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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셨사옵니까, 폐하?”
명국영은 황제 앞에 고개를 조아렸다. 이른 아침 급한 일이라며 사람을 보낸 까닭이 무엇인지 궁금했지만 조바심을 내비치진 않았다.
“나와 함께 갈 곳이 있네.”
황제는 금색이 주를 이루는 화려한 옷 대신 평범하고 수수한 복장을 하고 있었다. 먹고 살기에는 충분하나 권력과는 상관이 없는 중산층의 사내로 위장한 것이다.
“…혹시 암행이옵니까?”
“자네와는 긴 이야기를 할 필요가 없어서 좋아.”
황제가 빙긋 웃었다.
군강검 뒷문으로 빠져 나온 두 사람은 챙이 긴 모자를 쓰고 있었다. 덩치 큰 명마 대신 택한 노새에 타니 속도가 나지 않은데다 눈높이까지 낮아서 우스꽝스러웠다. 그러나 유지비가 많이 드는 말과 달리 노새는 중산층에게 유익한 가축이어서 제법 많은 수의 노새가 도시 곳곳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명국영을 뒤를 힐끔거렸다. 암행이라고 해서 황제와 허약한 서생, 둘만 다닐 수는 없다. 과연 근위기사단이 제각기 다른 복장을 하고 천천히, 그러나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여 이쪽을 주시하며 따라오고 있었다.
“이런 시선으로 보니, 새롭군.”
활력과 소음으로 그득한 도시의 길거리를 본 황제가 말했다.
“눈이 달라지면 세상도 달라지는 법이옵니다.”
“요즘 무엇을 보고 있나, 황정어사?”
황제는 무심한 어조로 물었지만, 명국영은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황제처럼 명민한 군주가 암행을 나와 던진 질문이 아닌가. 깊이 파고들어야 하리라.
“백중파를 눈여겨보고 있사옵니다.”
명국영은 황제와 함께 교차로를 가로질렀다. 마차 한 대가 난폭하게 달려오다 명국영와 황제 앞에서 멈췄는데, 마부는 마음이 급한지 욕을 입에 달고 있었다.
조마조마한 명국영과 달리, 황제는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숨긴 무기에 손을 대고 이쪽으로 달려오려던 근위기사단도 결국 움직이지 않았다.
“백중이 그 아이라면서?”
“…….”
명국영은 놀라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잠시 후에야 륜사가 단태에 대한 이야기를 황제에게 알렸음을 깨달았다. 그는 륜사를 탓하기보다 자신의 경솔함을 질책했다.
“놀랐나보군.”
“…송구하옵니다.”
“자네에게서 들었다면 좋았을 것을.”
“…….”
다시 말문이 막힌 명국영.
두 사람은 상아별로의 광장으로 접어들었다. 많은 사람들이 광장에 모여 한쪽 방향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들은 백중이 광장으로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백중파에 소속된 사람들의 수가 그 가족까지 합치면 10만 명을 넘어섰다더군. 게다가 용금탄은 물론 나머지 육성시에도 백중파의 지부가 생겼다는데, 알고 있었나?”
“…몰랐습니다.”
“단 3년, 길어야 4년인데… 대단해. 그 조그만 아이가… 거목이 되었군 그래.”
“그래봐야 폐하의 백성이옵니다.”
“그럴까?”
황제는 깊고 무거운 눈빛으로 광장을 바라보았다. 백중이라는 자에 대한 판단은 쉽지 않았다. 그가 진정한 적이라는 점은 분명하나, 그를 제거하려다 오히려 그를 키우는 역효과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유타루체의 기득권층은 백중파가 성장하도록 도와준 꼴이 되고 말았다. 황제로서 그런 전철을 밟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고 내버려둘 수도 없었다.
“폐하.”
“듣고 있네.”
황제는 광장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거기 있는 사람들의 열망 때문이었다. 목숨까지 바치면서까지 충성을 다할 것만 같은 저 사람들의 마음을 얻고 싶었다.
“미흡한 제 책을 읽어 보셨습니까?”
“<제국의 빛과 그늘>, 말인가?”
“그렇사옵니다.”
“열 번은 읽었을 거야. 한때는 그 책이 알려주는 대로 제국을 운영할 생각도 있었으니까.”
“…몰랐사옵니다.”
명국영은 감격스러우면서도 ‘한때’라는 말에 주목했다. 지금은 아니라는 뜻이다.
