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2 회: 7-1 -->
후텁지근한 공기는 빨간 앵두 같은 태양이 야자나무에 걸렸다 바다로 가라앉은 후에야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은 섬에 갇힌 천마들을 고단함에서 풀어주었다. 칙칙한 어둠이 사물의 색깔에서 생명력을 빼앗고 있었다. 해를 가라앉힌 어둠 너머로 별이 총총 반짝거렸지만, 천마들은 찰싹거리며 밀려와 포말을 남겨놓고 돌아가는 파도 소리를 들으며 또 하루가 의미 없이 가버렸다고 생각했다.
“누구 차례야?”
사령마 만표가 야단치듯 말했다.
“…접니다.”
음마성 율암이 마법으로 빛을 밝혔다. 제법 마력 소모가 컸지만 감수하는 수밖에 없었다. 순번을 정했기에 마법이 버겁다면 백사장 뒤쪽에 펼쳐진 숲으로 직접 들어가 장작을 가져와야 했다. 종자, 수련사나 하는 허드렛일을 그가 할 수는 없었다.
바윗덩이 같은 침묵이 그들을 덮었다. 입을 꽉 다문 채로 각자 생각에 생각을 거듭했다. 어떻게 하면 이 망할 환상 마법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용혈로 이어진 그 복잡한 흑야궁에서 순식간에 사방이 바다로 둘러싸인 조그만 섬으로 천마들 모두가 단숨에 이동할 리는 없을 터, 다들 환상 마법이라고 확신했던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그 섬에서 보내는 시간이 늘어날수록, 환상 마법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뿌리를 내렸다. 광마 종만추 때문이었다. 환상 마법으로 명성이 높은 평환탑이 배출한 천마 종만추조차 현실인지, 환상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몇 가지 판별법으로 환상인지 확인하려 했으나, 그 결과는 부정적이었다.
천마들은 제각기 계약을 맺은 정령을 소환했지만 그들이 얻은 지식은 야자수 숲과 모래사장으로 이루어진 섬이 매우 작으며, 사방 어디에도 사람의 흔적은 찾을 수 없다는 사실 뿐이었다. 동쪽이 어디인지는 분명했다. 서쪽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이틀이나 정령을 보내도 육지는 물론 배 한 척 찾을 수 없었다.
섬에 갇힌 지 보름이 지났을 무렵, 천마들은 환상 마법이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위대한 존재라고 불리는 용이 설치한 함정에 빠졌고, 그 마법에 의해 이곳으로 옮겨졌다는 게 천마들의 생각이었다. 감히 용혈을 노리고 찾아온 원정대를 이보다 더 깔끔하게 처리할 수는 없으리라.
먹구름이 별빛을 덮었다.
곧 폭우가 섬을 때렸다.
바람에 야자수가 흔들리며 거친 잎사귀들이 날아다녔다.
천마들은 파도가 세차게 밀려드는 모래사장에서 물러나 숲으로 들어갔다. 각자 마법으로 비를 막으며 처량하게 서 있었다. 서로를 쳐다보는 시선에 경멸이 묻어났지만, 곧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숙여 축축해진 발을 내려다봤다.
천마가 된 이후, 어디를 가든 대접을 받았다. 숭배와 공포의 대상이었던 그들은 넘치는 환대, 두려움 어린 신중함에 익숙했다. 황제조차 천마 앞에서는 경거망동을 자제했다. 그런 인물들이 옹기종기 모여 퍼붓는 폭우를 피하고 있었다. 번쩍 친 벼락에 옷을 갈아 입지 못해 꾀죄죄하고 궁상맞은 꼴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다행히 폭우는 새벽이 밝기 전에 시들해졌다.
긴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태양이 수평선 위로 떠오를 무렵, 동쪽 하늘에 뜬 구름은 햇빛을 받는 각도에 따라 기기묘묘한 색깔로 옷을 갈아입었다. 처음엔 따뜻한 주황색, 점점 붉어졌다가 푸르스름하게 빛나는 구름들이 하늘로 퍼지자, 천마들은 배가 고팠다.
“선배님 차례입니다.”
음마성이 사령마에게 말했다.
끙, 소리를 낸 사령마는 숲을 빠져나가 모래사장 앞에 털썩 앉았다. 마법으로 물고기나 잡게 될 줄이야. 용을 죽일 수도 있었던 사혈투지로 통통하게 살이 오른 물고기 너댓 마리와 조개 따위를 잡았다.
요리는 광마 종만추의 몫이었다. 마법으로 불을 만들어 단숨에 익혔는데, 입맛을 돋우는 양념을 뿌릴 수 없어 짭쪼름한 소금기에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천마들은 제각기 편한 자리에 앉아 물고기와 조개를 먹어치웠다.
그때, 사령마가 중얼거렸다.
“그 늙은이에게 다른 속셈이 있는 거 아니야?”
“…….”
천마들이 일제히 동작을 멈추고 사령마를 쳐다봤다.
