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단태신곡-260화 (260/293)

<-- 260 회: 7-9 -->

“얼굴은 특별한 물건으로 바꾼 모양이야.”

“…왜 내게 알리지 않았나?”

“단태가 자네에게 따로 말할 줄 알았네. 내게도 직접 말한 건 아니야. 내가 수상쩍은 느낌을 받아서 찔러봤더니, 그제야 실토를 하더라고.”

“그래?”

륜사는 자존심에 흠집이 났다. 그래도 종자로 거두어주고, 종자장이 되도록 밀어줬을 뿐 아니라,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 도와준 사부님인데. 섭섭한 나머지 울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명국영에게 들키고 싶지는 않았다.

“한 가지 물어봐도 되겠나?”

“…뭐든지.”

륜사는 백중파라는 거대 조직을 이끄는 단태의 눈에 부하의 잘못으로 탑에서 쫓겨난 사부가 어떻게 비칠까 생각하느라 대충 답했다.

왜 찾아오지 않았는지 알 것 같았다. 천마라는 경지에 올랐다고 해도 조직원의 수가 2만 명을 훌쩍 뛰어넘은 백중파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닐 사부는 사부님으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뜻이리라. 비약이라는 점을 알면서도 그런 생각에서 벗어나기가 힘들었다.

“황제 폐화와 단태, 둘 중에 하나를 택하라면 누구 쪽에 서겠나?”

“…….”

륜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느낌이 좋지 않아.”

“…무슨 뜻인가?”

륜사는 옛 제자를 향한 분노를 옆으로 밀쳤다.

“백중파는 독특한 조직이야. 내가 제국 곳곳을 돌아다녔는데도 백중파 같은 조직은 처음이니까. 단기간에 그처럼 많은 사람들을 끌어모은 조직은 없어. 더 놀라운 건, 백중파에 들어간 사람들 중 다수가 이전과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바뀐다는 점이야. 직접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다면 난 도저히 믿지 못했을 걸세.”

“그 정도는 아닌 것 같은데.”

륜사는 괜히 백중파의 영향력을 깎아내리고 싶었다. 단태를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자네가 거기 사람들을 겪어보지 않아서 모르는 걸세. 난 개인적으로 신전을 싫어한다네. 이유는 간단해. 신을 믿는다면서 자신의 삶을 바꾸지 않는 신관들이 대부분이거든. 자신을 바꾸지도 못하면서 어떻게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호언장담을 할 수 있는지, 원.”

명국영은 혀를 찼다.

“백중파는 아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기적이라는 설명 밖에 없네. 그 열정적인 분위기는 인위적으로 만들어낼 수가 없거든.”

“왜 폐하와 단태 둘 중 하나를 택하라고 했나?”

륜사는 원래 흐름을 잃지 않았다.

“아, 그 말을 하고 있었지? 폐하는 예리한 분이시네. 백중파의 내부 구조가 얼마나 기존 조직의 방식과 다른지 꿰뚫어 보신 게지. 제국에 존재하는 크고 작은 모든 조직들은 기본적으로 약육강식이라는 운영 방식을 채택하고 있네. 드러내지 않아도 다들 경쟁적으로 더 강해지려고 애를 쓰지. 신전까지도 말이야. 그래야 도태되지 않으니 말이야.”

“그건 당연한 말이잖아.”

륜사는 일부러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백중파는 아닐세. 오히려 약자를 강자로 만드는 데 공을 들이지. 윤가학관 출신 교수들 중 다수가 백중파로 들어가 교육 과정을 대대적으로 바꾸었다네. 단순히 책을 외워서 시험을 치는 방식이 아니라, 내면의 변화를 목적으로 하는 교육이라더군. 아무튼, 현재로선 백중파는 약육강식에서 벗어난 유일한 조직이라네.”

“그게 그렇게 대단한 건가?”

륜사는 명국영이 왜 흥분하는지, 왜 침을 튀기며 설명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 자체로도 대단하지만, 더 강력한 영향력은 이제 곧 사람들이 백중파가 독특하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발휘될 걸세. 사람들은 질문을 던지겠지. 왜 제국은 백중파처럼 운영되지 않을까? 왜 황제 폐하는 백중처럼 제국을 이끌지 않을까? 사람들은 자신들이 속한 조직의 지배층을 백중과 비교하겠지. 무슨 말인지 알겠는가? 백중은… 지도자의 표준이자 기준이 될 걸세.”

명국영은 감격을 감추기 어려웠다. 그가 그토록 바라던 일이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는데도, 이제야 깨달은 것이다.

젊은 시절 세상을 바꾸고 싶다는 열망에 사로잡혀 <제국의 빛과 그늘>이라는 책을 썼지만, 그 책은 널리 읽혔음에도 현실을 바꾸지 못했다.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 지혜를 나눈 일도 현실을 움직일 수 없었다. 책에 감명을 받았다고 해도 순간의 감정뿐이었다.

