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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빛과 그늘>을 집필하던 젊은 시절, 1년에 하루나 이틀은 무엇이든 마음만 먹으면 다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혔다. 단순한 기분이 아니었다. 보통 사람보다 생각을 몇 배나 빠르게 할 수 있는 느낌이었다. 평범한 학자에게는 지루한 하루라는 시간이 당시의 명국영에게는 쉼 없는 사흘 혹은 나흘의 시간이었다.
최근 10여 년 동안 한 번도 느끼지 못했던 그때의 감각이 되살아났고, 사라지기는커녕 지속되었다. 백중파에 소속된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만드는 기이한 사건이 명국영에게도 일어난 것이다. 그 덕분에 명국영은 훨씬 많은 자료를, 훨씬 다양한 관점으로 분석하여 정확한 결론에 도달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한 가지 문제는 오리무중이었다.
백중파는… 존재 자체가 기적이었다.
제국 전역을 돌아다니며 보고 듣고 경험한 게 많았던 그가 보기에 백중파는 존재할 수 없는 조직이었다. 모래를 쌓아 올린다고 해서 튼튼한 화강암이 될 수는 없다. 측정할 수 없는 시간과 거대한 압력만이 쌓아서 무너지는 수백만 개의 모래를 암석으로 만들 수 있으리라. 그런 조건은… 한 사람이 이뤄낼 수 없는 환경이었다.
단태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도도히 흐르는 역사가 세상을 바꾸고 있었다.
명국영은 그저 단태 배후에 있는 거대한 힘의 근원을 알고 싶었다. 백중파라는 조직을 일궈낸 그 기이한 힘은 어디에서 시작되었을까?
그때, 한 가지 가능성이 꿈틀거렸다.
가설에 불과한 그 생각은 껍질을 깨고 알 밖으로 나오려고 버둥거리고 있었다. 마침내 구멍이 나고, 가설의 일부분이 드러났다.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던, 가능성조차 염두에 두지 않았던, 그럼에도 떠오르는 순간, 진실이라는 직감이 찾아오는 그런 확신이 들었다.
“…용이었어.”
“뭐라고 했나?”
<지완수> 내용을 깊이 파고드느라 명국영의 말을 놓친 륜사가 물었다.
“아무것도 아닐세.”
명국영은 다시 한 번 마음을 숨겼다.
눈을 감고 내면으로 잠긴 륜사를 힐끔 쳐다본 명국영은 뒤늦게 찾아낸 진실을 살폈다.
실체를 찾기 어려운 그 힘, 단태가 유천주에게서 배운 게 분명했다. 마법이겠지. 그렇다면 단태는 용에게서 얻은 마법으로 백중파라는 거대 조직을 세운 것이다.
또 하나의 가능성이 알을 깨고 밖으로 나왔다.
명국영은 손가락이 아프도록 주먹을 쥐었다. 암탄주의 용혈이 있는 곳 지하에는 미로 같은 통로가 건설되어 있었다. 그런 구조물 덕분에 단태도, 륜사도 염종화탑을 포함한 사악한 자들의 음모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당시엔 지나쳤지만 오래지 않아 명국영은 암탄주 스스로 그 거대한 통로를 만들었을 리 없다는 사실에 생각이 미쳤다. 암탄주의 뜻에 따라 누군가 엄청난 노력이 들었을 그 공사를 대신한 것이다.
누가 했을까?
명국영은 길고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가능성들이 만들어낸 결론은 받아들이기 힘이 들었다.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명국영은 륜사가 듣지 못하도록 속삭였다. 과연 륜사는 해령수체의 수수께끼를 푸느라 여념이 없었다.
만약 단태가 용에게서 배운 마법으로 사람들을 움직이고 있다면?
만약 그 마법이 백중파를 지탱하는 설명 불가능한 실체라면?
명국영은 눈을 감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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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둔수탑이 용금탄으로 옮겨가 팔마탑의 일원이 되면서 함께 떠났던 당고를 이렇게 만나다니, 단태는 감회가 새로웠다. 종자를 죽여 륜사의 기를 꺾으려 했던 당고는 오히려 륜사가 파놓은 함정에 빠져 죽을 뻔했다. 당시, 단태가 죽이지 말라고 나서지 않았다면 운하를 가로지르는 다리 위에서 은밀히 만날 일은 없었을 것이다.
“무슨 일입니까?”
단태가 물었다.
“거추장스러운 거, 질색인 모양이에요.”
