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7 회: 7-6 -->
“유천주는 용혈에 있겠지?”
명국영이 물었다.
“…그렇습니다.”
단태는 유천주가 죽었다고 말할 수 없었다. 그 사실이 가져올 결과 때문이었다.
“진작 물어봤어야 했는데, 어떻게 유천주로부터 풀려난 거냐?”
“마둔수탑에서 제가 살아남은 것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최선을 다해서 용혈이라는 낯선 세계에 적응했고, 그 덕분에 딱 한 번 찾아온 기회를 놓치지 않았으니까요.”
“혹시 유천주가 저주로 인해 거동이 불편한 상태는 아니냐?”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단태는 자신도 모르게 딱딱한 어조로 물었다.
“용은 자존심이 센 종족이라는 건, 이미 오래 전에 알려진 사실이다. 한데, 너는 자연스럽게 유천주인 척했다. 오해하지 마라. 널 탓하는 게 아니니까. 난 그저 유천주의 상태가 궁금할 뿐이다.”
“시청의 중앙탑을 무너뜨린 건, 제가 아니라 유천주입니다.”
“하긴.”
명국영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마음까지 만족하진 못했다.
마차는 군강검 앞에 도착했다.
한층 엄격해진 근위기사단의 몸수색을 통과한 단태는 황제가 기다리는 응접실로 올라갈 수 있었다. 황제는 륜사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응접실로 들어선 단태는 잠시 기다렸다.
“이리 와 앉지? 안 그래도 자네 이야기를 하고 있었네.”
황제가 힐끔 단태를 쳐다봤다.
“네, 폐하.”
비공식적 스승으로서 황제 앞에서도 앉을 수 있는 권리가 주어진 단태는 황제 맞은편에 앉았다. 명국영은 단태 옆에 자리 잡았다.
“정말 그 광장에 수천 명이 모였다는 건가?”
“그렇습니다.”
륜사는 단태를 보지 않으려 애를 썼고, 단태 또한 그런 기색을 눈치 챘다. 단태는 몹시 불편했다. 황제와의 약속이 아니었다면 취소해버렸을 텐데.
황제는 눈을 반짝이며 단태를 응시했다.
“근위기사단 소속 기사 한 명이 그 광장에 있었는데, 놀라운 경험을 보고하더군. 수천 명으로 가득한 광장은 숨소리까지 들릴 만큼 조용했지만,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기이한 현상 때문에 그 어떤 연설이나 공연보다 대단했다니 말이야. 대체 어떻게 한 건가?”
“…장당전 의례에 참석하신 적 있으십니까?”
단태는 황제가 그 일을 모를 리 없다고 생각했기에 준비한 답을 설명하기 위해서 먼저 질문을 던졌다.
“당연히 있지. 황제는 장당전 뿐 아니라 원당, 적률당, 모굴당의 예식에까지 얼굴을 내밀어야 하거든. 그들도 제국의 백성이니까.”
“그 의례에서 경이로운 느낌을 받은 적, 없으십니까?”
“없다. 단 한 번도.”
황제는 단호했다.
그의 생각에 종교는 사람들이 가진 고질적인 틈을 비집고 들어가 자리를 잡는 기괴한 사상이었다. 종교는 사람들에게 평안을, 혹은 사후 세계의 보상을 약속한다. 먼 미래를 바라봄으로써 현실을 잊게 만든다.
황제로서 종교를 인정할 뿐 아니라 그 모임에 참석한 이유는 종교가 사람들의 눈을 가려 불필요한 충돌을 줄여주기 때문이었다. 그런 기능을 배제한다면 종교는 아무짝에도 쓸데가 없는, 망상에 불과한 이론이었다.
“지금까지 놀랍고 신기한데 그 이유를 몰라서 당황하신 적은 없습니까?”
“왜 없겠어? 바로 지금이 그런 순간이야. 그대는 어떻게 광장에 모인 사람들을 하나로 묶을 수 있었지? 백중파로 몰려드는 사람들이 제법 많다지?”
“…그렇습니다, 폐하.”
“자, 말해봐. 어떻게 그런 일이 벌어질 수 있지?”
황제는 성급한 태도를 숨기지 않았다.
매순간 새로운 방식이 적용된다고 해도 제대로 일이 풀릴 가능성은 그리 크지 않았다. 누구보다 정치를 잘 알고, 또한 정치적 능력을 갖추어야 하는 사람이기에 황제는 깊은 갈증을 감출 수가 없었다.
“굳이 말한다면 제가 광장에 모인 사람들에게서 경이로움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그들 또한 제게서, 그들 서로에게 경이로움을 느꼈고, 그 감정이 저도 예측할 수 없는 방식으로 움직였기 때문입니다.”
“이해할 수 없군.”
“폐하께선 이해할 수 없을 겁니다.”
“…무슨 뜻인가?”
