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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악진이군…….’
백율가가 당가팔기, 즉 당가가 자랑하는 여덟 개의 무술을 무너뜨리기 위해 은밀히 연구를 해왔는데, 벽악진은 바로 당현추가 자랑하는 악료팔운각을 무력화하기 위해 만들어진 교묘한 진법이었다. 악료팔운각의 강점을 고스란히 약점으로 만드는 벽악진 때문에 목숨을 잃거나 크게 다쳐 은퇴할 수밖에 없었던 선대의 고수들을 기억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현추는 뒤로 물러섰다.
“역시, 식견이 대단하세요. 벽악진을 알아보시다니요.”
“이곳을 빠져나가면 백율가를 무너뜨려 잿더미로 만들어버리겠다.”
“빠져나갈 수 있다면, 응당 그러셔야죠.”
백율운현이 들고 있던 손을 내리자, 벽악진을 이루는 수십 명의 정예 무사들이 앞으로 달려 나갔다.
얼굴이 화끈거렸지만 당현추는 냉철하게 후퇴를 선택했다. 혼자 이곳에서 싸워봐야 승산이 없음을 그는 잘 알았다. 천황패를 손에 쥔 백율운현이 직접 왔다면 있는 힘을 다해 벽악진을 박살낸다고 해서 저 문을 통과할 수는 없을 터였다.
숨이 턱에 차도록 내달린 당현추는 북쪽이 아니라, 동쪽으로 뻗어 있는 통로로 접어들었다. 백율운현이라고 해도 세 개의 통로 전부를 막을 수는 없다. 그는 거기에 희망을 걸 수밖에 없었다. 그 때문에 나가기만 하면 백율운현을 짓밟아버리리라 결심했다.
“왔는가?”
그 입구에도 낯익은 얼굴이 있었다.
당현추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깔끔하게 죽이지 않은 자들이 오늘 망령처럼 등장했다. 장남으로 태어났음에도 몸의 장애로 권리를 빼앗긴 사내를 노려본 그는 앞으로 걸었다.
“안녕하세요?”
쾌활한 목소리.
당현추는 멈춰 섰다. 골치가 지끈지끈 아팠다. 저 아이가 왜 여기 있을까? 예감이 좋지 않았다. 아니, 예감이 아니라… 벌어진 현실이었다. 그는 도시의 계승자를 응시했다. 계승자 뒤에는 반가의 무사들이 명령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시장으로부터 이야기를 들었을까? 아니다. 그러기엔 시간이 부족했을 것이다.
“대대로 시장을 배출하는 가문의 계승자로서 금기를 깨뜨리려는 건가?”
시장과 그 계승자는 다른 가문 내부의 일에 관여할 수 없었다. 그 불문율은 법처럼, 때로는 법보다 더 절대적이었다. 서로를 향한 존중을 강제함으로써 공존을 이루는 방식이었다.
“금기는 먼저 깨뜨리셨잖아요.”
반우현은 팔짱을 꼈다.
그 말에 당현추는 기운이 빠졌다. 당윤추와 당정추가 앞으로 나섰지만, 실상은 백율가와 반가가 손을 잡았다. 일이 이 지경이 되도록 눈치를 채지 못하다니. 백중파를 견제하고 시장을 압박하는 일에 열중한 나머지 수상쩍은 낌새를 놓친 게 분명했다.
더 이상의 고민은 시간 낭비라고 확신한 당현추는 말없이 달려 나가 반가의 무사들과 충돌했다.
악료팔운각이 춤을 추었다. 반극권이 거기에 대항하며 피를 뿌렸다. 뼈 부러지는 소리, 억눌린 신음이 통로의 벽에서 반사되며 흩어졌다. 당현추는 반극권이 상상 외로 고강한 무술이라는 사실에 놀랐고, 반우현은 당현추 혼자 수십 명의 무사들에게 둘러싸이고도 제압당하기는커녕 예리한 공격으로 벌써 다섯이나 죽었다는 사실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전력을 다하지 않는다면… 당현추를 놓치고 말리라.
반우현이 휘파람을 불자, 마법사들이 나섰다. 제아무리 무술에 능한 당현추라고 해도 뒤엉켜 싸우는 와중에 마법으로 공격을 받으면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말 터였다. 게다가 마법은 타격 방식이 무술과 달라 예측하기가 쉽지 않았다.
당현추는 봉화접, 무호공을 펼쳐 틈을 노리는 마법을 막았지만, 완전히 봉쇄하지는 못했다. 옆구리, 허벅지, 팔뚝에 얼음 형태의 화살이 박혔다.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내공을 일으켜 얼음 화살을 녹여버렸지만 그 충격은 결코 작지 않았다.
반우현은 백중의 조언대로 제압하기보다는 출구를 막는다는 전략을 사용했다.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서였다. 그 방법은 효과적이었다. 당현추 같은 고수를 죽이기는 어렵지만, 좁은 통로 밖으로 나오지 않도록 막는 일은 상대적으로 쉬웠다.
반가의 무사 열일곱을 쓰러뜨린 후에 당현추는 주춤주춤 물러섰다. 반우현이 쫓지 않자 씁쓸하게 웃은 그는 어둠 너머로 사라졌다.
비틀거리면서.
“쫓아가서 죽여야 하지 않나?”
형을 두려워하는 당정추가 중얼거렸다.
