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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태신곡-259화 (259/2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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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천주가 죽은 후, 용혈을 벗어나 유타루체로 돌아온 이유는 단 하나 어머니와 설희 때문이었다. 돌아가신 줄 알았던 어머니는 취영루에 기거하며 생활하고 있었고, 설희는 황제 곁에서 위험하지만 대접받으며 지내는 중이었다.

노예 매매 같은 불합리한 제도를 없애고 보다 나은 유타루체를 만들고자 시작했던 백중파는…… 황제까지 적으로 돌릴 만큼 거대한 조직으로 성장했지만, 의도적인 결과는 아니었다.

그렇다고 아무런 의도가 없는 결과라고 할 수도 없다. 노예 제도, 단태와 그 가족을 지옥으로 몰아넣은 그 제도의 배경에 제국이 있으며, 그 정점에 황제가 서 있었다.

황제 개인이 모든 노예 매매를 책임질 수는 없지만, 황제라는 지위는 노예 매매가 가능하도록 만드는 일종의 구심점이었다. 황제는 절대 그런 진실을 인정하지 않겠지만, 제국의 법은 백성을 황제의 노예로 규정하고 있었다. 노예라는 단어만 쓰지 않았을 뿐, 지배층을 제외한 사람들은 모두 황제의, 상류층의 노예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단태는 눈을 감았다.

이제야, 무엇과 싸우고 있는지 깨달았다!

진정한 적이 무엇인지 알아차린 셈이다. 그래서 마음이 무거웠다.

그가 생각해도 승산이 없는 싸움, 패배라는 결과를 목전에 둔 전투였다. 세상이 돌아가는 방식, 자연이 작동하는 규칙을 거슬러 새롭게 살 수 있음을 보여줄 수 있을까? 약육강식 외에도 길이 있음을 사람들이 납득하도록 설명할 수 있을까?

비록 유천주가 결존계라는 독특한 마법진을 실행했기 때문에 백중파라는 조직이 기대 이상으로 성장하고 있지만, 이 모든 상황의 출발점은…… 희망을 안고 유타루체에 들어섰던 그 날 진실을 맞닥뜨린 순간이었다.

찬란한 꿈 대신 참혹한 현실을 보게 한 그 순간, 소마선을 훔쳐 타고 엄마를 되찾으려고 노예 매매소로 갔다가 잡혔던 그 순간, 패할 수밖에 없는 싸움을 향한 깊은 욕망이 단태 내부에 자리 잡은 것이다.

도양이라는 작자, 미웠다. 그러나 도양 같은 노예 상인이 활동하도록 조장한 도시의 속살은 용서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포기하지 않았고, 그래서 여기까지 온 것이다.

돌아갈 곳은 없다.

돌아가고 싶지도 않다.

단태는 오히려 소극적인 태도를 버리고 전장으로 뛰어들 생각이었다. 적의 정체를 알았으니, 이 순간 죽을힘을 다해 싸우리라.

쇠를 덧씌운 배의 끝부분을 손으로 꽉 잡은 단태는 팔 힘만으로 물을 빠져나와 공중으로 솟구쳤다.

그를 발견한 사람들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소리쳤고, 곧 중무장한 사내들이 이제 막 간이 선착장에 착지해 몸에서 물이 뚝뚝 떨어지는 단태를 반원형으로 포위했다. 석궁을 든 자들, 칼과 도끼를 휘두르는 자들, 창을 앞으로 내민 자들 모두 드디어 해냈다는 흐뭇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무사히 빠져나갈 가능성은 없다는 그들의 판단을 단태는 박살내고 싶었다.

“덤벼.”

단태는 손가락을 까딱거려 사내들을 도발했다.

“…….”

백 명이 넘는 사내들은 너무도 자신만만한 태도에 눈살을 찡그리며 시선을 교환했다.

죽여도 좋다는 지시를 받았기에 그들 중 하나가 석궁의 방아쇠를 당겼다. 일반 화살보다 작고 단단해서 웬만한 목제 방패까지 뚫어버리는 고성능 화살이 공기를 뚫고 날아갔지만, 이미 단태가 뻗은 손가락 사이에 잡혀 있었다.

“느려.”

그 말에 수십 개의 화살이 단태를 향해 쏟아졌다.

단태는 거기 없었다.

화살이 팍팍팍 수면에 처박힐 때, 단태는 석궁을 재장전하려는 궁수들 사이로 파고들어 천융지로 어리둥절한 놈들의 급소를 찔렀다. 강도를 조절하여 하루나 이틀 몸이 마비될 정도로 펼친 천융지에 찔린 궁수들은 신음도 흘리지 못하고 석상이 되었다.

