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단태신곡-251화 (251/293)

<-- 251 회: 6-43 -->

“…….”

단태는 그 말이 가진 설득력을 부정하기 어려웠다. 그와 동시에 몰려온 두려움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주군이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저는 압니다. 주군은…… 스스로 신이라는 착각에 빠질까 염려하십니다. 저는 절대 주군은 그런 착각에 사로잡히지 않으리라 확신합니다. 그럴 사람이었다면 애초에 백중파는 존재할 수 없었을 겁니다. 백중파가 이토록 거대해졌는데, 주군에겐 아무것도 없습니다. 작은 집조차 주군의 소유가 아닙니다. 그 막대한 자금은 골고루 백중파에게로 분배되었는데, 그 엄청난 자금을 쏟아부은 당사자는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빈털터리에 불과합니다.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바로 그 때문에 주군은 절대 오만해질 수 없습니다. 주군은 절대 그 함정에 빠지지 않을 겁니다.”

“언제 그렇게 말발이 늘었지?”

“다 주군 덕분입니다.”

일중 웃었다.

단태도 웃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럼에도 일중과 공유할 수 없는 비밀은 여전히 단태를 염려하게 만들었다. 신은…… 유천주가 그 거미들 위에 군림했던 그 자리였다. 거미들에게 유천주는 생사를 결정하는 신이었다.

그 일이 반복되는 게 아닐까?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을 하족으로 삼는 게 아닐까?

“한 가지만 생각하십시오, 주군. 주군은 백중파로 찾아온 사람들을 이전과 다른 존재로 만들고 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존재로 바뀌고 있습니다. 자신의 처지를 고려해서 무엇을, 어떻게 해 나갈지 스스로 결정합니다. 그 변화, 주군이 누구보다 잘 아십니다. 만약 여기서 멈추면, 그들은 과거로 돌아갈 겁니다. 어둠의 세계로 추락할 텐데, 그들은 두 번 다시 희망을 품지 못할 겁니다.”

“……아예 날 협박하는 게 낫겠다.”

이보다 더 강력한 협박은 없다고 단태는 생각했다.

“지금, 협박하는 중입니다. 제가 볼 때, 주군은 사람들이 붙잡을 수 있는 기적입니다. 주군은 갈증으로 허덕거리는 사람들의 목을 시원하게 만드는 샘물입니다. 만약 주군 스스로 그런 가능성을 배제한다면, 주군은…… 무수한 사람들을 절망의 구덩이로 밀어 넣는…… 악마가 될 겁니다.”

일중은 진심을 담아서 말했다. 농담이 아니었다.

단태는 그 의미를 깨달았다.

깊이.

돌이킬 수 있는 흐름이 아니었다. 결존계의 영향력으로 인한 것이든, 다른 요소의 결합이든 백중파는 이미 스스로 확장하는 생물이었다. 단태가 마음대로 없애 버릴 수 있는 조직이 아니었다.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겠지?”

“주군, 잘 생각하셨습니다.”

“조건이 있다.”

“……말씀하십시오.”

일중은 긴장했다.

“내 옆에서 떨어지지 마라. 항상 내 곁에서 이렇게 속삭여 주기를 바란다. ‘당신은 나약한 인간이야. 당신은 신이 아니야. 고통에 아파하고, 한계에 두려워하는 평범한 인간임을 잊지 마’라고.”

“그거라면 걱정하지 마십시오. 주군은 제 도움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만큼 나약하시니까요.”

그 말에 단태는 기분 좋게 웃었다. 그러나 개운은 웃음은 아니었다. 단태에게 결존계는 짊어질 수밖에 없는, 벗어날 방법이 없는 무거운 짐이었다.

사람은 누구나 주어진 환경의 일부를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다.

앞을 볼 수 없게 태어난 사람은 그 조건을 불평만 하면서 살 수는 없다. 현실을 인정해야 새로운 가능성이 열린다. 두 다리를 쓸 수 없도록 태어난 사람이 다리만 들여다보면 삶은 저주로 가득 차지만, 새로운 관점을 터득한다면 그는 화가가 될 수도 있고, 상인으로 성공할 수도 있다.

현실 부정은 가능성마저 없앤다.

혼자 남은 단태는 백중파가 뒤집힌, 거꾸로 선 나무라고 생각했다. 뿌리는 땅을 뚫고 아래로, 아래로 내려간다. 그래서 평범한 시선에는 잡히지 않는다. 그러나 뒤집힌 나무에서는 뿌리가 눈에 띈다. 먼저 시야에 들어온다. 나무가 커질수록, 규모가 거대해질수록 뿌리는…… 더욱 높은 곳에 자리 잡는다.

