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3 회: 7-12 -->
대출금 반환 문제로 만난 시장은 아무런 해결책을 내놓지 못했다. 시장의 예상은 빗나갔다. 최악의 상황은 넘긴 셈이었지만 유력 가문이 힘을 합쳐 빌려준 자금에 대한 이자조차 감당하지 못할 만큼 시청의 재정은 파탄 일보 직전이었다.
당현추는 스스로 물러나야 마땅한 늙은이를 노려봤다.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경기가 회복되고 있으니 조금만 더 기다려주게.”
“벌써 석달 째 시청이 원금 뿐 아니라 이자 지급까지 연기했다는 사실, 시장님께서도 잘 아시잖습니까?”
“곧 재원을 마련할 수 있을 걸세.”
“복안이라도 있으신지요?”
당현추는 신나게 비꼬았다.
3년 전 유천주가 시청을 쑥대밭으로 만들기 전까지 시장은 주도권을 움켜쥔 채 당가를 비롯해 주요 가문들을 벼랑으로 몰아넣었다. 시장으로서의 권한과 방단이 확보한 정보력을 바탕으로 도시 전역을 향한 지배력 확대는 유력 가문들에게 있어 커다란 위협이었다.
그 당시 당현추는 시장을 찾아가 사정을 했지만, 반명은 일고의 가치도 없다며 거절했었다. 불과 3년 만에 이토록 형편이 바뀌다니. 이래서 세상은 살 만한 곳이다.
“원정대가 출발한다면……”
그놈의 원정대! 지긋지긋했다.
“천마들은 돌아가 버렸습니다. 아무런 말도 없이요. 설마, 벌써 잊으셨습니까? 혹시 치매라도 걸린 겁니까?”
“…….”
머리가 허옇게 센 반명은 몸을 부르르 떨었지만 아무런 대꾸도 할 수 없었다.
“자금 지원을 중단하면 시청은 무너지고, 도시를 지탱하는 기능은 그대로 멈춰버릴 겁니다. 그래도 좋다는 겁니까?”
“뭘 원하는가?”
반명은 당현추가 원하는 질문을 던졌다.
“하야하셔야죠.”
“…하야?”
반명은 눈을 감았다. 은퇴가 아니라 하야라니. 은퇴는 그를 대신하여 반우현이 시장을 계승한다는 뜻이지만, 하야는… 반가의 지배가 끝나고 당가의 통치가 시작된다는 의미였다. 눈에 흙이 들어간다고 해도 그 일만은 용납할 수 없었다.
“고집을 피우고 싶다면 마음대로 하십시오. 하지만 그토록 아끼는 물의 도시가 망가지는 꼴을 보고 싶지 않다면, 제 말대로 하셔야 할 겁니다.”
“…생각해보겠네.”
“사흘 드리지요.”
임시 집무실을 빠져나온 당현추는 주먹을 꽉 쥐고 속으로 환호했다. 저 능구렁이가 드디어 막다른 골목길에 몰렸다. 돈줄을 완벽하게 막아버렸으니 반명이 하늘을 나는 재주가 있다고 해도 포기할 수밖에 없음을 그는 잘 알았다. 사흘 안에 반명은 공식적으로 시장 자리를 내놓겠다고 발표할 것이다. 11인위원회가 차기 시장에 대한 논의를 시작하겠지만, 당현추의 야망에 제동을 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앓던 이가 빠진 것처럼 시원했다.
“궁누경으로 가셔야 합니다, 가주님.”
비서관이 다가왔다.
“좋아.”
당가의 문양이 그려진 고급 마차에 올라탄 당현추는 잠시 눈을 감았다. 당가의 가주로서 최초의 시장이 되는 순간을 떠올려 봤다. 수만 명이 운집한 시청 광장을 내려다보며 손을 흔들면 우레 같은 함성이 도시 전역으로 퍼질 테고, 시장 취임을 축하하는 축하객들의 행렬은 동쪽의 성문 밖까지 이어질 터였다. 당가의 지존이 된 순간부터 꿈꾸기 시작한 유타루체의 지존 자리가 눈앞에 있었다.
이제 사흘만 기다리면 된다.
규칙적으로 덜컹거리던 마차가 멈췄다.
마차에서 내린 당현추는 11인위원회가 열릴 지하 회의실로 이어지는 문으로 다가갔다. 비서관이 그 문을 열자 기지개를 켜며 하품까지 한 그는 곳곳에 등잔불이 켜진 통로를 걸었다.
수현옥과 더불어 유타루체에서 손꼽히는 요리점으로 명성을 얻은 궁누경 지하에 자리 잡은 견고한 방은 11인위원회의 모임 장소로 사용된 지 벌써 30년이 넘었다. 처음 그 방이 선택된 이유는 세 개의 통로 때문이었다. 북쪽, 동쪽, 서쪽으로 각각 뻗어 있는 통로는 껄끄러운 관계에 놓인 가주들이 방으로 내려오면서 얼굴을 붉힐 필요가 없다는 이유로 매우 유용했던 것이다.