시선을 느낀 사령마는 괜히 짜증이 났다. 어딜 가든지, 누구 앞에서든지 마음에 떠오르는 말을 내뱉는 게 버릇이 되었다. 천마들을 의식하느라 마음 가는 대로 말할 수가 없어서 답답했다.
“생각해보니, 미심쩍은 부분이 있습니다. 왜 백휘섬선만 여기 없는지 이해할 수 없으니까요.”
음마성이 거들었다.
“그렇지?”
사령마가 그 말을 받았다.
곧 광마와 암혼빙마까지 그 의혹에 동참했다. 내로라하는 천마들이 꼼짝도 못하고 이곳으로 끌려왔는데, 유독 백휘섬선만 함정에서 벗어났다는 점은 그들로선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 일이었다. 차라리 백휘섬선이 그 함정을 미리 알았고, 그래서 달아날 수 있었다는 설명이 그들에겐 편했다.
갑자기 다들 입을 다물었다. 거의 동시에 그들은 광오선의 말과 행동에서 수상쩍은 부분을 떠올렸다. 원정대를 꾸리자고 강력하게 주장한 사람도 광오선이었고, 유타루체에 유천주가 나타나 혼란스러울 때 천마들만의 원정을 제안한 사람도 광오선이었다. 누구보다 용혈로의 원정에 열심인 사람 역시 백휘섬선이었다.
“생각해보니, 그 늙은이에게 당했군.”
사령마였다.
나머지 천마들은 자기만의 방식으로 분개했으나 날뛰지는 않았다. 그들에겐 끝까지 지켜야 할 자존심이 있었던 것이다.
외딴 섬 모래사장에서 천마들이 진실을 더듬고 있을 때, 광오선은 등을 꼿꼿히 세운 채 앉아 공간을 노려보고 있었다. 바다가 천마들을 가로막고 있다면, 광오선을 막은 건 용혈막이었다. 그가 아는 마법을 총동원해도 용혈막은 일렁거릴 뿐 무너지지도, 뚫리지도, 찢어지지도 않았다.
이유는 단 하나, 유천주가 살아 있기 때문이었다.
광오선, 아니 암탄주는 느리고 멍청하고 분위기 파악조차 못했던 잠룡을 떠올렸다. 그가 잠룡에서 내쫓을 때까지도 유천주는 거대한 몸을 줄여 효율성을 추구하는 변신 마법을 습득하지 못했었다. 더 이상 유천주를 용족의 일원으로 받아들이지 않기로 했고, 이후 유천주를 생각해본 적도 거의 없었다. 한데, 용족 역사상 유래를 찾을 수 없는 멍청한 그 녀석이 아직도 살아 있을 줄이야.
충동적으로 일어서서 앞으로 걸어간 광오선은 앞으로 입김을 불었다. 쭈글쭈글한 입술 사이로 뿜어져 나간 따뜻한 기체는 용혈막의 표면에 닿아 무지개빛으로 반짝거렸다. 그러나 용혈막은 곧 투명해졌다. 반응으로 보아 지극히 정상적인 용혈막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유천주조차 저주로 약해졌다는 뜻이다.
지하로 내려온 목적은 이미 달성했지만 유천주를 만나고 싶은 마음을 거둘 수가 없었다. 유천주는 이 세상에 남은 단 하나의 용이었다.
만약 유천주가 저주를 극복할 가능성이 있다면?
유천주를 잠룡으로 맡아 명룡으로서 가르칠 때, 암탄주는 오랫동안 고민을 거듭한 끝에 그를 버렸다. 정상적인 용으로, 위대한 존재로 성장할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그러나 유천주는 용혈막을 만들어낼 만큼 강력한 용족의 일원으로 성장했고, 저주를 상대로 아직까지 버티고 있었다. 느리지만 꾸준한 유천주에게 그 저주를 극복할 남다른 요소가 있지는 않을까?
그런 이유로 암탄주는 그가 아는 강력한 마법을 용혈막에 쏟아부었다. 반응은 없었다. 유천주가 용혈에 있다면 당장 달려올 텐데. 아무래도 유천주는 유타루체에 올라가 있는 모양이었다. 그를 만나려면 암탄주도 올라가는 수밖에 없었다.
발길을 돌려 위로 올라가는 길에 ‘만천상화진운법’이 펼쳐진 곳에 들렀다. 빛나는 마법진 위에 눈을 감은 채 반듯하게 누워 있는 천마들, 그 천마들을 감싼 암록색의 나뭇가지들. 무려 백 년 가까이 공들여 직접 준비한 환상 마법진에 푹 빠져 허우적거리는 놈들을 이 자리에서 죽여도 되지만, 암탄주는 그들에게 지옥으로 변한 세상을 보여주고 싶었다. 오만한 그들의 반응을 보고 싶었다.
사령마의 뺨을 가볍게 찰싹 때린 암탄주는 파멸을 목전에 둔 인간들이 바글거리는 도시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