‘백중파가 커질수록…… 내가 짊어져야 할 무게도 늘어나겠구나.’

언제 멈춰야 할까?

이대로 내버려두면 백중파는…… 도시를 넘어 국가를 이룰지도 모른다.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용령제국은, 황제는 결코 백중파를 좌시하지 않을 것이다. 내전이 터져 무수한 사람들이 죽은 후에야 하나의 국가가 남을 것이다. 용령제국이 무너진다면, 그 내전에서 백중파가 승리한다면 어떻게 될까?

새로운 국가가 탄생할 것이다.

그런 일, 현실로 일어나야 할 가치가 있을까?

백중파가 기존의 국가를 대체해야 할 이유가 있을까?

만약 이유가 충분하다면, 전쟁을 일으켜서라도 기존의 질서를 무너뜨려야 할까?

단태는 겁이 났다.

깊은 고민 없이 눈앞에 펼쳐진 도시를 바꾸기 위해 시작한 백중파는 꿈틀꿈틀 성장하여 어느덧 용령제국 전체를 바라볼 만큼 거대한 나무가 되었다. 한계에 봉착할 때까지 백중파는 멈추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한계 너머까지 뻗어나갈지도 모른다.

생각해 보면 황제는 하늘의 아들이라고 자신을 포장한다. 그래서 다수의 백성은 비가 내리지 않으면 황제에게 책임을 돌린다. 단태가 백중파의 생존을 위해 종교라는 영역을 받아들인 것처럼, 황제도 제국 운영을 위해 종교를 이용했던 것이다.

삶이 너무나 급격하게 달라졌다.

눈에 들어오는 세상의 규모도 달라졌다.

도망가고 싶지만,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돌아가셨다고 믿었던 어머니가 여기 살아계신다. 아끼는 여동생은 황제 옆에 있다. 잠시 실망했던 스승은 탄복할 만한 지혜와 애정을 보여 주었다.

무엇보다 하루하루 달라지는, 성장하는 백중파 사람들을 버릴 수는 없었다. 과거 그들의 처지와 비교 자체가 불가능할 만큼 그들은 변화를 넘어 진화를 거듭했다. 가히 혁명이라고 할 만한 무언가가 그들의 삶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런 조직을 버리고 달아날 수는 없으리라.

끝까지 가보는 수밖에 없다.

끝이 아름답기를 비는 수밖에 없다.

@

방단의 전직 단원 하나가 진실을 털어놓았다.

경비대는 기다렸다는 듯 그 일을 신속하게 조사했다. 왜 그가 당시 마둔수탑의 종자장이었던 단태에게 누명을 뒤집어 씌웠는지 알아낸 후, 그 결과를 발표했다. 시법원이 뒤를 이어 사망했다고 알려진 단태에게 죄가 없음을 선언했다.

과거의 재판을 뒤집은 것이다.

사람들의 관심에서 벗어난 채 한 사람의 죄가 사라졌고, 다른 사람이 그 죄를 뒤집어썼다. 수청보 귀퉁이에 관련 기사가 잠시 머물렀을 뿐이었다.

그래도 극소수는 그 기사를 눈여겨보았다. 시법원이 진행된 재판을 이렇게 간단히 뒤집는 전례가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마둔수탑의 종자장을 음해한 자가 한때 방단에 몸을 담았던 사람이라니, 특종이 되고도 남을 이야깃거리였다.

단 사흘 만에 마둔수탑의 종자장 단태는 공식적으로 누명을 벗었다.

그 사실을 확인했지만 단태는 그리 기쁘지 않았다. 죄를 뒤집어씌운 자가 죄를 다른 곳으로 옮겼기 때문이다. 언제든 권력만 손에 쥐면 누구든 누명을 씌워 죽일 수 있다는 사실 자체는 변하지 않았다.

이로써 백율운현에 대한 판단이 내려졌다. 그녀는 달라지지 않았다. 변할 의지조차 없는 사람이었다.

반역 사건을 처리하기 위해 용금탄으로 갔다가 어제 유타루체에 도착한 황제의 부름을 받고 군강검으로 가던 도중, 단태는 머릿속으로 파고드는 한 사람의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

그자였다!

아무것도 모르고 도시의 성문을 통과한 단태와 설희, 그리고 엄마를 노예 매매소로 넘겨 버린 그 작자!

노예상인 도양이 백중파의 일원으로 들어왔고, 사람들의 기억 속에 담긴 그의 모습이 단태에게 흘러갔던 것이다.

