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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세상으로 잠입하여 원하는 대로 움직이는 일, 처음엔 쉬워 보였다. 실제로 한동안 숨을 쉬는 것처럼 간단했다. 그러나 점점 일이 꼬이는 횟수가 늘었다. 인간 중에도 제법 머리를 굴릴 줄 아는 자들이 있었던 것이다. 가끔은 깜짝 놀랄 만한 계략으로 용이 세운 계획까지 무너뜨렸다.
뒤에서 황제를 조종했던 그 늙은 마법사가 죽어서 다행이다 싶었더니, 새로 황제 옆에 찰싹 달라붙은 서생과 마법사의 능력이 범상치 않았다. 아마도 그들이 황제에게 동천을 대사마로 삼으라고 충고를 했을 것이다.
물론 그들의 결정은 사소한 부분을 어긋나게 했지만, 중심은 건드리지 못했다.
인간족은 파멸 직전에 서 있었다. 누구도 알지 못한 사이에 파멸의 문이 활짝 열릴 테고, 그러면 인간족은 용족보다 먼저 세상에서 사라질 것이다. 용족도 그 뒤를 이어 망각의 세계로 옮겨가겠지만, 인간족의 파멸을 지켜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가치 있다고, 몸을 바꾼 용들은 생각했다.
“숙주는 몇이나 먹어 치웠지?”
부윤성이 물었다.
“대략 스물.”
무청이 답했다.
“얼마 남지 않았군.”
“겨울이 오기 전에 시작되겠지.”
“그보다, 암탄주님에게 연락을 받았어?
다들 입을 다물었다.
결단을 내려 인간의 몸을 취한 이후, 그들은 암탄주를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이 모든 계획, 용족의 파멸을 막을 수 없다면 인간족을 더 빨리 파멸로 밀어 넣자는 계획은 암탄주의 솜씨였다.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그들은 알지 못했다. 그저 암탄주가 어딘가에서 계획의 완성을 위해 힘을 쓰고 있음을 알 뿐이다.
부윤성이 기침을 했다.
연이어 세 번이나.
비백포, 무청이 웃었지만, 씁쓸함이 담겨 있었다. 가벼운 환경 변화에도 몸이 휘청거리는 인간의 몸은…… 서서히 죽어가고 있었다. 그들은 알고 있었다. 언젠가 인간으로 삶을 마감하리라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지만, 그들은 이미 인간이었다.
그저 용족이었던 기억을 간직한 인간이었다.
그나마, 기억까지 흐릿해지고 있었다. 명료하면서도 생생한 기억력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던 그들에게 인간의 몸이 지닌 망각은 재앙이었다. 위대한 존재였던 과거는 시간에 씻겨 사라지고 있었다. 아무리 애를 써도 잡을 수가 없었다.
용혈로 들어갈 방법이 없는 그들은 다시 얽히고설킨 지하 통로로 접어들었다. 유타루체로 돌아가기 위해서였다.
*두 번째 심장
법은 다양한 관점을 포함해야 하고, 일단 정해지면 쉽게 바꿀 수 없기 때문에 관련자들의 입장을 찬찬히 들은 후에 바꾸거나 덧붙일 수 있었다. 그러나 법을 바꿀 수 있는 권한의 소유자들이 일치단결할 경우에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반우현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그 어떤 반대도 없이 하나의 법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지켜볼 수 있었다. 그 법의 목적은 오직 하나 백중파를 견제하는 것이었다.
‘현재로선 필요하니까.’
반우현도 그 움직임에 반대할 생각은 없었다.
일명 ‘지식 제한법’이라 불리는 그 법은 동업조합 외부로 비밀이 누설되는 경우를 금지했다. 전통적으로 동업조합에 속한 사람들은 경쟁력을 위해 비법이나 비결을 조직 바깥에 알리지 않았다. 오히려 다른 동업조합의 비밀을 훔쳐내기 급급했다. 이 법으로 타격을 입는 조직은 단 하나 백중파 뿐이었다.
시청 대회의실에서 진행된 법 제정 과정을 지켜보면서 반우현은 한 번도 반대하지 않았다. 계승자로서 그 과정에 참가할 자격이 있었지만, 그녀가 보기에도 백중파는 지나치게 커졌다. 손을 잡았다고 해도 제한을 가할 필요가 있었다. 그래야 수족처럼 부릴 수 있다.
법은 즉시 공개되고, 실행되었다.
