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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천파는 어둠 속에 서 있었다.
혼자라고 생각했지만 그를 덮은 짙은 안개 너머에서 그림자들이 어른거렸다. 빼빼 마른 형체들이 다가오고 있었다. 악취가 코를 찔렀고, 두려움에 피부가 따끔거렸다. 그런데 누천파는 기뻐하고 있었다. 왜 그런 감정이 드는지 그 자신도 몰랐다.
동료들이었다.
동족이었다.
누천파는 자신을 둘러싼 그들에게서 깊은 교감을 느꼈고, 그들 역시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는 사실 또한 알았다. 자연스럽게 그들이 누천파를 인정했다. 말랐음에도 힘이 숨겨져 있는 몸을 굽혀 우두머리를 향한 경외심을 보였던 것이다.
그 순간, 누천파는 그들의 대장이 되었다.
사냥이 시작되었다.
혼자 들킬까봐 전전긍긍하며 소심하게 먹잇감을 찾으러 돌아다녔던 누천파가 아니었다. 체계적으로, 조직적으로, 효율적으로 먹잇감을 택하고 다 같이 그 먹잇감을 구석으로 몰아넣는 과정 자체만으로도 짜릿할 만큼 훌륭했다.
그러나 신중한 접근을 해야 한다는 것, 특이한 기운이 흐르는 자들은 피해야 한다는 점이 못마땅했다. 그는 물론 사냥에 참가한 동족도 그 이유를 몰랐다. 그저 살아남기 위해서는 그 거슬리는 기운이 감지되는 인간은 건드리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만 알았을 뿐이다.
사냥이 끝난 후, 누천파는 동족과 함께 지하로 내려갔다. 더 이상 어둡지 않았다. 눈은 금세 지하 통로에 적응했고, 동족의 얼굴에서 기괴하나 감정이 듬뿍 담긴 표정을 읽을 수 있었다. 가까이 다가간 후에야 그는 동족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그들이었다.
륜사를 마둔수탑의 부탑주 자리에서 끌어내리기 위해 직접 죽였던 자들이었다. 패혈력을 익히는 죽음의 마법사 소행으로 음모를 꾸며서 엄포윤에게 뒤집어 씌웠고, 그 후폭풍으로 륜사가 마둔수탑에서 스스로 물러난 이후, 누천파는 한 번도 그 사건을 생각하지 않았다. 그때서야 이 모든 게 꿈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 꿈이야.
“꿈이라면 악몽일거야. 끔찍한 악몽. 영원히 지속되는 악몽. 너도 우리 중 하나니까.”
코의 일부가 날아가버려 들창코가 된 사내가 중얼거렸다.
악몽이라는 단어가 누천파의 가슴 깊숙한 곳을 찌르고 흔들어댔다. 왜 이리도 아픈지 그는 알 수가 없었다. 지독한 상실감이었다. 무엇을 잃었을까?
륜사를 밀어내고 부탑주 자리를 차지했는데. 혹시 요즘 부쩍 세를 늘리는 백중파가 신경 쓰여서일까? 그래봐야 백중파는 삼류 건달들의 모임에 불과했다. 최고의 지성들이 모여서 마법이라는 우아하고 강력한 학문을 연구하는 마둔수탑에 비교할 수조차 없었다.
그런데 왜 이리 가슴이 따끔따끔할까?
왜 이리 마음이 답답할까?
서서히 꿈에서 깨어난 누천파는 천장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눈물이 흘렀는지 뺨에 자국이 남아 있었다. 화들짝 놀라서 벌떡 일어나게 만드는 꿈보다 더 무섭고, 오싹한 꿈은… 서서히 뇌리에서 사라졌다.
사위가 고요한 새벽이었다.
오랜만에 느끼는 이 평온함을 만끽하고 싶지만, 그 충동이 불쑥 솟아나 평정을 깨뜨렸다. 강렬하다는 말로는 표현이 불가능한 지독한 갈증이 그를 덮쳤다. 억누르면 더 크게 폭발할 갈증을 잠재우기 위해 그는 가문의 저택을 빠져나왔다. 동틀 무렵이라 오가는 사람들이 제법 많았다.
희뿌연 안개가 깔렸다.
짙은 안개는 거리감을 지워버렸다. 가까이 있는지, 멀리 있는지 감춰버릴 뿐 아니라, 안개 자체가 손으로 잡을 수 있을 만큼 짙었음에도 움켜쥘 수 없는 것이어서 누천파는 다시 꿈을 꾸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호수 쪽에서 불어온 바람이 안개를 밀어 도시 밖으로 내몰기 전까지, 누천파는 유령처럼 안개처럼 둥둥 떠다녔다.
빌어먹을 악몽으로 기분이 더러웠다.
