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단태신곡-262화 (262/293)

<-- 262 회: 7-11 -->

단태는 손님용 의자에 앉았다.

“…아시니?”

백율운현은 검토하고 결정해야 할 서류가 쌓인 책상에서 빠져나와 단태 앞으로 왔다. 천황패를 손에 쥔 이후 백율가를 그녀 취향에 맞도록 바꾸기 위해 눈코 뜰 새도 없이 할 일이 많았지만, 저 아이는 절대 무시할 수 없는 인물이었다. 유천주의 집사를 경솔히 대했다가는 그 거대한 용이 날아와 백율가를 잿더미로 만들지도 몰랐다.

“아직 보고 드리지 않았어요. 그 정도 재량권은 제게도 있거든요.”

“…다행이구나.”

백율운현은 안도의 한숨을 쉬면서도 이 아이에게 당황한 꼴을 보인 게 수치스러웠다. 언젠가 제거하겠지만 당분간은 그 비위를 맞춰줄 수밖에 없었다. 단태를 통해서 유천주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어떻게 협상을 할 수 있는지 알아낸 후에 죽여도 늦지는 않다.

“할 일이 있어요.”

“유천주님 명령이니?”

유천주의 지시라면 복종하겠지만, 너 같은 애송이의 말에는 관심이 없다는 뜻이었다.

“네.”

단태는 그 의미를 모른 척 명랑하게 답했다.

“들어보자.”

“당현추를 끌어내려야 해요.”

“…뭐?”

슬그머니 올라가는 입 꼬리를 원래대로 돌리는데 힘을 써야 했다. 안 그래도 사사건건 그녀의 행동에 제동을 거는 당현추 그 작자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유천주가 왜 당현추를 무너뜨리려 하는지 알 수는 없지만, 백율운현은 잘 된 일이라고 생각했다.

“당윤추가 누군지 알아요?”

“당현추의 동생이야. 마력석을 비롯해 각종 마력 물품을 취급하는 대상단의 단주이기도 해. 당윤추는 왜?”

“유천주 님 말씀으로는 그 사람이 가주 자리를 탐내는 모양이에요.”

“아! 당윤추를 움직이라는 거구나? 그렇지?”

“역시.”

단태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감탄하자, 백율운현은 괜히 기분이 좋았다. 아무리 애송이라 해도 단태는 유천주의 마음에 든, 현재로서는 유천주와 대화가 가능한 유일한 인간이었다. 그런 사람에게 인정을 받는 것은 뿌듯한 일이었다.

구체적인 계획을 들은 백율운현은 입안이 바싹 말랐다. 실현 가능한 계획이었다. 당윤추가 원하는 대로 움직인다면 당현추는 실권을 잃고 뒷방 늙은이 신세나 될 테고, 가주 자리에 오른 당윤추는 더 이상 독단적인 태도를 보일 수 없을 것이다. 그를 도운 백율운현을 무시할 수 없을 테니까. 적당한 기회를 포착하면 백율가는 당가를 제치고 유타루체 최고의 명문가로 자리 잡을 수 있을 것이다.

단태는 그런 백율운현을 쳐다보며 그 마음까지 읽고 있었다. 탄면을 벗어 진짜 얼굴을 드러내고 일부러 무지한 아이처럼 말을 한 이유는 백율운현이 정교한 함정에 스스로 들어가도록 유도하기 위해서였다.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아무리 영민한 사람이라도 탐욕에 사로잡히면 원하는 대로 보기 마련이다. 백율운현은 그녀가 아는 계획이 전체의 일부라는 점, 계획의 진짜 목적은 따로 있다는 점을 상상도 못할 것이다. 계획이 실행된 후에야 깨닫겠지만 단태는 유천주의 뜻이라고 둘러댈 생각이고, 백율운현은 아무 말도 못할 것이다.

“전 가볼게요.”

“그래, 수고해.”

“그런데… 문제가 있어요.”

“문제?”

“활동비가 부족해요.”

단태는 노골적으로 돈을 요구했다. 대혈의 바닥에 깔린 어마어마한 양의 황금의 주인이지만 그는 이런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백율운현은 금화가 든 묵직한 주머니를 내주었지만 고개를 흔드는 단태를 보고는 주머니 두 개를 더 얹었다. 손으로 대충 무게를 달아본 후에야 단태는 활짝 웃으며 그곳을 빠져나왔다. 오가는 하인, 하녀 들의 시선을 느끼며 억지로 웃음을 참았던 그는 마차에 올라타고서야 호탕하게 웃었다.

왜 진작 이런 식으로 행동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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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현옥 안쪽 깊숙한 방으로 들어선 반우현은 창가에 서서 운하를 바라보았다.

제법 큰 범선이 돛을 접은 채 소마선 두 척이 이끄는 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 너머로 주황색 지붕이 도시 끝까지 뻗어 있었고, 단풍이 들어 울긋불긋 화려한 옷을 입은 산이 저 멀리서 도시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인기척이 느껴져 몸을 돌린 반우현은 덩치가 커서 곰 같은 인상을 풍기는 사내를 발견했다.