솜씨 좋은 석공이 작품들 사이에 서서 자신의 솜씨에 감탄하는 것처럼, 단태는 얼어붙은 궁수들을 쳐다보았다. 이들 중 한 명도 신념, 즉 스스로 판단해서 단태를 죽이려 하지 않았다. 고용된 자들, 돈을 받고 사람을 죽이기 위해 찾아온 용병들이었다.

용병을 무조건 나쁘다고 매도하고 싶지 않지만, 그 용병이 목숨을 노리는 당사자라면 달려드는 용병을 죽여도 무방하다. 시법원조차 그런 살인은 눈감아 주었다. 그럼에도 단태는 한 사람도 죽이지 않았다. 죽일 가치조차 없다고 느꼈다.

조금만 힘을 주면 신경이 끊어지고, 핏줄이 터지며, 심장이 멎어 삶을 마감하겠지만, 그들을 죽임으로써 얻는 것은 사소한 만족감뿐임을 그는 잘 알았다. 압도적인 힘을 보여주되 한 명도 죽이지 않는다면 저 용병들을 이곳으로 보낸 자들도 다음 계획을 짜기기 쉽지 않을 터였다.

칼과 도끼를 든 자들이 달려들었다.

느렸다.

답답해서 하품이 나올 정도로.

단태는 용즉계로 그들을 쓸어버렸다.

잠시 후, 단태 혼자 서 있었고 나머지는 마비된 채 바닥을 뒤덮고 있었다. 왼손으로 방패, 오른손으로 창을 든 자들은 뒤로 물러서다 무기를 버리고 달아났다. 그들을 쫓아가서 쓰러뜨리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때, 반짝이는 것들이  날아왔다.

단태는 즉시 풍갑을 펼쳤다.

윙윙 소리를 내며 몸을 휘감는 거센 바람의 갑옷에 부딪힌 투령수가 사방으로 튕겼다. 물을 기다란 침의 형태로 가공하여 쏘는 마법 투령수는 벽에 박혔고, 일부는 창을 통해 건물 안쪽 천장에 꽂혔다.

좁은 골목길 맞은편 건물 옥상에 자리 잡은 마법사들이 고개를 든 단태의 눈에 들어왔다. 단태는 풍갑을 펼친 채 벽을 타고 지붕으로 올라가 당황하여 앞을 다퉈 달아나는 마법사들을 쫓아가 하나씩, 하나씩 잡았다. 모습을 감추고 뒤를 노렸기 때문에, 그 대가로 오른쪽 팔 하나씩 부러뜨린 후에 마법사를 기절시켰다.

물론 천융지로 급소를 찔러 이틀은 깨어날 수 없도록 만드는 것도 잊지 않았다.

지붕 위를 달리면 빠르고 쉽게 본부로 돌아갈 수 있지만, 단태는 구태여 그러고 싶지 않았다. 지상으로 내려와 당당히 걸었다.

앞을 막으면 쓰러뜨렸다. 뒤통수를 치면 몇 배의 고통으로 응징했다. 이번 습격에 동원된 수백 명의 용병들은 오래지 않아 단태를 쓰러뜨릴 수 없다고 판단했다. 판단이 빨라야 생존 가능성이 높아지는 전장에 익숙한 그들은 자취를 감추었다.

그제야 일중이 보낸 백중파 사람들이 달려왔다. 풍갑을 풀어버린 단태는 근심이 가득한 얼굴을 반갑게 맞았다.

“왜 이리 호들갑이야?”

“…괜찮으십니까?”

종보예가 물었다.

“옷이 좀 젖은 것만 빼면.”

단태는 더 이상 망설이지 않으리라, 더 이상 고민하느라 시간을 낭비하지 않으리라 마음먹었다. 무엇보다, 건드리면 이자까지 쳐서 제대로 갚아주는 방식을 제대로 보여줄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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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완수>를 달달 외울 정도로 읽고 또 읽었지만, 륜사는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 황마사라는 지위 덕분에 황제 곁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살필 수 있었지만, 그로서는 백중이라는 사내를 어떻게 평가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유천주와 맞서 싸운 결과로 얻은 천마라는 보상은 꿀보다 달았지만, 이후 쌓여온 답답함이 근래 들어 폭발 직전에 이르렀다. 그는 여전히 천마의 경지에 다다른 마법사였지만, 소용돌이치는 이 상황에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결정하는데 있어서 마법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그래서 열 일 제쳐놓고 명국영을 찾아가 조언을 구했다. 황마사로서 무엇을 해야 할지 알기 위해서였다.

“놀라지 말게. 백중이 바로 단태라네.”

“…….”

륜사는 할 말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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