황제는 추측이 아니라 단호한 선언이라는 점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감히 황제를 제멋대로 판단하다니.
“폐하께서는 제국을 통치하십니다만, 폐하의 명령을 받는 사람들을 진심으로 대하지 않습니다.”
“…….”
황제가 주먹을 꽉 쥐고 이를 악문 채로 단태를 노려보았다. 당장 근위기사단을 불러 단태를 감옥에 처넣으라고 명령할 것만 같았다.
옆에서 대화에 귀 기울이던 명국영은 끼어들어야 할지, 참아야 할지 알 수가 없어 당황한 기색을 드러내고 말았다. 륜사도 안절부절 못했는데, 단태만이 황제의 날카로운 시선을 담담하게 받아내고 있었다.
“폐하께서는 황위를 너무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십니다.”
“당연하지. 선황께서 내게 물려주셨으니까.”
황제는 노기를 억누르느라 목소리까지 떨렸다.
“선황의 선황의 선황, 그런 식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언젠가 황제 폐하가 아닌, 평범한 사람의 아들로 태어난 분에 이를 수밖에 없습니다. 바로 용령제국을 세우신 태조 폐하시지요. 그분에겐 황위는 자연스럽지 않은, 죽을힘을 다해서 이뤄낸 기적 같은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눈썹 끝이 위로 치솟았다. 일단 무도한 말을 다 들은 후에 처벌을 해도 늦지 않겠다는 생각이었다.
“태조 폐하는 하늘 앞에서 백성과 계약을 맺으셨습니다. 백성을 이끄는 사람으로서, 하늘의 아들로서 백성의 유익을 위해 혼을 바치시겠다고 선포하셨습니다. 그러나 당시에 태조 폐하의 황위를 못마땅해 하는 자가 많았고, 태조 폐하께서는 지혜와 힘을 적절히 이용하여 그들을 굴복시켰습니다. 수십 년에 달하는 그 과정을 통과한 후에야 태조 폐하께서는 진정한 황제로 사람들의 마음속에 우뚝 설 수 있었습니다. 허나, 폐하께선 그 과정을 건너뛰셨습니다.”
“날 황제로 인정할 수 없다는 뜻인가?”
이맛살이 찌푸려졌다.
“인정할지, 말지는 상대에게 달려 있지 강요로 얻어낼 수 없다는 점을 잊지 마십시오, 폐하.”
“…재미있군. 그대는 백중파를 굴복의 과정을 통해 세웠나?”
“그렇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단태는 차분했다.
“그래서 황제인 나를 능멸할 수 있다고 착각한 건가?”
“불편하시다면 지금 당장 저를 내치시면 됩니다, 폐하.”
여전히 대담하면서도 여유로운 단태.
“…….”
황제의 얼굴은 노기와 광기가 뒤섞여 뒤틀리는 동시에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겨우 불편?
역심을 품지 않고서야 어찌 이런 말을 할 수 있을까?
마음 같아서는 당장 이 건방진 놈을 감옥에 처넣고, 가능한 고문을 모조리 동원하여 놈을 괴롭힌 다음에 공개적으로 처형하고 싶었다. 그렇게 한다면 이 격분은 누그러뜨릴 수 있겠지만, 진정 배우고자 했던 바는 결코 얻지 못하리라.
마음이 차분해지자 냉철한 놈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태어나서 한 번도, 심지어 황명거사 석장명조차 건드리지 않았던 영역으로 거침없이 파고든 사람의 표정답지 않았다.
저 망할 얼굴 때문에 더 화가 났다. 마땅히 보여야 할 두려움, 혹은 공포의 기색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왜 놈에게서 두려움이 드러나기를 원할까? 왜 황제는 공포의 대상이어야 한다고 생각했을까?
질문해보지 않았다. 그러나 답은 알고 있었다.
손쉽게 지배하기 위해서였다. 보다 간단히 통치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두려움과 공포는 논리를 깡그리 무시한다. 사리에 맞지 않아도 공포가 동원되면 통치 방식을 유지할 수 있다.
그때, 단태가 말했다.
“폐하께서는 더 이상 힘으로 통치의 정당성을 보여줄 필요가 없습니다. 이미 제국의 꼭대기에 서 계시니까요. 폐하는 백성에게 아버지입니다. 몽둥이를 휘두르며 명령을 내리는 아버지에게 아이들은 복종할 수밖에 없지만, 지혜로… 말로… 설득으로… 아이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아버지를 위해서라면 아이들은 무엇이든 할 겁니다. 폐하께서는 그 부분을 주목하셔야 합니다.”
“…내가 그저 몽둥이나 휘두르는 아버지 같은 황제라는 뜻인가?”
“아니십니까?”
“…….”
공기를 들이마신 황제는 심호흡으로 마음을 가다듬었고, 명국영은 눈짓으로 만류했지만 단태는 황제만 쳐다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