“어서 오세요.”

“…놀랐소. 도시의 계승자께서 미천한 자를 찾다니 말이오.”

당정추는 왼쪽 다리를 절며 다가왔다.

“앉으세요.”

원형의 탁자를 가운데 두고 마주 보며 앉은 두 사람은 가을 날씨가 좋다느니, 곧 겨울이 와서 싫다느니 별 의미 없는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주문을 받고, 그 음식이 나올 때까지도 둘 다 본심을 드러내지 않았다. 술을 한 잔씩 마신 후에야 반우현이 뜻이 담긴 말을 건넸다.

“안타까워요. 다리가 불편하다는 이유로 어릴 때부터 아예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다니요.”

“…….”

당정추는 긴장했다.

서열로 따지면 당연히 그가 당가의 지존, 즉 가주가 되어야 하지만 태어날 때부터 장애를 입은 다리를 이유로 당가의 장로회는 그를 가주 후보에서 빼버렸다. 그 결정이 당정추의 삶을 지배했다. 젊었을 때는 술을 퍼마시며 사고를 쳤다. 그러다 정신을 차려 당용파에 들어가 절치부심 노력해서 최고의 용병 중 하나로 인정받게 되었다. 그럼에도 과거의 일은 그에게도, 당가에게도 금기였다.

“숨김없이 이야기 하는 게 좋겠죠? 어르신도 아시다시피, 현 가주는 시장 자리를 노리고 있어요. 그 야심을 숨기지도 않지요. 차기 시장으로서 매우 우려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에요. 해서, 저는 현 가주를 대신할 분으로 어르신을 떠올렸어요.”

거침없는 설명에 당정추는 눈을 감았다. 가주의 자리를 깔끔하게 포기하느라 애를 쓴 지 수십 년이 지난 후에야 다시 기회가 찾아오다니. 혹시 함정일까? 아니다. 당현추가 시장이 되기 위해 무리를 하고 있다는 소문은 가문 내에도 파다했다.

“…나는 가주 자리에 관심 없소.”

“마지막 기회에요. 솔직하게 말씀하세요. 만약 어르신이 거절한다면, 저는 또 다른 후보를 찾아갈 수밖에 없어요.”

“설마?”

“맞아요.”

“당윤추는 가주가 될 자격이 없소.”

“현 가주보다는 낫다고 생각해요. 물론 어르신께서 거절한다면 말이에요.”

“…….”

당정추의 눈빛이 흔들렸다. 세상을 단 한 가지 기준으로 판단하는 당윤추가 가주 자리에 앉는다면 가문은 뿌리부터 흔들릴 것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런 사태는 막아야 한다.

반우현은 입이 근질근질했지만 꾹 참았다. 다 된 밥에 코 빠뜨리고 싶지 않았다. 재촉해야 할 사람이 있는가 하면 진득하게 기다려야 결심을 하는 사람도 있다. 당정추는 후자 쪽이었다.

잠시 후, 당정추가 태도를 분명히 했다.

“좋소.”

“잘 생각하셨어요. 당가를 위해서도 현명한 결정이라고 저는 확신해요.”

반우현은 활짝 웃었다.

의미심장한 만남을 끝내고 마차에 올라탄 그녀는 불쑥 찾아와 당가를 휘저어 놓을 계획을 들려준 백중을 떠올렸다. 차분하면서도 대담하기 짝이 없는 그 계획은 마음에 쏙 들었다. 당현추를 가주 자리에서 끌어내린다면 누구도 시장 자리를 탐내지 않을 터였다.

그러나 직접 백중을 찾아갔을 때 겪었던 그 공포는 지워지지 않았다. 시간이 느려져 얼어붙은 듯한 경험은… 밤마다 악몽으로 되살아났다. 또한 백중을 떠올릴 때마다 마음을 찌르는 열등감은 그녀가 계승자로서 부적격자라고 소리치고 있었다.

다행히 반우현은 두려움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알고 있었다. 도망치려 한다면 오히려 발목이 잡히고 만다. 오금이 저리고 식은땀이 흐르며 가슴이 무너질 것 같아도 맞서야 한다. 두려움은 그 이유를 인정하는 순간, 사라져버리는 신기루 같은 감정임을 이번에 다시 한 번 깨달았다.

반우현은…… 자기가 백중에 비해 부족한 사람이라는 진실을 받아들였다. 그 힘겨운 수용은 한 사람의 능력만으로 도시를 지배할 수 없다는 깨달음 덕분에 가능했다.

혼자 힘만으로 이 거대한 도시를 다스릴 수 없다. 반가는 가문의 역량은 물론 유력 가문과의 그물망 같은 협력을 통하여 도시를 운영해왔다. 백중이 따라잡지 못할 만큼 탁월한 인물이라고 해도 그가 반가 출신이 아닌 이상, 도시의 지배자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이번에 당현추를 실각시키면, 다음은…… 당신 차례야.”

반우현은 백중을 떠올리며 속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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