여러 번 배신을 당한 후, 명국영은 실의에 빠져 세상을 돌아다녔다. 그러다 하나의 결론에 이르렀다. 자신에겐 세상을 바꿀 추진력이 부족했다. 그러나 누군가가 세상을 바꾸도록 도와줄 수는 있으리라 판단했다.

그 즈음, 마둔수탑의 탑주 누마탄으로부터 부탁을 받아 누천파를 가르치기 위해 유타루체로 향했다. 누천파에게 기대를 걸었지만 처음 만난 순간 싹수가 노랗다는 점을 알아보고 마음을 접었다.

영웅이 될 인재를 찾기가 어렵다고 생각했는데, 엉뚱한 곳에서 단태를 만났다. 아직도 용금탄 광릉 축제에 함께 갔을 때 나눈 대화를 명국영은 잊을 수 없었다.

군왕의 길을 쉬우면서도 핵심을 놓치지 않고 설명하는 단태에게 명국영은 매료되었다. 명국영이 단태를 영웅이 될 그릇이라고 판단한 건, 단태가 암탄주의 유산을 거절했기 때문이었다.

제대로 키워보리라 마음먹게 한 단태가 사라지자, 한동안 의욕까지 잃고 말았다. 걸어야 할 길이 뻔히 보이는데도 왠지 모르게 주저앉고 싶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단태는…… 그만의 방식으로 세상을 바꾸고 있었다. 거창한 계획과는 거리가 멀었다. 시작은 미약했다. 조그만 폭력조직을 찾아가 힘을 보여줌으로써 백중파는 시작되었다. 사람들로부터 쓰레기라 손가락질 당하던 그 거친 사내들을 변화시킴으로써 백중파는 기존 조직을 대상으로 싸움을 시작한 셈이었다.

명국영은 너무나 오랫동안 그 점을 보지 못했다는 사실에 부끄러움을 느꼈다. 단태는 백중파라는 새로운 조직을 직접 보여줌으로써 세상의 지배 구조를 흔들고 있었다.

유타루체의 지도층은 백중파가 얼마나 그들에게 위험한지 아직 깨닫지 못했다. 만약 알았다면 이렇게 크도록 내버려두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도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지만, 반드시 알아야 할 핵심을 그들은 놓쳤다.

황제는 그 점을 간파했다.

황제가 어떻게 나올지 명국영은 알고 있었다. 그래서 두려웠다. 황제는 제국 최강의 권력자가 아닌가? 단태가 백중이라는 이름으로 겨우 수만 명에 달하는 조직을 일구었다고 해도 황제와 맞설 정도는 아니었다.

“난 황마사야.”

륜사가 말했다.

“…그렇다면?”

“제자도 중요하지만, 제국의 질서를 흔들면서 제자를 감쌀 수는 없지. 내가 황마사가 아니라고 해도 말이야.”

륜사는 단태로 인해 상처 입은 자존심에 대해서는 일언반구 내비치지 않았다. 솔직하기엔 사부로서, 마법사로서의 긍지가 컸던 것이다.

“그런가?”

명국영은 안타까웠다.

단태를 지지해야 한다는 이유를 설명하고 싶지만, 설명할 수 없었다. 륜사는 단태의 싸움이 지닌 본질적 가치를 이해할 수 없으리라. 단태가 왜 황제 앞에서 그토록 당당할 수 있었는지, 당당해야 했는지 륜사는 받아들일 수 없으리라.

“자네는 황정어사라는 점, 잊지 말게.”

륜사가 근엄하게 지적했다.

“…….”

왜 륜사가 단태보다 황제를 택했는지 그 이유를 충분히 납득했지만, 명국영은 오랫동안 친구로 지내온 사람과 더 이상 뜻을 같이 할 수 없다는 점 때문에 마음이 아팠다. 륜사는 괜찮은 사람이었다. 가끔 고집불통이어서 답답하지만, 나쁜 사람은 아니었다.

“설마, 그 아이 편을 들 생각인가? 그래선 안 돼! 자네가 중심을 잡아야지. 그 아이는 갑자기 손에 쥔 부와 힘을 이용해 무슨 짓을 하는지도 모르고 있어. 자넨 그 아이를 가르친 스승이 아닌가? 내가 자네라면 따끔한 충고로 그 아이를 설득할 거야.”

“그렇군. 알겠네.”

명국영은 경솔하게 속내를 드러낼 생각이 없었다. 백중이 단태라는 사실을 안 순간부터, 그는 자신을 백중파의 일원으로 간주했다.

놀랍게도 이후로 기이한 현상이 그에게 일어났다. 갑자기 기억력이 좋아졌다. 몸 상태에 따라서 기억력이 들쑥날쑥 왔다 갔다 하는 수준이 아니었다. 가물가물해서 직접 찾아보지 않으면 떠올릴 수 없었던 책들을 줄줄 욀 수 있었고, 앞이 침침해서 안경을 맞춰야 하나 싶었던 눈도 젊은 시절로 돌아간 것처럼 생생해졌다.

가장 큰 변화는…… 생각의 속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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