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단태신곡-247화 (247/2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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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구할 것 같습니다.”

당돌하다는 말에 열이 받은 나머지, 말이 잘못 나왔다.

황제는 다시 웃었다. 이전보다 소리도 컸고, 기세도 강했다. 웃음병에 걸린 게 아닌지 환관들이 소곤거렸다.

“그대를 보니, 그 녀석이 생각난다. 황정어사, 그때 그 녀석이 뭐라고 했었지?”

“……성은이 망극하……셔야 할…… 겁니다.”

명국영은 대략 4년 전 단태가 한 말을 그대로 흉내 냈다.

황제는 다시 웃기 시작했다.

륜사도 쿡쿡 웃었고, 명국영도 마찬가지였지만,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단태 혼자 입을 꽉 다물고 있었다. 어린 시절의 실수를 아직도 기억하다니.

웃음을 억누른 황제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대가 황제라면 작금의 사태에서 어떻게 하겠는가?”

이번에는 단태도 진지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백중파가 부지불식간에 쌓아둔 가치 있는 정보를 토대로 판단한 결과를 기반으로 단태는 결론부터 말했다.

“대사마 자리에 동천을 임명할 겁니다.”

“이유는?”

“동예의 사촌 동생이기 때문입니다.”

“자세히 설명해라.”

황제의 목소리에서 재촉의 분위기가 묻어났다.

“폐하께서는 암살 미수 사건으로 대신들 사이에 의심을 불러일으켰고, 그로 인해 경솔한 좌영윤의 반역죄를 수면 위로 끌어올리는 데 성공하셨습니다. 만약 대사마 자리에 폐하의 사람을 세우면, 승상 동예와 어사대부 패환 그리고 환관장 평용구는 서로를 향한 의심을 버리고 폐하께 맞서기 위해 단단히 결속할 겁니다. 그러면 다된 밥에 코를 빠뜨리는 격이지요. 동천이 대사마 자리에 오르면, 패환과 평용구가 기를 쓰고…… 그래서 무리수를 써서라도 동예를 끌어내릴 겁니다. 그러면 폐하께서는 손 안 대고 코를 풀 수 있겠지요.”

단태는 권위를 건드린 자신의 말을 웃음으로 넘긴 황제라면 이런 말도 소화할 수 있으리라 판단했다.

잠시 말이 없던 황제가 질문을 던졌다.

“그다음에는?”

“이간질은 더 이상 통하지 않습니다. 패환, 평용구도 그때쯤이면 황제 폐하의 계략임을 알 테니까요. 정면대결로 두 사람을 눌러야 합니다. 뿌리까지 뽑아내야 할 겁니다.”

단태는 거침이 없었다.

“북방의 문제는? 맹진국의 판금우가 호시탐탐 제국의 와해를 획책하고 있는데. 또한 칠성시의 분위기도 심상찮고.”

황제는 마치 신뢰할 만한 책사와 함께 정책의 타당성을 의논하는 것처럼 단태를 대했다. 그 태도의 의미를 알기에 단태도 최선을 다해 답을 찾아냈다.

“파격적인 결단이 필요합니다.”

“말해 보게.”

“망혈루체, 강성루체, 파림루체에게 북쪽 국경선의 방어를 맡기십시오. 물론 칠성시의 영향력 확대를 막기 위해 용령제국의 건국 이후 암묵적으로 칠성시에 국방의 임무를 맡기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허나, 시대가 변했습니다. 칠성시가 일곱 개의 독립국이었던 시대는 이미 지나갔습니다. 망혈루체, 강성루체, 파림루체는 도시들 간의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국경 방어에 최선을 다할 겁니다. 그러면 판금우가 어떤 개지랄을 떨어도 폐하께서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개지랄? 재미있군. 재미있어.”

“……죄송합니다.”

머릿속으로 파고드는 백중파 조직원들의 경험, 기억 때문에 평소 쓰지 않던 표현이 튀어나기도 했다.

“그다음에는?”

“폐하께서 여기 온 목적을 이루셔야지요.”

“……그걸 알고 있나?”

“유타루체를 시작으로 칠성시 전체를 갈아엎는 게 폐하의 계획이 아닙니까?”

황제는 입을 다물었다. 한 사람의 입을 통하여 어릴 때부터 석장명의 도움을 받아서 세운 계획이 까발려지자 두려움이 몰려왔던 것이다. 그러나 황제는 그런 두려움을 이용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부하의 영민함을 두려워해서 쳐내는 대신, 그 재능을 적재적소에 배치할 줄 아는 드문 군주였던 것이다.

“어떻습니까?”

명국영이었다.

“자네도 다 알고 있었나?”

“……제가 아는 내용은 폐하께서도 다 아십니다. 저 역시 이 자리에서 깜짝 놀랐습니다.”