괜히 사흘이라는 기간을 준 게 아닌가 생각하며 방으로 들어선 당현추는 눈살을 찌푸렸다. 방은 텅 비어 있었다. 11인위원회가 열리기도 전에 도착했을까? 그럴 리는 없다. 누군가를 기다리게 하기를 좋아하지, 기다리는 일은 질색이었다.
비서관이 실수를 했을까?
몸을 돌린 당현추는 주위를 살폈지만 항상 그림자처럼 따라붙던 비서관을 찾을 수 없었다.
“이런…….”
가주가 되기 위해 삼촌을 죽여야 했다. 그 자리를 탐내던 동생의 첩을 본보기로 살해했다. 어린 여동생을 억지로 마탑의 종자로 쫓아내기까지 했다. 인간이라면 할 수 없는 짓을 해서 가주가 된 당현추는 금세 상황을 파악하고 행동을 취했다.
일단, 안쪽으로 문을 잠갔다.
세 개의 문 모두.
그런 다음, 생각에 잠겼다.
대체 누가 이토록 대담한 짓을 벌였을까?
평생 병신처럼 살아온 당정추? 그럴 리는 없다. 그를 도와줄 가문 내부의 세력은 존재하지 않는다. 당정추를 주기적으로 감시하여 그와 가까워지는 사람을 무참히 밟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나무 상자에 담겨 배달된 첩의 머리를 보고 혼절한 당윤추가 칼을 뽑았을까? 돈 밖에 모르는 놈이 가주의 자리에 앉기를 바라는 사람은 극소수였다. 당윤추가 가주가 된다면 당가는 더 이상 당가가 아닐지도 몰랐다.
“둘 다 아니야.”
당현추는 용금탄으로 올라가서 보다 넓은 세계를 맛봤을 뿐 아니라, 야심까지 키운 여동생을 떠올렸다. 그래, 당고 짓이야. 마둔수탑이 팔마탑의 일원이 되는 바람에 수도에서 분에 넘치는 대접을 받았겠지. 마치 그녀 자신이 중요한 인물이라도 된 것처럼 느꼈겠지. 죽일 수도 있었지만 마탑으로 보냄으로 목숨은 살려준 오라버니의 은혜를 이런 식으로 갚다니. 그 대가를 치르게 해주리라.
당현추는 발을 뻗었다. 팡, 소리가 났다. 그래, 다리는 여전히 죽지 않았다. 오랜만에 악료팔운각의 매서운 맛을 보여준다면 당고도 정신을 차릴 것이다. 그래봐야 늦은 셈이지만.
세 개의 문 중에서 들어왔던 문을 열었다.
밖에는 아무도 없었다.
“오호, 날 쫓아오지 않았단 말이지?”
당현추는 여동생의 배짱이 마음에 들었다. 어릴 때부터 그 아이는 대담했고 독살스러웠다. 그때 꺾어버렸다면, 아예 죽여 버렸다면 이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겠지만, 당고는 마둔수탑에 들어가 용마로서 가문을 위해 몇 가지 공을 세웠기에 이제 와서 죽여야 한다는 게 내심 아쉬웠다. 왼손 하나를 잘라버리는 걸로 이번 일을 덮을 수 있을까?
천천히 걸었다.
산책이라도 나온 사람처럼.
출구가 가까워질 무렵, 당현추는 뚱한 눈으로 횃불을 배경으로 서 있는 사람의 윤곽을 노려보았다. 예상이 틀렸다. 당윤추가 문을 막고 있을 줄은 상상도 못했다. 당연히 녀석은 혼자가 아니었다. 아마도 막대한 돈으로 용병을 고용했을 것이다.
“아이구, 형님! 안녕하셨소?”
당윤추가 외치자 메아리가 울렸다.
“간이 배 밖으로 나왔구나.”
“하도 겁을 먹어서 간이 쪼그라들다 못해 없어져버렸소. 다 형님 덕분이오.”
“못난 놈.”
당현추는 악료팔운각의 보법을 이용하여 산악지대를 통과하는 바람처럼 돌진했다.
화들짝 놀라 뒤로 물러선 당윤추 앞을 사내들이 일사분란하게 막았다. 그 동작을 본 당현추는 눈살을 찌푸리며 뒤로 물러섰다. 대번에 백율가의 무술임을 알아본 것이다.
그때, 백율운현이 앞으로 나왔다.
“오늘 11인위원회는 취소되었는데, 듣지 못하셨나 봐요?”
“…감히!”
“아무리 가주께서 권력을 손에 쥐었다고 해도 지켜야할 선이란 게 있잖아요. 대체 왜 그러셨어요? 가주 개인의 탐욕 때문에 백율가는 막대한 손해를 볼 수밖에 없었어요. 억울해도 힘이 없으니 잠자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는데, 다행히 하늘이 이런 기회를 내려주셨네요.”
백율운현이 손을 들자, 백율가의 정예라 할 수 있는 사내들이 앞으로 나왔다. 절도 있는 동작에 거대한 힘이 담겨 있었다. 당현추는 즉시 그들을 알아보았고, 속으로 신음을 흘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