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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결정을 하든지 폐하께서는 마지막 수단으로 힘을, 군대를 염두에 두고 계십니다. 수도방위군이 왜 남하했습니까? 폐하의 명령 없이 군대가 움직일 수 있습니까? 그럴 수 있다면 폐하께선 제국의 황제가 아니십니다. 폐하께서는 정치적 이익을 위해 군대를 움직였고, 그 덕분에 유타루체는 한바탕 혼란에 빠져들었으며, 개인적으로 저는 체포되어 평생 지하 감옥에서 썩을 뻔했습니다. 저는 정치가 현실이며, 군대야말로 필요한 도구라는 점을 알고 있습니다. 아버지는 말 안 듣는 아이들을 몽둥이로 때립니다. 하지만 아이들이 아버지에게, 부모에게 순종하는 건, 몽둥이 때문이 아니라, 몽둥이를 잡은 손에 담긴 사랑 때문입니다. 폐하께선 그 점을 망각하지 마십시오.”
“그대는 할 말 없게 만드는 재주를 가졌군. 황명거사처럼 말이야.”
황제는 흥분을 가라앉혔다. 대신들의 결집을 깨뜨리고 배후의 세력을 끌어내기 위해 계획한 암살미수 사건으로 직접적인 피해를 봤거나, 볼 뻔한 사람이 바로 눈앞의 사내였기 때문이다.
“진정으로 백성을, 아랫사람을, 신하를 마음에 두십시오. 폐하를 두려워하되, 아들이 아버지를 존경하듯 두려워하게 만드십시오. 그러면 폐하는 어질고 뛰어난 황제로 기억될 것입니다.”
“자네는 어떻게 존경하면서도 두려워하게 만들었는가?”
위기를 넘긴 황제는 핵심을 찔렀다.
“간단합니다. 압도적인 실력을 보여줌과 동시에 아무것도 취하지 않는 겁니다. 알고 계시겠지만, 저는 백중파를 이끄는 사람이지만 집 한 채, 땅 한 조각도 소유하고 있지 않습니다. 제가 백중파에 쏟아 부은 돈은 골고루 조직원 전체에게 분배되었습니다. 물론 그들은 돈을 직접 받은 게 아닙니다. 살아가는 방식을 변화시키는데 그 돈이 사용되었으니까요. 현재 백중파는 어마어마한 돈을 벌어들이고 있습니다. 제가 원한다면 유타루체 최고의 부자가 될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전 돈에 만족할 수 없습니다. 더 강한 백중파, 더 발전한 백중파를 보고 싶을 뿐입니다.”
“…….”
황제는 입을 다물었다.
황위 계승자로 태어난 그에게 주어진 유산은 보통 사람의 머리로는 생각하기 어려울 만큼 막대했다. 용금탄은 물론 제국 곳곳에 그의 땅이 펼쳐져 있었다.
때로는 산맥 전체가 그의 뒷산이었고, 곡창지대인 거대한 들판이 그의 앞마당이었다. 황금으로 그득한 지하창고가 있는데도 직접 가서 본 적도 없었다. 보물로 쌓인 방의 존재도 문서를 통해 알고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황제는 선황으로부터 받은 유산을 누군가에게 베풀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래야 한다는 마음조차 생기지 않았다. 유산은 아버지에게 물려받았으니, 오로지 그 자신의 몫이 아닌가. 누구도 그 유산에 눈독을 들이면 역적이라는 대가를 치르리라. 그게 황제의 생각이며, 황가의 가르침이었다. 왜냐하면 제국 전체를 움직일 만큼 광대한 자금이야말로 통치권을 공고히 지탱하는 기둥이기 때문이다.
군대도 자금 없이는 움직이지 않는다. 대신도, 관리들도, 심지어 제국의 운영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무지렁이들조차 돈이 들어가야 원하는 대로 동작한다.
돈은 세상이라는 거대한 기계를 돌리는 윤활유였다.
황제가 될 운명으로 태어나, 황제가 되기 위해 어릴 때부터 머릿속에 구겨 넣고 마음에 새긴 제왕학의 핵심은 어떻게 세상을, 사람을 원하는 대로 움직이는가였는데, 결론은 단순했다.
힘이었다.
돈이었다.
권력이었다.
틀어쥐고 있어야 군림할 수 있고, 군림해야 통치할 수 있는 게 황제라는 자리였다.
백중이라는 자는…… 정반대 방향으로 통치를 설명하고 있었다.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무것도 가지지 않고 어떻게 사람들을 이끌 수 있을까? 혹시 거짓말을 하는 건 아닐까? 하지만 명국영을 통해, 믿을 만한 사람들의 보고로 백중에겐 아무것도 없음을 황제는 들어서 알고 있었다.
무엇보다 직접 만나서 이야기를 나눈 자신의 직감이 거짓이 아님을 말하고 있었다. 처음 봤을 때부터 속을 알 수 없는 자였다. 저자의 목적은 무엇일까? 저자의 끝이 보이지 않는다. 백중파는 어디까지 갈까?
혹시?
아닐 것이다.
아니어야 한다!
