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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을 지운 단태가 천천히 돌아섰지만 침묵을 지켰다.
“……취영루마저 집어삼키려고 오신 모양인데,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소영은 차망로에 자리 잡은 몇 개의 기루가 며칠 전 백중파의 일원이 된 점을 비꼬았다.
한참 만에 단태가 입을 열었다.
“고맙습니다.”
소영은 말문이 막혔다.
“문제가 생기면 말씀하십시오. 도와 드리겠습니다.”
그 말을 남긴 단태는 취영루를 떠났다.
상아별로 입구에 자리 잡은 백중파 본부 앞에 백율운현이 서성거리고 있었다. 단태는 그녀가 왜 왔는지 잘 알았다.
백율운현이 다가왔다.
“한참 찾았어요.”
“무슨 일이죠?”
“……오해를 풀고 싶어서요. 이미 알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백율가는 백중파를 보호하기 위해 애를 썼어요. 하지만 다른 가문들이 워낙 강경해서 막을 수가 없었어요.”
“이해합니다.”
단태는 몇 번 질문을 던지면 금세 대답이 곤궁해질 여자를 보며 웃었다.
“아, 다행이에요.”
“그보다, 그 일을 서둘러 진행하는 게 좋겠습니다.”
“그 일이라면?”
“단태.”
“당연히 생각해 둔 게 있죠. 누명을 벗기는 건 어렵지 않을 거예요. 한데, 단태는 어디 있어요? 꼭 만나고 싶은데.”
“저도 당신과 같은 입장입니다. 단태는 필요할 때만 저를 찾아오니까요.”
“그렇군요.”
백율운현은 실망감을 드러냈다.
백울운현이 광장을 가로질러 건물 사이로 사라지자, 단태는 꽤 오랫동안 그 방향을 응시했다. 그녀가 필요해서 데려왔지만 잘한 일인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천황패를 가진 백율운현은 어디로 튈지 모르는 여자였다. 용혈에 잡혀 있는 백율청현을 생각한다면 경거망동은 하지 않을 텐데.
지켜보면 결론이 나올 것이다.
서두를 필요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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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사마 좌영윤이 반역죄로 체포된 소식이 유타루체는 물론 제국 전역으로 알려진 그다음 날, 단태는 군강검 대기실에서 옷매무새를 점검하고 있었다.
신경을 썼다고 생각했지만 환관들이 몰려와 입던 옷을 벗기고 목욕을 시켰다. 이후 정해진 순서대로 향이 좋은 약을 바르고, 머리카락을 단정히 잘랐으며, 황제가 하사한 옷을 입혔다. 어깨와 소매에 금색 띠가 붙은 최고급 옷이었다.
“기다리십시오.”
물항이라는 이름의 환관이 근엄하게 말했다.
단태는 속으로 벌써 다섯 시간째 기다리는 중이라도 답했다.
언젠가 황제를 만날 날이 올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황제가 직접 그를 부르리라는 생각은 못했다. 유타루체에서 제법 큰 세력을 모았지만, 제국 전체를 고려한다면 백중파는 물방울 하나에 불과했다. 십중팔구 황제 곁에서 지내는 명국영의 뜻이 반영된 황명이라고 단태는 판단했다.
대연회에서의 만남 이후, 단태는 철저히 명국영을 피했다. 명국영도 백중파를 찾지 않았다.
환관들과 함께 륜사가 다가왔다. 석장명의 뒤를 이어 황마사 자리에 오른 륜사는 단태의 몸을 살폈다. 마법이 걸려 있어 치명적인 무기가 있는지 확인한 것이다.
“따라오게.”
단태는 륜사의 등을 보며 걸었다. 기분이 이상했다. 종자로 선택되어 륜사 뒤를 걸었던 옛날 생각이 났다.
백중파에 소속된 사람들은 도시 전역에 퍼져 있었다. 외부인이 기루와 주점에서 행패를 부리지 못하도록 막는 사내, 궂은일을 도맡은 하인, 하녀 들은 물론 유력 가문과 거래를 하는 상인,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사, 심지어 윤가학관의 교수까지 백중파의 일원이었다. 그들은 은연중에 갖가지 정보를 단태에게 전달했다.
물론 그 무진장하게 많은 정보에서 가치 있는 것을 골라내는 일은 단태의 몫이었다.
단태는 하둔의 도움을 받아 틈이 날 때마다 차곡차곡 쌓인 정보의 산을 파헤쳐 보석을 찾아냈다. 작업은 힘겹지만 보석의 가치를 생각한다면 포기할 수는 없다. 다양한 관점에서 하나의 대상을 보기 때문에, 그런 식으로 찾아낸 정보는…… 황금보다 중요했다.