빨리 갈증을 채우기 위해 목표물을 고르는데 집중했다. 젊고, 통통하며, 건강한 하녀가 그에겐 안성맞춤이었다. 사라져도 기를 쓰고 찾을 가족이 없는 하녀라면 금상첨화였다. 적당한 먹잇감을 찾아내고 접근하는데, 예상치 못한 상황이 시작되었다.
속에서 굶주린 늑대가 발광을 했다. 지나가던 마차 안에 탄 여자 때문이었다.
누천파는 고개를 저었다. 그 여자가 누구인지 알았기 때문이다. 반우현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던, 이제는 반우현의 명령을 받아 황제의 여자를 쫓아다니는 그 하녀였다. 이름이 위연미라고 했던가.
그 여자를 건드리면…… 일이 복잡해진다.
안 된다.
참아야 한다.
그렇게 중얼거리면서도 누천파는 그 마차를 쫓고 있었다. 안개로 인해 천천히 달리던 마차가 멈춘 곳은 군강검이었다.
누천파는 가까이 다가가지 않았다. 곳곳에서 감시하고 있을 근위기사단과 마법사 때문이었다. 수상쩍은 행동을 하다가 발각이라도 된다면… 모든 것을 잃고 말리라. 있는 힘껏 자제력을 그곳을 벗어났지만, 한 번 불붙은 갈증은 꺼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예기치 못한 순간에 터지기 위해 내부에 압력을 쌓고 있었다.
억누를 길이 없는 충동과 갈증 때문에 마둔수탑으로의 출근을 포기했다. 하루도 버티지 못하고 그 예리한 보주관에게 들킬 것 같았다. 어쩌면 륜사가 아끼던 그 여자의 목을 물어뜯어 피를 마신 후에 죽여버릴지도 모르지만.
누천파는 뒷골목에서 하녀를 잡아다가 목을 물어뜯었지만… 오히려 구역질을 하며 피를 토하고 말았다. 위연미 피 외에는 어떠한 피로도 갈증은 채워지지 않을 터였다.
언제까지 참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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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이 따끔거렸다.
눈을 뜨자마자 몸을 일으킨 단태는 문을 잠근 후 탄면을 벗었다. 하마터면 가면이 피부에 들러붙을 뻔했다. 물이 담긴 대야에 탄면을 넣고 벽에 기대어 선 그는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유천주가 스스로 무룡이 된 후, 이렇게 오랫동안 잠을 잔 적은 없었다. 너댓 시간이나 골아떨어졌는데도 피곤이 물러가지 않다니. 그만큼 광장의 기적이라 불리는 그 사건 때문에 기진맥진했던 것이다. 벌써 사흘이나 지났는데도 피로감이 사라지지 않는 건, 의외였다.
수분을 흡수하여 축축해진 탄면을 얼굴에 댄 단태는 백중파 소유의 건물 꼭대기 방에 있으면서도 도시 곳곳을 보고, 듣고, 경험할 수 있었다.
한꺼번에 연결된 사람들 전부의 감정, 감각을 알 수는 없었다. 서너 명, 혹은 너댓 명 가량의 내면이 단태와 연결되었고, 불과 몇 초만에 다른 사람들로 연결은 대체되었다. 그런 식으로 어떤 사람과 이어질지 단태 자신도 예측할 수 없었다.
단태는 그 기이한 연결에 이름을 붙였다.
[군라중망]
사람들로 이루어진 그물망이라는 뜻이었다.
군라중망을 통해 들여다본 사람들은 다양하다는 말로는 부족할 만큼 각양각색이었다.
한 사람, 한 사람 달라도 너무 다른 개인이었고, 아버지와 어머니, 상인과 용병, 마법사와 관리 등 역할이나 직업으로 묶어두기엔 너무나 자유롭고 풍요로운 존재였다.
문득 단태는 취영루에 있는 어머니도 여자라는 점을, 한때는 꿈을 소중히 여겼던 소녀였음을 깨달았다. 어머니는 무엇을 원했을까? 도박에 미친 남편을 만나 아들, 딸을 낳는 게 어머니의 꿈일 리는 없다. 그 꿈은 왜 힘없이 이지러졌을까? 노력을 하지 않아서?
그럴 리는 없다. 어머니는 누구보다 성실한 분이니까.
아버지는 어디 있을까?
은연중 단태는 아버지를 찾고 있었다. 스쳐 지나가는 장면 속에 초췌한 아버지의 얼굴이 있지 않을까 생각한 적이 많았다. 어쩌면 아버지는 유타루체를 떠나버렸는지도 몰랐다.
열린 창문으로 란조가 날아와 단태의 어깨에 내려앉았다. 단태는 도시를 떠나 숲이나 산기슭에서 시간이 많아진 란조의 목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긁어주었다.
“며칠만에 나타난 건지 넌 모르지?”
란조는 부리로 단태의 귀를 쪼았다. 아프지 않았다. 애정의 표현임을 단태는 잘 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