하 사이에 자리 잡은 조그만 정자는 시야가 트여 있어 전혀 답답하지 않았다.
“무슨 일로 오셨는지요?”
소영은 조심스러웠다.
“용봉고 때문은 아니니, 염려하지 않아도 됩니다.”
단태는 이미 취영루가 용봉고라는 조직의 근거지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많은 것을 알고 계시는군요.”
“주위에 사람들이 많다 보니, 이것저것 듣는 것도 많게 되네요.”
“그럼, 즐거운 시간, 보내십시오.”
소영은 끝까지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백중파가 기존의 조직과는 완전히 다르다는 점을 알지만, 그래도 용봉고의 존재를 아는 이상 조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술과 음식이 나오자, 단태는 혼자서 술을 네댓 잔 마셨다.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서였다. 그 사람의 기억에…… 엄마가 나왔다. 엄마는 이곳에 있었다. 잠시 들린 손님이 아니라, 이곳에서 일하는 사람이었다.
정자에서 벗어나 뒷짐을 지고 여유롭게, 실상은 여유를 가장하며 취영루 곳곳을 돌아다녔다. 음식을 만드는 주방, 술이 익는 창고, 여인네들의 숙소 등 그를 따르는 시선을 알면서도 곳곳을 살폈다. 그러다 우물가에서 보고 싶었던 얼굴을 찾았다.
단태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죽었다고 생각했던 엄마가…… 거기 있었다.
간간히 웃음을 터트리면서.
엄마는 살아 있었다. 누마탄의 저택에서 죽은 게 아니었다. 흘러나온 눈물을 소매로 재빨리 닦았다.
당장 다가가서 꽉 안고 싶었다. 아들이 돌아왔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럴 수 없었다.
백중이 단태라는 사실을 말해 버린다면, 백중파에 어떤 변화가 있을지 가늠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천마의 경지에 오른 석장명의 아들을 책사로 두고, 무려 1만여 명의 조직원을 거느린 수수께끼의 남자 백중이 실은 노예 출신에 반역죄로 재판을 받았던 애송이라는 사실이 알려진다면, 사람들이 받을 충격은 결코 작지 않으리라.
현재 백중파는 백중이라는 사내 개인이 가진 기이한 매력, 위엄, 설명할 수 없는 분위기 덕분에 지탱되고 있었다. 진실이 밝혀진다고 해도 곁을 떠나지 않을 사람들도 있겠지만, 대다수는 실망하며 과거로, 성장 이전의 삶으로 돌아가 버리고 말 것이다. 결존계의 영향력은 분명히 존재하지만, 백중파 소속이었다가 자기가 원하는 삶을 선택하여 떠나는 사람들의 존재를 고려한다면, 강제적인 힘은 아니었다.
결국, 단태는 엄마에게 자신을 알리지 않았다. 그저 엄마를 물끄러미 쳐다볼 뿐이었다. 엄마를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만족할 수 있었다. 적어도 지금은.
“여기 계셨군요.”
소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