경비대는 동업조합 간의 지식 교류를 감시하느라 바빴다. 적발 되면 어마어마한 양의 벌금이 매겨지기 때문에, 이익을 추구하는 동업조합으로서는 그 법을 지킬 수밖에 없었다.
백중파에 속한 동업조합 몇 개가 그 법을 무시하다 적발되었다. 경비대가 적발한 건에 시법원이 매긴 벌금은 그 동업조합들이 감당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결국 동업조합들은 해체되고 말았다.
또 다른 법도 만들었다.
두 번째 법은 ‘교육 허가제’와 관련이 있었다.
시청에서 발급하는 교사 자격증을 지녀야 타인을 가르칠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이 법도 백중파를 목표로 삼고 있었다. 백중파 내부에서 글을 배우고, 지식과 지혜를 익히던 사람들은 이제 딱딱하고, 고압적인 학교나 학원으로 가야 했다. 거친 암계 출신 사내들은 그런 곳을 버텨낼 수 없었다.
세 번째 법은 동업조합을 포함한 조직 간의 ‘자유로운 이동’을 금지했다. 백중파는 이 조직에 속한 사람이 다른 조직으로 옮겨가도록 장려했을 뿐 아니라, 동시에 두 개 이상의 조직에 속하는 것도 문제 삼지 않았다. 이 법은 백중파 특유의 활력 넘치는 분위기를 없애는 데 지대한 역할을 할 터였다.
백중파는 밧줄에 묶인 맹수 신세로 전락했다. 도시의 지배층이 노골적으로 백중파를 견제한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백중파로 들어오려는 동업조합이나 다른 조직의 수도 확연히 줄어들었다. 그러니 개인적으로 찾아오는 사람도 뚝 끊겼다. 일중이 집계한 바에 따르면, 조직원의 수도 7천여 명으로 감소했다.
“문제가 심각합니다, 주군.”
일중이 말했다.
백중파 본부 회의실에 앉은 단태는 란조의 목을 가볍게 긁고 있었다. 속으로는 명국영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감탄하고 있었다. 정확히 법이라는 무기를 내세울 거라는 점을 간파했던 것이다. 여전히 배울 점이 많은 스승이었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단태는 질문을 던졌다. 다양한 의견을 듣고 싶었다.
묘홍이 먼저 나섰다.
“11개의 유력 가문들 사이의 협력 관계를 끊어야 합니다.”
“구체적인 방법은?”
“……주군께서 선호하지 않으시지만, 적당한 가문에만 뇌물이라도 써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돈을 이용해 분열을 만들어 내자는 뜻이다.
“음, 무슨 뜻인지 알겠다. 다른 의견은?”
“도시 거주민 전체의 삶을 좌우하는 법 제정, 개정 권한이 소수의 지배층에 주어져 있다는 점 자체를 강조해야 합니다. 수청보를 비롯하여 신문에 기사를 싣는다면 도시 전체가 반응할 겁니다.”
종보예였다.
“어떤 반응을 보일까?”
단태는 누구나 의견을 자유롭게 펼칠 수 있도록 질문으로 도왔다.
“……필요하다면 물리적 수단도 강구해야 합니다.”
조심스러운 표현에 폭동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 내전을 방불케 하는 폭동을 일으켜서라도 기존 질서를 깨뜨려야 한다고 종보예가 말한 것이다.
“일중,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지?”
단태는 책사를 지목했고, 회의에 참석한 사람들은 일제히 일중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백중파의 2인자를 향한 기대의 눈빛이었다.
“정치적인 접근법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좀 더 자세히.”
“유력 가문들이 법을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는 건, 제국이…… 그럴 권한을 부여했기 때문입니다. 그들도 황제 폐하께서 만드는 법은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 유타루체의 지배층을 상대하기보다, 용금탄의 고위층을 움직이는 게 더 효과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단태는 박수를 쳤다. 조직의 생리를 깊이 이해한 후에야 내놓을 수 있는 의견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허나, 시간이 없어. 용금탄이 움직이기 전에, 백중파는 말라서 없어질 테니까.”
“주군의 생각을 알고 싶습니다.”
일중이었다.
다들 숨죽이고 단태를, 아니 백중이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 그들은 백중을 그저 우두머리이기에, 권위를 가지고 있기에 인정한 게 아니었다. 백중은…… 누구보다도 탁월한 인물이었다. 아무리 난해한 문제도 그가 나서면 다른 관점으로 보여 해결할 지점이 드러나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