그 순간, 황제는 왜 백중이라는 자를 처음 본 순간부터 마음속에 희미한 적개심이 느껴졌는지 깨우쳤다. 전율이 몸을 훑었다. 짜릿하면서도 음산한 무언가가 가슴 안쪽을 더듬고 있는 것 같았다.
얼마 전에 찍어낸 대사마 좌영윤, 지금쯤 승상을 실각시키기 위해 계략을 꾸미고 있을 환관장 평용구와 어사대부 패환, 그리고 어떻게 살아남으려는 동예는 눈앞에 앉아 있는 사내에 비하면 적이라고 할 수조차 없는 버러지 같은 놈들이었다.
그들이 어떤 짓을 하더라도 제국이라는 거대한 구조 자체를 바꾸진 못한다. 오히려 그들은 제국이라는 정해진 틀 안에서 더 많은 힘을 취하려고 애를 쓸 뿐이다.
그에 반해, 백중은 제국의 근간을 흔들고 있었다.
용령 제국은 건국된 순간부터 계급을 강조했다. 노예, 하층민, 스스로 평범하다고 여기는 중산층, 그리고 귀족, 고위 관료를 비롯한 지배층으로 이어지는 계급 구조는 제국의 숨겨진 뼈대였다. 그 뼈대가 지탱하는 몸을 휘감고 돌며 영양을 공급하는 게 바로 돈이며, 권력이며, 힘이었다.
백중은 제국이라는 거대한 생물을 부정할 뿐 아니라, 또 다른 방식이 가능함을 백중파라는 조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아직 사람들은 백중파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지금, 백중파를 무너뜨려야 한다. 무엇보다 저 사내를 죽여야 한다. 두 번 다시 백중 같은 놈이 등장하지 않도록 뿌리까지 뽑아버려야 한다. 사내와 관련된 자들은 모조리 죽여야 하리라.
“오늘은 이만 하지.”
“알겠습니다, 폐하.”
군강검 밖으로 나온 단태는 몸을 돌려 화강암을 쌓아올려 요새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객관을 올려다봤다.
황제가 머물 만한 곳이었지만, 두 번 다시 찾아오고 싶지 않았다. 금색 마차에 올라탄 그는 눈을 감았다. 황제는 의외의 인내심을 발휘했지만, 결국 권력에 사로잡힌… 권력을 위해 태어난 지극히 평범한 인간에 불과했다.
황제가 무엇을 생각하는지, 어떤 결론에 이르렀는지 단태는 알고 있었다. 그의 내면을 들여다봤기 때문이 아니라, 그토록 똑똑한 황제라면 백중파라는 조직이 갖는 가치를 간파하리라 예상했던 것이다.
괜한 짓을 했을까? 시청과 11인위원회만도 벅찬데, 황제까지 적으로 돌린 셈이 아닌가.
단태는 후회하지 않았다.
오히려 흐뭇하기까지 했다.
황제는 특출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저 제국 최고의 가문에 태어나 황위를 계승한 사람에 불과했다. 물론 그도 숱한 위험을 벗어나고 아찔한 곤경을 극복하느라 죽을힘을 다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과정이 사람을 내부로부터 완전히 바꿔놓지는 못했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정해져버린 틀 밖으로 나올 생각이 없었다. 나올 용기가 없을지도 모른다.
그때, ‘쾅’ 굉음이 들리며 마차가 옆으로 기울어졌다. 마차를 끄는 두 마리의 말이 고통에 찬 비명을 토해냈다. 창가로 다가선 단태는 빠르게 다가오는 운하를 발견했다. 마차는 운하에 빠지기 직전이었다.
풍덩.
빠르게 가라앉는 마차.
단태는 섣불리 마차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예상대로 화살이 비 오듯 수면을 뚫고 아래로 날아와 마차 지붕에, 벽에 푹푹 박혔다. 가끔 강력한 마법이 날아와 마차를 거세게 흔들었지만, 워낙 견고하게 제작된 황실 전용 마차여서 깨지지는 않았다.
마차는 곧 바닥에 닿았고, 문틈으로 물이 새어 들어왔다.
단태는 가만히 앉아 생각에 잠겼다.
얼마나 급했으면 황제의 문양이 그려진 마차를 공격했을까? 운하에 퍼부은 마법의 수준을 고려하면 마둔수탑의 마법사들까지 동원되었을 것이다. 물에서도 힘을 잃지 않는 화살이라면 당용파를 비롯해 각 가문이 거느리거나 관련이 있는 용병단 소속 용병들이 이번 일에 투입되었으리라.
물이 마차 안을 가득 채웠다.
단태는 전혀 불편하지 않았다. 물속에서의 호흡은 오히려 마음을 차분하게 해줄 만큼 그에게 친숙했다. 그는 마차 밖으로 나와 더러운 운하의 바닥 깊이로 헤엄을 쳤다. 좁은 수로로 접어든 후에도 한참 동안 물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그를 찾으려는 사람들이 사방으로 깔려 있으리라 예상했던 것이다.
말뚝에 묶인 배 아래에 숨었다. 사람들을 피해서 숨었다기보다는 물속에서 생각을 정리하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