륜사의 속내를 직접 알 수는 없지만, 그를 둘러싼 사람들의 경험과 감정을 통해 륜사를 파악할 수는 있었다. 얼마 전까지 륜사는…… 공명정대하지만 명예욕에 사로잡힌 마법사였다. 천마가 된 후로 천마라는 경지에 유독 신경을 썼고, 용마렵에 기존의 천마들이 참가하자 체면을 중시하는 성향이 두드러진 것이다.
하지만 연쇄살인사건의 범인으로 엄포윤이 잡히는 바람에 부탑주에서 물러난 이후, 륜사는 과거의 륜사로 돌아간 것 같았다. 마법을 중시하며, 원론적인 입장에서 물러서지 않지만, 약자를 배려하는 고집불통의 마법사가 주위 사람들이 륜사에게서 받은 느낌이었다.
비슷한 방식으로 명국영이 결국 진실을 찾아냈음을 단태는 이미 알고 있었다. 명국영은 더 이상 단태를 찾는 일에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다. 단태라는 이름을 입에 올리지도 않았다. 황정어사로서의 일에 몰두했다.
왜 찾아오지 않는지 단태는 궁금했지만, 짚이는 부분이 있기는 했다. 유천주의 입을 빌려 ‘퇴보했다’느니, ‘찾아갈 수 없었을 것’이라느니 명국영에게 독설을 퍼부었다. 단태가 직접 그런 말을 했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자존심이 상했을지도 모른다. 제자에게 그런 소리를 듣고 마음 편한 스승은 없으니까.
돌이켜 생각하면, 말이 좀 심하긴 했다. 굳이 그렇게까지 속을 뒤집어 놓을 필요는 없었는데. 수천 개의 용옥을 접한 후에야 겨우 용족의 사고방식에 익숙해지지 않았던가. 명국영에겐 그런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몇 개의 문을 통과한 후에야 알현실이 나왔다.
단태는 가르침을 받은 대로 무릎을 꿇었다. 용족의 일원으로 황제 따위에게 무릎을 꿇고 싶지 않은 마음도 있었지만, 대의를 위해서라면 이보다 더한 것도 할 수 있다고 애써 생각했다.
환관이 열어젖힌 문으로 황제가 걸어 나왔다. 당당한 자세와 위엄이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그대가 백중인가?”
“그렇사옵니다, 폐하.”
“황정어사가 그토록 그대를 칭찬하더군.”
“……몰랐사옵니다.”
“그대에게 간단한 임무를 맡기려 한다. 제국의 신민으로서 나의 말을 들어 줄 수 있겠는가?”
“말씀하옵소서, 폐하.”
어느 누가 황제 앞에서 명령 같은 부탁을 거절할 수 있을까? 단태는 저 황제가 무룡 앞에서도 저런 위엄을 유지할 수 있을지 확인해 보고 싶었다. 물론 벌벌 떨다가 오줌을 지릴지도 모르지만.
“나의 말이 우습나?”
“……아니옵니다.”
오줌 싼 황제를 떠올리다 웃고 만 단태는 재빨리 웃음기를 지웠다.
“그대는 황정어사에게 고마워해야 할 것이다. 황정어사가 아니었다면 그대를 만날 일도 없고, 설사 만났다고 해도 이 자리에서 그대의 목을 쳤을 테니까.”
“……송구하옵니다, 폐하.”
단태도 슬슬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에게 황제는 절대적 권력을 가진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인간인 동시에 용이었다. 용은 지배하지 지배당하지 않는다. 용으로서의 자존심이 꿈틀거렸다.
“그대에게 부탁을 하기 전에, 한 가지 묻지. 어려워 말고 대답해라.”
“알겠습니다.”
“좌영윤이 반역죄로 잡혔고, 그를 따르는 무리가 모조리 옥에 갇혔다. 지금 용금탄은 혼란으로 가득 차 있다. 오늘 저녁 용금탄으로 떠날 내가 황궁에서 무엇을 할 것 같으냐?”
단태는 잠시 망설였다. 황제가 직접 판단해서 결정을 내려야 할 중요한 사안을 왜 물을까? 혹시 함정이 아닐까?
“솔직하게 말해도 됩니다.”
어느새 황제 옆으로 다가와 선 명국영이 말했다.
“솔직히, 그런 일에 관심이 없습니다.”
“……뭐?”
황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제 일이 아니니까요. 만약 제가 황제였다면 밤이 새도록 그 일을 두고 고민을 거듭했겠지요.”
듣기에 따라 반역으로 해석할 수도 있는, 위험천만한 말이었다.
놀란 명국영이 황제를 쳐다본 순간, 황제는 알현실이 울리도록 웃었다. 알현실 밖에 있던 환관, 시녀 들이 깜짝 놀랄 정도였다. 한참 웃던 황제가 단태 앞으로 한 걸음 다가왔다.
“당돌하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