황제와 대화를 나누는데 도저히 집중할 수가 없었다. 한시라도 빨리 그자를 만나고 싶었다. 다행히 황제도 조용히 고민할 문제가 생긴 모양이었다. 고급 객관을 빠져나온 단태는 백중파의 본부로 돌아가 도양이 어디 있는지 수소문했고, 오래지 않아 그가 종보예가 이끄는 범강파에 들어와 있음을 알아냈다.

그를 만나려고 달려갔지만, 막상 범강파의 근거지 앞에서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를 만나서 뭐라고 해야 할까? 과거의 일을 들추는 순간, 도양은 백중이 바로 단태라는 사실을 알아차릴 텐데.

백중파는 사람을 가려서 받지 않았다. 설사 그가 살인을 저질렀다고 해도 백중파는 그 죄를 추궁하지 않았다. 그저 경비대가 수사를 하도록 협조했을 뿐이다. 죄가 밝혀지면 백중파는 구성원이라고 해서 보호하지 않았고, 오히려 대가를 치르도록 경비대, 시법원의 방식을 지원했다.

그러나 노예상인은, 현재 유타루체에서 처벌할 수 없는 직업이었다. 비록 명예로운 일은 아닐지라도 필요한 직업이라는 게 노예상인을 향한 대중의 시선이었다.

단태는 분노를 터트리고 싶은 그 마음을 억눌렀다. 도양 개인을 찢어 죽인다고 해서 유타루체는 바뀌지 않는다. 근본적인 변화가 필요하다. 노예 제도가 사라진다면 도양이 아무리 기를 쓴다고 해도 노예상인의 일을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본부로 돌아온 단태는 노예 매매 관련 일은 금한다는 지시를 내렸다. 이미 암묵적으로 백중파의 상층부가 노예 매매를 싫어한다는 사실이 알려져 있어, 대다수의 조직원들은 노예 매매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용돈을 벌기 위해 과거의 못된 버릇을 버리지 않은 자들도 일부 있었다.

도양이 지시를 어긴다면, 제대로 갚아줄 생각이었다.

그래도 마음은 무겁고 답답했다.

광장을 벗어나 운하 옆에 마련된 선착장으로 내려서는 순간, 단태는 기이한 진동을 느꼈다. 오른쪽 가슴이었다.

천천히 손을 올렸다.

가슴에 닿은 손바닥으로…… 규칙적인 진동이 느껴졌다.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피가 나도록.

일찍 숲으로 가서 포식을 하고 돌아오다 단태를 발견한 란조가 어깨로 내려앉았다.

“단태, 심장이 두 개다. 심장이 두 개다.”

“…….”

그 말을 부정할 수 없었다.

미약하나, 또 다른…… 두 번째 심장이 뛰고 있었던 것이다.

*재앙의 시작

땅속은 축축하고 어두웠다.

처음에는 새끼손가락 끝이 까딱거렸다. 원인 불명의 경련이라고 할 만큼 사소한 동작이었다.

다음엔 다섯 개의 손가락이 흙을 움켜쥐었다. 두 개의 손이 맹렬하게 흙을 밀어내었고, 신선한 공기를 향해서…… 지렁이와 벌레로 그득한 지하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그는 발버둥을 쳤다. 무덤을 뚫고 나와 올려다본 밤하늘은 맑았다.

뻣뻣한 몸에서 우두둑우두둑 소리가 났다. 무릎이 구부러지지 않아 앞으로 쓰러졌는데, 이마와 부딪힌 비석이 부서졌다.

몸을 일으키려던 그는 무덤지기와 눈이 마주쳤다.

수상쩍은 소리에 횃불을 들고 공동묘지를 살피러 왔던 늙은 무덤지기는 돌아서야 한다고, 달아나야 한다고 생각만 할 뿐 공포에 짓눌려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무덤지기 앞으로 걸어갔다. 도와 달라고, 집으로 가고 싶다고 말하려 했으나 무덤지기가 풍기는 혐오스러우면서도 달콤한 냄새를 들이마신 순간, 이전의 생각은 사라지고 단 하나의 생각, 영원히 지속될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죽여라, 죽여라, 죽여라.

누군가 몸 안쪽에서 소리치고 있었다.

그 명령은 억누를 수 없는 살기를 이끌어 냈다.

법 없이도 살 수 있다는 평판을 들었던 그는 단숨에 뛰어올라 무덤지기를 덮쳤다. 신 나게 잔치를 즐긴 그는 새벽이 밝아 오기 전, 지하 미로 흑야궁으로 숨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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