반우현은 그를 무시했다.
당현추는 습관처럼 옷에 넣어 다니던 환약을 입에 털어 넣었지만 몸 상태는 급속도로 악화되었다. 시야가 흐려졌고, 균형 감각이 왜곡되어 한동안 벽을 잡고 서 있기도 했다. 그래도 포기는 그에게 어울리지 않았다. 서쪽으로, 하나 밖에 남지 않은 출구로 그는 계속 걸었다.
마침내 출구가 보였을 때, 당현추는 미친 듯이 웃었다.
거기 당고가 서 있었다.
마둔수탑 출신 마법사들과 함께.
“…후후, 딱 죽기 좋은 날이군.”
“저도 그렇다고 생각해요, 오라버니.”
“재미있구나.”
“전 아직도 단검을 목에 대고 이 자리에서 죽을래, 아니면 마둔수탑으로 들어갈래, 라고 물었던 오라버니의 목소리와 그 눈빛을 잊을 수 없어요.”
“인과응보라는 거냐?”
“당가 사람들은 잘 잊지 않잖아요.”
“그건 맞다.”
“깔끔하게 보내드리겠어요.”
“지저분하게 가고 싶구나.”
당현추는 그가 아는 무술 중 최고의 속도를 자랑하는 게 무엇인지 속으로 생각했다. 마법사와의 대결은… 얼마나 가까이 다가가느냐에 달려 있었다. 접근할 수만 있다면 무사는 마법사를 짓밟을 수도 있다.
당현추가 월야효비조를 펼쳐 순식간에 다가온 순간, 당고는 기다렸다는 듯 훤편을 펼쳤다. 물의 채찍이 빠르게 날아가 당현추를 감았다. 그러나 당현추는 몸을 비틀어 그 채찍을 피한 다음, 추온벽을 주먹으로 두드렸다. 물의 벽을 만들어낸 마법사들은 충격에 휘청거렸지만 물러서지는 않았다. 당현추는 접근에 실패했다. 원거리에서는 마법사가 절대적으로 유리함을 알기에 그는 마지막 순간을 기다렸다. 조금 전 공격은… 몸에 있는 힘을 모조리 짜낸 최후의 일격이었다.
‘이렇게 삶이 끝나는구나.’
지나친 욕심을 부렸을까?
그래서 이런 함정도 눈치 채지 못했을까?
당고가 만들어낸 담검이 허공에 나타났다. 맑고 투명한 물의 마법검은 당현추의 심장을 향해 빠르게 날아왔다. 당현추는 피할 생각이 없었다. 이왕 죽는다면 남자답게 서서 죽고 싶었다.
찢어진 옷 사이로 드러난 가슴에 담검이 닿는 순간, 피부를 뚫고 들어가 갈비뼈를 부수고 혈액을 몸으로 밀어내는 심장을 터트리기는커녕 담검은 그 형태를 잃었다. 평범한 물이 되어 바닥으로 쏟아진 것이다. 눈을 감고 죽음을 기다렸던 당현추도 놀랐지만, 갑자기 마법이 풀려 충격을 받아 내장이 상한 당고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때, 당현추 뒤에서 손이 불쑥 나오더니 목덜미를 잡고 당겼다. 당현추는 아버지의 손에 잡힌 아이처럼 공중으로 들린 채 당고에게서, 출구에서 빠르게 멀어졌다.
“잡아!”
무릎을 꿇고 핏덩이를 뱉은 당고가 소리쳤지만, 당현추는 어둠 너머로 사라진 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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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율청현은 숨을 씩씩거렸다.
하마터면 죽을 뻔했다.
피곤으로 지쳐 바위에 앉아 깜빡 졸았는데, 어느새 화융이 다가와 그를 덮친 것이다. 피처럼 붉은 덩굴은 입고 있던 옷을 태웠고, 피부에 깊은 자국을 남겼다. 붉게 달아오른 화상에서 진물이 흘러내렸지만, 몸부림을 쳐서 살아남았다는 사실이 그 무엇보다 중요했다.
눈물이 핑 돌았다.
눈만 뜨면 더럽고 위험천만한 우리로 기어들어가 청소를 해야 했다. <박물지>에나 나올 법한 기괴한 것들로 그득한 우리는 세 사람이 깨끗히 하기엔 너무 컸다.
청소 구역을 정할 때는 항상 의견이 충돌했다. 말투 때문에 주먹다짐을 했고, 때로는 숨어서 뒤통수를 노리기도 했다. 한 사람이라도 다치거나 죽으면 청소할 구역이 늘어난다는 사실이 아니었다면 이미 참극이 벌어졌을 터였다.
열각수는 유달리 얌전했지만 백율청현은 방심하지 않았다. 저 커다란 사슴은 갑자기 날뛰어 사방을 화염으로 채워버린다. 얼마 전에는 그 불길에 휘말려 머리카락이 타버렸다. 겨우 열각수 우리를 깨끗이 치우고 나온 그는 조그만 석실로 향했다.
저 위에서는 노골적으로 무시했던 명종태, 유무영이 작업을 마치고 와서 쉬는 중이었다. 두 사람은 백율청현을 보고 일어서지도 않았다. 무례한 태도를 지적하고 싶지만, 몸이 고달파 입을 열고 싶지 않았다.
한숨이 흘러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