망혈루체를 비롯한 칠성시의 일부를 동원하여 국경 방어를 튼튼히 해야 한다는 의견은 독창적이어서 명국영조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거대 조직의 성향, 정책 결정 과정 등을 깊이 알지 못하면 취할 수 없는 제안이었다.

황제는 단태를 쳐다봤다.

“그대는 평생 내 편이어야 해. 내 적이 된다면, 너무도 무서운 존재가 될 테니 말이야.”

“황송합니다만, 그 부탁을 아직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단태는 이곳에 온 이유를 잊지 않았다.

“황정어사의 이야기를 들으니, 그대는 백중파라는 조직을 힘으로도, 돈으로도, 심지어 법률 같은 규칙으로도 세우지 않았다더군. 난 그대가 백중파를 어떻게 시작했는지, 백중파를 지금의 규모로 성장시킨 방법을 배우고자 한다. 그대는…… 지금 이 순간부터, 나를 가르치는 스승이다.”

황제는 무릎을 꿇지는 않았지만 허리를 굽혔다.

명국영도, 륜사도 깜짝 놀랐다. 두 사람마저 황제가 왜 단태를 불렀는지 알지 몰랐던 것이다.

단태는 당황했다.

“오랫동안, 내가 장차 황제가 될 거라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부터 난 제국을 하나로 만들기 위해 애를 썼다. 군왕의 길을 가르치는 책은 모조리 읽었다. 그 길을 걷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했다. 그랬기에 전대의 황마사는 목숨을 걸고 나를 지켜주었다. 난 나 자신을 위해서, 또한 제국과 거기 사는 백성들을 위해서 더 나은 황제, 더 위대한 군왕이 되기를 바랐던 것이다. 허나, 내가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주변은 바뀌지 않았다. 오직 석장명만 나를 알아주었다. 그래서 난 그대에게 배우고 싶다. 어떻게 그대만의 조직, 그대를 중심으로 나날이 달라지는, 성장하는 조직을 만들 수 있는지를. 그대는 나를 도와라.”

자존심 강한 황제의 입에서 도와달라는 말이 흘러나온 순간, 단태는 돕지 않을 수 없다고 판단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아까도 말했지만, 그대를 보니 암탄주의 유산을 거절했던 그 아이가 생각나는군. 난 암탄주의 유산을 이어받은 두 사람에게 기대를 걸었지. 허나, 그들은 자신을 위해, 그들이 속한 조직을 위해 최선을 다할 뿐이었다. 그들은 제국에 도움이 되지 못했어. 오히려 분열을 가속시켰지. 한데, 자네는 달라.”

“……황송하옵니다, 폐하.”

백중파에 소속된 1만여 명의 사람들 중에서도 황제와 같은 인물은 보지 못했다. 저 젊은 황제의 태도를 본다면, 제국의 미래를 밝을 것이다. 비록 당장은 어려움이 산적해 있다고 해도, 결국 황제는 현실을 바꾸어 미래를 창조할 테니까.

알현실 밖으로 나온 단태는 길게 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빨리 황제를 만날 줄은, 황제 곁에 서게 될 줄은 몰랐다.

설희를 위해 최대한 높이 올라가고 싶었다. 설희의 신분이 밝혀지더라도 방패막이가 되어 설희를 보호하고 싶었다. 노예 출신이라고 해도, 백중파를 이끄는 사람의 친동생이라면…… 극형은 면할 수 있지 않을까?

“잘했다.”

명국영이었다.

“스승님.”

“너 때문에 한동안 잠을 못 설쳤다.”

“……죄송합니다.”

단태는 명국영이 진실의 절반만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인간처럼 보이는 몸 내부에 용의 심장이 뛰고 있음을, 그래서 인간이면서 용이라고 스스로 생각하고 있음을 상상도 못 하리라.

“동생은 걱정 마라. 내가 목숨을 걸고 지키마.”

명국영은 설희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잊었던 감격, 감동이 되살아났다. 역시, 스승님은…… 한계를 뛰어넘는 사람이었다. 그 지혜를 배우지 못했다면 이 자리에 설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 얼굴은 어떻게 된 거냐?”

“탄면이라는 것입니다.”

단태는 잠시 탄면을 벗었다.

잘생긴 얼굴, 단태의 이목구비가 흔적으로 남아 있는 얼굴을 본 명국영은 깜짝 놀랐다. 분명히 단태인데…… 그 이상의 무언가를 담고 있었다.

단태는 탄면을 썼다. 얼굴은 평범한 사람으로 바뀌었다.

그 변화에 겨우 적응한 명국영은 준비한 이야기를 꺼냈다.

“도시의 지배층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게다.”

“예상하고 있습니다.”

“법까지 뜯어고쳐 백중파를 옥죌 텐데, 어떻게 할 생각이냐?”

“법까지요?”

“할 수만 있다면 뭐든 다 할 게야. 백중파를 위축시켜 억누를 수만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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