당고는 주위를 훑고 있었다. 당가의 일원이자 장로의 한 사람으로서 백중파의 수장을 개인적으로 만난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어떠한 설명으로도 해명하기 어려울 터였다. 당고의 시선을 받은 돈덕실이 고개를 끄덕여 주변에 아무도 없음을 알렸다. 당고의 그림자라 불리는 돈덕실은 3년 전에도 진마였고, 지금도 진마였다.
단태는 침묵으로 대꾸했다. 짙은 여백은 다양한 방식으로 사용할 수 있는 요긴한 수단이었다. 깊은 적막은 다급한 재촉보다 더 큰 힘을 발휘한다는 점을 그는 알고 있었다.
“좋아요. 본론으로 들어가지요. 백중파를 견제할 뿐 아니라, 아예 무너뜨리려는 게 누군지 알고 있겠지요? 맞아요. 본가의 가주랍니다. 그는 존경할 만한 인물이지만 안타깝게도 객관적인 시각을 잃었어요. 이유는 모르겠지만 백중파를, 아니 당신을 증오하고 있어요. 그 때문에 지켜야할 선을 넘고 말았지요.”
“그래서요?”
“당신은 조직의 안전을 원하고, 나는……”
“가주의 자리를 원하는군요.”
“역시.”
당고는 활짝 웃었다. 주름 진 얼굴이 한층 더 사악하게 보였다.
“자세한 설명이 필요하군요.”
단태의 말에 당고는 꼼꼼히 준비한 계획을 들려주었다. 당현추를 끌어내리고 당고 자신이 가주 자리에 오르겠다는 내용이었다. 안 그래도 백중파를 쥐고 흔들고 무너뜨리려 하는 자들에게 본때를 보여주려 했는데, 제 발로 기회가 찾아오다니. 내심 웃은 단태는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설명을 끝낸 당고를 쳐다보았다.
“지나치게 낙관적인 계획입니다.”
“…그런가요?”
당고는 내면의 요동을 숨기려 했으나 효과적이지 않았다. 평소 누군가로부터 거절당하거나, 지적을 받는 일에 익숙하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구미가 당기는군요. 한데, 고생은 본파가 하고 열매는 용마께서 취하는 점은 재고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만.”
“뭘 원하나요?”
당고는 평정을 되찾았다. 이 사내가 계획을 걷어차지 않을 거라는 확신 덕분이었다.
“12인위원회.”
“…….”
당고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제가 12인위원회의 구성원이 된다면, 차기 당가의 가주를 전폭적으로 지원할 수 있을 겁니다.”
“호호, 재미있네요. 좋아요. 그렇게 하지요.”
당고가 돈덕실과 함께 어둠 너머로 사라지자, 단태는 홀로 남아 달빛도 없는 다리에서 검은 물을 내려다보았다. 요즘 들어 지금보다 더 기분이 좋고, 속이 후련한 적도 없다는 점은 넘겨버릴 수 없는 진실이었다. 그제야 무엇이 문제였는지 알 것 같았다.
“맞아. 난 착한 놈이 아니야.”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은 이후로 착각이 시작되었다. 어떠한 순간에도 평정을 잃지 말아야 하며, 억울해도 꾹 참으며 넘겨야 한다고 스스로 생각한 것이다.
당고의 종자였던 배망식의 장난에 죽을 뻔했던 단태는 식당에서 보기 좋게 배망식을 반쯤 죽였다. 뒤를 생각하지 않고 저지른 짓이었다. 당하고는 못 사는 성미 때문이기도 했다.
그동안 필요 이상으로 참았다. 그게 화병이 된 것이다.
웃음이 흘러나왔다. 그래, 지나치게 심각할 필요는 없다. 결존계든, 백중파든 간에.
악동 기질이 꿈틀거리자 괜찮은 계획 몇 가지가 떠올랐다. 도움을 받는다면 멋지게 성공할 수도 있는 계획이었다.
단태는 휘파람을 불며 다리를 건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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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율운현은 집무실로 들어온 사람을 보고 할 말을 잃었다. 방이 환해질 만큼 잘 생긴 남자는 단태였다.
“너는……?”
“잘 있었죠?”
“그, 그래.”
“고마워요. 제 누명을 벗겨주셔서요.”
“그거? 내가 애 좀 썼지.”
백율운현은 어깨를 으쓱거렸지만, 곧 이어진 단태의 말에 속이 서늘해졌다.
“백중이라는 사람의 뒤통수를 쳤다면서요? 그걸 유천주님이 아시면 위험할 텐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