“무엇이 그 책을 버리게 만들었는지 자네는 아는가?”
“가르침을 구하옵니다.”
“현실이야, 현실. 그 책은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려주지만 어떻게 갈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답도 주지 않네.”
“…옳은 말씀이십니다.”
그 책을 돌아볼 때마다 후회하는 대목이었다.
“황정어사, 어떻게 가야 하는지 지금은 아는가?”
“흐릿한 답을 가슴에 품고 있습니다.”
“듣고 싶군.”
“실망하실 겁니다. 아니, 분노하실지도 모릅니다, 폐하.”
“그래도 궁금하네.”
황제는 물러서지 않았다. 바로 이런 질문을 던지고, 그 답을 얻기 위해 명국영을 데리고 이곳으로 온 것이다.
“그 아이가 답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 아이?”
황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단태가 타고난 능력이 있거나 개인적인 노력으로 무언가를 성취했기 때문에 그의 삶이 답이라고 생각하는 게 아닙니다. 누구나 노력한다고 해서 단태처럼 살 수는 없다는 뜻입니다. 그 아이의 삶은… 하늘의 뜻입니다.”
“뭐?”
황제는 귀를 의심했다. 감히 천자라 불리는 황제 앞에서 하늘의 뜻을 운운하다니. 천자의 뜻이 곧 하늘의 뜻임을 뻔히 아는 명국영의 입에서 그와 같은 말이 나올 줄은 상상도 못했다.
“천마가 된 순간에 대해서 륜사에게 물어보신 적 있으신지요?”
“…있네.”
“아마, 륜사는 모른다고 했을 겁니다.”
“그런가?”
황제는 솟아오르는 울화통을 억누르느라 목소리까지 딱딱해졌다. 끝까지 듣고 나서 화를 낼지 판단할 생각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받은 수준 높은 교육의 힘이었다.
“세상에 존재하는 천마들 모두 같은 대답을 합니다. 과거에 살았던 천마들도 마찬가집니다. 그들 중 누구도 이러이러한 방식으로, 이러이러한 단계를 거쳐 천마가 되었노라고 자신 있게 말하지 않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그들도 모르니까요.”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뭔가?”
황제는 심드렁했다.
“천마는 그 누구보다 뛰어난 재질의 소유자도 아니고, 그 누구보다 월등히 노력한 마법사도 아닙니다. 그들만큼, 어쩌면 그들보다 더 끈질기게 단련한 마법사들도 세상에는 존재합니다. 그러나 오직 극소수의 마법사들만이 천마의 경지에 오릅니다. 그들이 천마로 불리는 이유는… 하늘이 그들을 천마로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
그제야 황제는 명국영의 의도를 깨달았다.
“하늘이 폐하를 천자로 세웠사옵니다. 바로 그 하늘이 단태로 하여금 백중파를 이끌게 하였습니다. 이게 무슨 뜻이겠습니까? 하늘은 단태를 통하여 폐하께 뜻을 전하고 있습니다. 하늘의 뜻입니다. 저는 폐하께서 그 뜻을 살펴 용령을 세우시기를 바랍니다.”
“역적이로군.”
“…….”
이번엔 명국영이 입을 다물었다. 역적처럼 무시무시한 단어는 존재하지 않는다. 황제의 입에서 흘러나온 그 단어로 인해 수천 명, 어쩌면 수만 명이 죽어나갈지도 모른다.
그때, 광장에 있던 사람들이 동시에 몸을 일으켜 세웠다. 눈을 의심할 만큼 일치된 동작이었다. 그들이 한 걸음 백중거 쪽으로 내디딘 순간, 건물 밖으로 단태가 나왔다.
수백 명의 사람들은 광장의 남쪽으로 몰려들었다. 단태는 그들 사이로 들어가 부모가 데려온 아기들의 머리에 손을 올리고 복을 빌어주었고, 웃으며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으며, 병자의 몸에 손을 대고 회복 마법을 펼쳤다.
“저게 하늘의 뜻인가?”
“…그렇사옵니다.”
“내 눈에는 제국의 기반을 뒤흔들어 무너뜨리는 역적과 그 무리만 보인다면?”
“폐하.”
명국영은 답답했다. 황제가 단태에게서, 백중파에게서 통치 원리를 배우기를 간절히 바랐건만. 황제는 오히려 단태와 백중파에게서 위험을 직감하고 뿌리째 뽑을 생각을 하고 있었다.